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지나도 변치않는 존재의 본질

세월 지나도 변치않는 존재의 본질

입력 2010-01-09 00:00
수정 2010-01-09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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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신작 장편소설 ‘내가 없는 세월’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구절은 인기 있는 경구다. 하지만 자기 생각대로 인생을 모두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 없이 살아도 세월은 흘러가고 대부분 사람들은 거대한 세월의 흐름에 휩쓸려 산다.

 소설가 박진규의 신작 장편소설 ‘내가 없는 세월’(문학동네 펴냄)은 이러한 세월과 그 흐름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등단작이자 제1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수상한 식모들’에서 역사에 대한 전복(顚覆)적 상상력을 보여줬던 그는 2년 만에 내놓은 이 두 번째 장편소설에서 “세월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작가는 벌써 제목에서 세월의 주인은 ‘나’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은 한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다. 그럼 세월의 원동력은 대체 뭘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소설에는 다섯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열살배기 꼬마 미령과 그의 배다른 언니 신혜, 계모 명옥, 노망든 고모 바구미 여사, 가정부 근자는 서울 세곡동에 있는 일명 ‘라일락나무집’에서 함께 생활한다.

 이야기는 생모의 자살로 의탁할 곳이 없어진 미령이 아빠 최씨의 집으로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새 엄마는 미령은 물론 친딸에게도 별 관심이 없고 주식투자에 빠져 있다. 천재적 두뇌를 가진 신혜는 독특한 정신세계로 가족들과 대화가 없다. 이곳에서 미령의 임무는 노망한 고모 ‘바구미 여사’를 돌보는 것. 쌀벌레처럼 쌀을 끌어안고 사는 고모의 수발을 들며 미령은 커나간다.

 세월에 대한 질문을 던진 만큼 이야기는 시대의 흐름을 충실히 따른다. 1988년 시작한 이야기는 2023년까지 이어지며, 이 식구들의 일대기에 역사적 사건들을 능숙하게 섞어 넣는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1992년 휴거, 또 세기말과 2002년 월드컵, 2012년 대지진 등 역사의 결절점을 지나가는 동안 바구미 여사는 심장마비로 죽고 열살배기 미령도 마흔이 넘는 아줌마가 되는 등 여러 변화를 맞는다.

 여기서 소설은 손쉬운 테크닉을 통해 세월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불변의 사실 하나를 전한다. 바로 인간은 세월이 어떻든 ‘쌀을 씻어야 한다.’는 서글픈 사실. 작가는 ‘쌀을 씻는 동안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종말의 해에 이르렀지만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쌀을 씻는 동안 축제의 열기에 휩싸인 도시는 초여름 날씨보다 후끈하게 달아올랐다.’처럼 쌀을 씻는 장면으로 매 회를 시작한다.

 이를 통해 세월은 무한한 변화를 낳지만 결국 먹고 살아야만 한다는 인간 존재의 가장 낮은 본질을 바꿀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박진규는 “혐오와 선망이 하나의 몸으로 살아 숨 쉬는 공간인 서울을 배경으로 삶과 욕망과 잉여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2010-01-09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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