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하려면 기생부터
‘이번 생은 감당하기 너무 힘들어’(극단 제12언어 연극 스튜디오·젊은공연예술축제 Y.A.F 제작)는 제목 그대로 귀여운 느낌의 작품이다. ‘조용한 연극’, ‘일상적 연극’을 선보이는 일본 극작가 히라타 오리자의 작품을 번안했다.일본 동북지역 어촌을 배경으로 도쿄와 지방 간 만남을 주선한 원작의 뜻을 살려, 낙동강을 끼고 있는 경남 바닷가의 한 소도시 연구실을 무대로 설정한 뒤 부산 배우 3명을 캐스팅했다. 히라타의 다른 작품에 비해 등장인물 수도 줄고, 소재도 최첨단 과학 대신 기생충이다. 극단에서 이 작품을 ‘별책부록’이라 부르는 이유다.
갯가 출신들의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연상되지만, 주목받는 젊은 연출가 가운데 한명으로 꼽히는 김한내가 선택한 카드는 의외로 ‘여백’이다. 관객에게 들으라고 대놓고 목청 크게 대사를 외쳐대는 게 보통의 연극적 상황이라면, 이 작품은 빤히 서로를 쳐다보면서 말을 할 듯 안 할 듯 삭히고 삭히는 상황을 던진다.
“무심한 듯 흘러가는 간결한 대사들과 그 사이 사이를 채우는 짧은 침묵들에서 관객 개개인이 각자의 주관적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연출 포인트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온 부부 진일(홍우진)과 리은(한선영). 낯선 곳에서 외톨이가 된 리은은 진일의 학교 후배에게 기생충학 강의를 청한다. 그나마 의지할 남편과 뜨악해진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서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 같은 기생충학자가 하는 짓은 하나같이 기괴하다. 기생충에게 애칭 붙여주는 것부터 시작해 기생충을 잘 키우기 위해 제 몸에다 넣어 기르고, 알레르기에 효과가 있다면서 아이에게 기생충을 처방하기도 한다.
작품은 리은이 기생충을 배우는 과정에서 인간 관계에 대한 얘기들을 슬슬 풀어놓는다. 편하게 기생하려면 숙주를 죽음으로까지 몰고가서는 안된다는 역설적 상황이 핵심. 숙주를 위험하게 하는 독한 기생충도 있지만, 그러면 자기들도 죽기 때문에 번성하지 못한다. 여기서 ‘공생하려면 기생하는 법부터 배우라.’거나 ‘아낌없이 빼앗는 것이 오히려 사랑 아닐까.’라는 얘기를 툭툭 던져 놓는다.
때문에 “광절열두조충처럼 5m가 넘는 기생충이 우리 몸 안에 있어도 별다른 증상이 없는 건, 그네들이 그만큼 평화 지향적이라는 걸 말해 준다.”고 익살떨던 기생충학자 서민(단국대 의대 교수)이 떠오른다. 리은에게 기생충학을 강의하는 석사 1년차 문채욱(조재호)이 극에 활력을 불어넣어줘 조용한 연극임에도 유쾌발랄한 면모까지 갖췄다. 10일까지 서울 대학로 정보소극장. 전석 2만원. (02)742-6050.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2010-10-04 20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