“동지 정사(冬至正使) 낙림군(樂林君) 연(<土+延>)이 연경(燕京)에서 치계(馳啓)하기를, ‘황제가 금천(金川)의 정벌이 장차 며칠 안되어 고공(告功)하여 집훈(集勳)하도록 신달(申達)했고, 2월 초9일에는 먼저 계주(계<초두머리 아래 魚+선칼도방>州)의 동릉(東陵)을 전알하고 3월16일에는 또한 역주(易州)의 서릉(西陵)에 거둥하여 예를 차린 후 황태후를 받들고 산동(山東)을 순행하고서, 장사(將士)들이 개선할 시기에 맞추어 회가(回駕)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1993년 완역된 조선 정조실록 국역본에는 정조 즉위년(1776년) 4월7일자 기록 중 6번째 기사가 이렇게 번역돼 있다. 한문으로 쓰인 원문을 나름 한국어로 옮겼다고는 하나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고공하여 집훈하도록 신달했고’는 괄호 안에 병기된 한자를 봐도 무슨 뜻인지 도통 감이 오지 않는다. 전문가조차 읽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하니 일반 독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1968년부터 1993년까지 완역에 26년이 걸린 조선왕조실록 국역본은 실록에 대한 접근성을 크게 높였다는 의미가 있으나 숱한 번역 오류, 전문가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옛 어투 등 문제점도 지적돼 재번역이 이뤄지고 있다.
2026년 완료를 목표로 2011년부터 ‘조선왕조실록 번역 현대화 사업’을 진행 중인 한국고전번역원의 도움을 받아 번역이 끝난 내용 일부를 살짝 들여다봤다.
재번역이라 해서 글자 해석상 오류나 오탈자 수정, 어투 현대화 등 단순 작업으로 생각하면 오해다. 다양한 관련 문헌을 비교 검토해 당대 정치상황과 제도, 주요 사건 등을 파악하고 실록 원문 자체의 오류까지 잡아내는 강도 높은 작업이다.
앞서 소개한 1776년 4월7일 6번째 기사는 이렇게 다듬어졌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낙림군(樂林君) 이연(李연<土+延>)이 연경(燕京)에서 급히 장계하였다. ‘황제가 금천(金川) 지방의 정벌이 며칠 안에 마무리될 것이므로 이렇게 전공(戰功)을 세운 사실을 고하기 위하여 2월9일에 먼저 계주(계<초두머리 아래 魚+선칼도방>州) 동릉(東陵)에 나아가 아뢰었고, 2월16일에는 또 역주(易州) 서릉(西陵)에 행행하여 예를 행하였으며, 그 뒤 황태후를 모시고 산동(山東)을 순행하였는데, 장사(將士)들이 개선할 시기에 맞추어 어가를 돌려 돌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원전의 한자어 표현을 그대로 옮겨다 쓰다시피 한 기존 번역본과 달리 최대한 현대 한국어로 풀어내 훨씬 쉽게 읽힌다.
매끄러워진 번역만큼 눈에 띄는 것은 풍부한 주석이다.
기존 번역본에는 이 기사에 관한 주석이 전혀 없었다. 재번역본에는 본문에 언급되는 금천 정벌이 청(淸) 고종 36년 지금의 쓰촨(四川) 지역인 대금천과 소금천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시작, 그해 끝났다는 사실이 각주로 설명돼 있다. 계주 동릉과 역주 서릉이 어디에 있는 누구의 무덤인지도 각주를 보면 알 수 있다.
아울러 실록 원문 자체에 있을지 모를 오류를 잡아내고자 기사 내용과 관련된 다른 문헌을 비교·대조하는 교감작업을 통해 신뢰도를 높였다. 이 기사 본문에 등장하는 2월16일 정말 청 고종이 서릉을 찾았는지 확인하고자 청나라 정사(正史)인 청사고(淸史稿)까지 살펴보고 해당 내용을 각주로 소개하기도 했다.
정영미 한국고전번역원 조선왕조실록팀장은 “기존 번역본의 주석이 기사와 관련된 고사(故事)나 용어풀이 중심이었다면 재번역본에서는 다양한 문헌자료를 연구해 기사 이해에 도움을 주는 설명을 대폭 추가했다”며 “주석의 절대적 양은 기존 번역본의 6배쯤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록 서문에 해당하는 총서(總序) 재번역에서도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대부분 정조의 이름은 이산(李산<示+示>)으로 알고 있다. 기존 번역본도 그렇게 표기했다. 그런데 재번역에서는 같은 한자임에도 음을 ‘산’이 아닌 ‘성’으로 표기했다.
”대왕은 휘(諱)가 성(<示+示>)이고 자는 형운(亨運)이며, 영종대왕(英宗大王, 영조)의 손자요,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혜빈(惠嬪) 홍씨(洪氏)이다.”
’이산’이라는 표기가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재번역본 각주를 보면 정조의 이름에 나름의 변천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문헌을 통해 밝혀진다.
각주에 따르면 적어도 정조가 즉위할 당시까지 이름은 ‘이산’이었다. 정조실록 즉위년 5월22일자에는 왕의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理山’(이산)이라는 지명을 ‘楚山’(초산)으로, ‘尼山’(이산)을 ‘尼城’(이성)으로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 정조의 이름은 ‘이산’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조 20년(1796년) 반포된 한자 발음사전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에는 해당 글자의 음이 ‘셩’(성)으로 표기되고 ‘어휘’(御諱, 임금의 이름)라는 주석이 달렸다. 정조의 이름이 ‘이성’으로 바뀌어 불렸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를 이어 즉위한 순조가 선왕의 이름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지명인 ‘尼城’(이성)을 ‘魯城’(노성)으로, ‘利城’(이성)을 ‘利原’(이원)으로 고쳤다는 순조실록 기사도 정조의 이름이 ‘이성’이었음을 뒷받침하는 기록으로 소개된다.
이런 설명을 읽고 나면 재번역본에 왜 ‘이산’이 아닌 ‘이성’이 등장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정조의 이름이 명기된 정조실록이 순조 초기 편찬됐고, 당시에는 해당 글자가 ‘성’으로 불린 점을 염두에 둔 결과다.
이밖에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원문을 그대로 옮겼거나 반대로 맥락을 잘못 이해하고서 번역한 부분 등도 바로잡고 주석을 달아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려 했다.
한국고전번역원은 승정원일기, 일성록(日省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등 참고자료가 비교적 풍부한 정조실록의 재번역에 먼저 착수했다. 지금까지 48책 가운데 27책의 번역을 끝낸 상태다. 기존 번역본 전체 분량은 413책에 이른다.
연합뉴스
새로 번역되는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번역원이 2026년 완역을 목표로 재번역을 진행 중인 조선왕조실록 중 번역이 완료된 정조실록의 한 페이지. 번역 오류를 바로잡고 어투를 현대적으로 대폭 바꿨으며 풍부한 주석으로 배경을 설명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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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완역된 조선 정조실록 국역본에는 정조 즉위년(1776년) 4월7일자 기록 중 6번째 기사가 이렇게 번역돼 있다. 한문으로 쓰인 원문을 나름 한국어로 옮겼다고는 하나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고공하여 집훈하도록 신달했고’는 괄호 안에 병기된 한자를 봐도 무슨 뜻인지 도통 감이 오지 않는다. 전문가조차 읽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하니 일반 독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1968년부터 1993년까지 완역에 26년이 걸린 조선왕조실록 국역본은 실록에 대한 접근성을 크게 높였다는 의미가 있으나 숱한 번역 오류, 전문가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옛 어투 등 문제점도 지적돼 재번역이 이뤄지고 있다.
2026년 완료를 목표로 2011년부터 ‘조선왕조실록 번역 현대화 사업’을 진행 중인 한국고전번역원의 도움을 받아 번역이 끝난 내용 일부를 살짝 들여다봤다.
재번역이라 해서 글자 해석상 오류나 오탈자 수정, 어투 현대화 등 단순 작업으로 생각하면 오해다. 다양한 관련 문헌을 비교 검토해 당대 정치상황과 제도, 주요 사건 등을 파악하고 실록 원문 자체의 오류까지 잡아내는 강도 높은 작업이다.
앞서 소개한 1776년 4월7일 6번째 기사는 이렇게 다듬어졌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낙림군(樂林君) 이연(李연<土+延>)이 연경(燕京)에서 급히 장계하였다. ‘황제가 금천(金川) 지방의 정벌이 며칠 안에 마무리될 것이므로 이렇게 전공(戰功)을 세운 사실을 고하기 위하여 2월9일에 먼저 계주(계<초두머리 아래 魚+선칼도방>州) 동릉(東陵)에 나아가 아뢰었고, 2월16일에는 또 역주(易州) 서릉(西陵)에 행행하여 예를 행하였으며, 그 뒤 황태후를 모시고 산동(山東)을 순행하였는데, 장사(將士)들이 개선할 시기에 맞추어 어가를 돌려 돌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원전의 한자어 표현을 그대로 옮겨다 쓰다시피 한 기존 번역본과 달리 최대한 현대 한국어로 풀어내 훨씬 쉽게 읽힌다.
매끄러워진 번역만큼 눈에 띄는 것은 풍부한 주석이다.
기존 번역본에는 이 기사에 관한 주석이 전혀 없었다. 재번역본에는 본문에 언급되는 금천 정벌이 청(淸) 고종 36년 지금의 쓰촨(四川) 지역인 대금천과 소금천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시작, 그해 끝났다는 사실이 각주로 설명돼 있다. 계주 동릉과 역주 서릉이 어디에 있는 누구의 무덤인지도 각주를 보면 알 수 있다.
아울러 실록 원문 자체에 있을지 모를 오류를 잡아내고자 기사 내용과 관련된 다른 문헌을 비교·대조하는 교감작업을 통해 신뢰도를 높였다. 이 기사 본문에 등장하는 2월16일 정말 청 고종이 서릉을 찾았는지 확인하고자 청나라 정사(正史)인 청사고(淸史稿)까지 살펴보고 해당 내용을 각주로 소개하기도 했다.
정영미 한국고전번역원 조선왕조실록팀장은 “기존 번역본의 주석이 기사와 관련된 고사(故事)나 용어풀이 중심이었다면 재번역본에서는 다양한 문헌자료를 연구해 기사 이해에 도움을 주는 설명을 대폭 추가했다”며 “주석의 절대적 양은 기존 번역본의 6배쯤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록 서문에 해당하는 총서(總序) 재번역에서도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대부분 정조의 이름은 이산(李산<示+示>)으로 알고 있다. 기존 번역본도 그렇게 표기했다. 그런데 재번역에서는 같은 한자임에도 음을 ‘산’이 아닌 ‘성’으로 표기했다.
”대왕은 휘(諱)가 성(<示+示>)이고 자는 형운(亨運)이며, 영종대왕(英宗大王, 영조)의 손자요,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혜빈(惠嬪) 홍씨(洪氏)이다.”
’이산’이라는 표기가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재번역본 각주를 보면 정조의 이름에 나름의 변천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문헌을 통해 밝혀진다.
각주에 따르면 적어도 정조가 즉위할 당시까지 이름은 ‘이산’이었다. 정조실록 즉위년 5월22일자에는 왕의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理山’(이산)이라는 지명을 ‘楚山’(초산)으로, ‘尼山’(이산)을 ‘尼城’(이성)으로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 정조의 이름은 ‘이산’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조 20년(1796년) 반포된 한자 발음사전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에는 해당 글자의 음이 ‘셩’(성)으로 표기되고 ‘어휘’(御諱, 임금의 이름)라는 주석이 달렸다. 정조의 이름이 ‘이성’으로 바뀌어 불렸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를 이어 즉위한 순조가 선왕의 이름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지명인 ‘尼城’(이성)을 ‘魯城’(노성)으로, ‘利城’(이성)을 ‘利原’(이원)으로 고쳤다는 순조실록 기사도 정조의 이름이 ‘이성’이었음을 뒷받침하는 기록으로 소개된다.
이런 설명을 읽고 나면 재번역본에 왜 ‘이산’이 아닌 ‘이성’이 등장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정조의 이름이 명기된 정조실록이 순조 초기 편찬됐고, 당시에는 해당 글자가 ‘성’으로 불린 점을 염두에 둔 결과다.
이밖에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원문을 그대로 옮겼거나 반대로 맥락을 잘못 이해하고서 번역한 부분 등도 바로잡고 주석을 달아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려 했다.
한국고전번역원은 승정원일기, 일성록(日省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등 참고자료가 비교적 풍부한 정조실록의 재번역에 먼저 착수했다. 지금까지 48책 가운데 27책의 번역을 끝낸 상태다. 기존 번역본 전체 분량은 413책에 이른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