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인인인’ 연극시리즈 중 ‘인어도시’
“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사니까. 처음에는 실제로, 그 다음에는 회고담으로. 처음에는 어설프게, 그 다음에는 논리적으로. 우리가 아는 누군가의 삶이란 모두 이 두 번째 회고담이다. 삶이란 우리가 살았던 게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며, 그 기억이란 다시 잘 설명하기 위한 기억이다.” (김연수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가운데)극 막바지에 먼저 세상을 뜬 시인 이씨가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이들에게 “선과 악, 좋고 싫은 것, 잘하고 못한 거, 그런 것들 다 무시하고, 그대로를, 온전한 나를 인정해. 헛된 바람 다 버리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라는 헛웃음을 보내는 이유다. 하기사, 이유 없이 태어난 주제에, 죽을 때 가서야 꼭 논리적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심보 자체가 고약할는지 모른다. 마지막에 등장인물들이 자기가 죽어야 할 이유를 국민교육헌장 읊듯 읊어대는 것은 논리적 수긍이라기보다 결심 선 자들의 자기최면이다.
극은 기묘한 환상극이다. 휴대전화도 잘 안 터지는 외딴 곳에 수용된 5명의 병자가 연못에 산다는 아귀, 그러니까 배고파 죽은 귀신이 자기들을 잡아먹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쓸리면서 연극은 시작된다. 추적추적 비는 내리고 못은 넘칠지도 모르는데 무대 왼쪽 화면으로는 기괴한 영상이 나타나고 미쳐가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한다. 끝에 가서 무대 자체가 한 척의 배로 변하기도 한다. 20여명의 호스피스들과 대면 인터뷰를 통해 튼실한 기초자료를 모아서인지 극본 자체도 촘촘하니 완성도가 높아 뵌다.
그럼에도 극의 파괴력이 생각만큼 크진 않다. 처음부터 아귀의 공포를 던져 놓고 시작했기 때문에 중간에는 각자가 이야기 보따리를 풀면서 인물들의 감정선이 출렁이기 시작해야 하는데, 이게 인어의 기나긴 대사 ‘한 방’으로 처리된다. 때문에 이런저런 연극적 설정이 때론 작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고선웅 연출의 트레이드 마크가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대사라지만, 최소한 톤이나 완급조절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2010-06-21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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