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철의 영화 만화경] ‘옥희의 영화’

[이용철의 영화 만화경] ‘옥희의 영화’

입력 2010-09-28 00:00
수정 2010-09-28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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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 벗어버린 홍상수 가을영화

올 봄, 홍상수의 영화가 우리를 찾아왔었다. 그가 2010년에 내놓은 첫 번째 영화 ‘하하하’는 여름을 거닐고 있었다. 올 가을, 홍상수의 영화가 우리를 또 찾아왔다. 그가 2010년에 두 번째로 내놓은 영화 ‘옥희의 영화’는 겨울에 벌어진 이야기를 모았다. 두 편의 영화는 다가올 계절과 마주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메커니즘상 미래를 포착할 수 없고 오로지 과거를 주워 담을 뿐이다. 영화의 한계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옥희의 영화’에서 현재와 미래만큼 과거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옥희의 영화’는 다가올 계절이 아닌, 지나간 시간에 관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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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희의 영화’는 공간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임의로 공간을 선택하고 이동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이 스쳐 지나가는 공간은 반복되기 마련이다. 학생에겐 학교가 그렇고, 직장인에겐 직장이 그러하며, 심지어 휴식을 취할 때조차 대개 같은 공간을 다시 방문하곤 한다. 하지만 매번 동일한 공간을 차지한다고 해서 존재마저 동질성을 띤다고 볼 수는 없다. 몇 년 전 그곳을 찾았던 나와 오늘 그곳을 찾은 나 사이에는 ‘변화’가 축적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느 날 문득, 한 사람은 한 공간을 차지했던 과거의 그와 오늘의 그를 자연스레 비교하게 된다.

‘옥희의 영화’는 네 개의 에피소드로 연결된 작품이다. 세 인물이 거듭 나오지만, 그리고 그들이 같은 이름을 지니고 있지만, 한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이 에피소드마다 동일한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눈여겨 볼 점은, 동일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다른 인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일례로 주인공 중 한 명인 진구(사진 오른쪽·이선균)의 경우, 학창 시절의 그와 영화감독인 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확연하지는 않으나) 어딘가 바뀐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건 다른 주인공인 옥희(왼쪽·정유미)와 송 교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간혹 생각한다. ‘왜 이렇게 변해버린 것일까.’ 라고. ‘옥희의 영화’도 그런 식이다. 송 교수의 비리 소문을 들은 진구는 진실을 알려고 하는데, 영화는 한 에피소드를 건너 강사 시절의 송 교수 모습을 슬쩍 드러낸다. 송 교수 앞에서 진구를 만나지 않겠다던 옥희와 1년 후 진구와 만나는 옥희를 나란히 보여준다. 홍상수는 일회적이고 반복될 수 없는 시간을 흔들어 재배열한 뒤, 한 공간으로 각각의 존재들을 불러 모은다. 시간의 지속과 변화의 추이를 직관적으로 분석하는 게 비록 힘들더라도, 홍상수는 한 공간의 두 존재가 변화 혹은 차이를 인식하기를 원한다. 슬퍼하고 놀라고 무덤덤한 자신을 발견하길 바란다.

그래서인지 ‘옥희의 영화’의 인물들은 한결 성숙한 모습이다. 욕망에 충실하던, 가지가지 이유 만들기에 급급하던 홍상수의 남자들이 여자를 배려하기 시작한다. 나이 든 남자는 윽박지르는 대신 “공정하고 싶다.”며 하소연하고, 젊은 남자는 몸을 들이미는 대신 추운 겨울밤 내내 문 앞에 앉아 있을 줄 안다. 삶의 비밀을 아는 양 함부로 굴던 여자도 여기엔 없다. ‘옥희의 영화’는 어느 추운 겨울의 조금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다. 그 슬픔은 울음을 요구하는 유의 것이라기보다 통과제의의 알싸함에 가깝다. 홍상수의 영화는 바야흐로 청년기를 지났다.

영화평론가
2010-09-28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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