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인사이트] ‘노딜 브렉시트’로 가는 英… 경제 후퇴·영국연합 붕괴로 이어지나

[글로벌 인사이트] ‘노딜 브렉시트’로 가는 英… 경제 후퇴·영국연합 붕괴로 이어지나

최훈진 기자
입력 2019-08-05 17:50
수정 2019-08-06 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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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야망’ 선택한 존슨 신임 총리… 영국의 미래 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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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존슨 영국 신임 총리. AP 연합뉴스
보리스 존슨 영국 신임 총리.
AP 연합뉴스
“학교들이 줄줄이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 식자재가 바닥 나 급식 대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영국 주간지 옵저버가 입수해 보도한 ‘노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의 위험 분석’ 보고서에 담긴 내용이다. 영국 교육부는 지난달 24일 취임한 보리스 존슨 총리가 예고한 대로 오는 10월 31일 ‘노딜(아무런 협의 없는) 브렉시트’가 현실화될 경우 일어날 사태를 대외비 문건으로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루 아침에 EU 회원국에서 들여오던 식자재에 관세가 부과돼 값이 20%까지 치솟을 경우 예상되는 시나리오다. 가디언은 지난 3일(현지시간) 이 보고서에 대해 “‘노딜 브렉시트’가 야기할 혼란을 우려하는 정부의 인식을 보여준다”면서 “일반 대중에게 닥칠 위험은 훨씬 더 심각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영국은 2016년 6월 국민투표로 EU를 탈퇴하기로 정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록 이를 완수하지 못해 정치권의 분열만 키웠다. 테리사 메이 전임 총리는 지난해 11월 도출한 브렉시트 합의안이 의회를 통과하지 못해 브렉시트를 두 차례나 연기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지난달 결국 물러났다.

●EU 탈퇴 지지 진영서 좌장 역할… 정치 승부수

최근 보수당 대표 경선을 거쳐 새 총리가 된 존슨은 ‘정치적 야망’을 위해 브렉시트 지지를 선택한 인물이다. 브렉시트를 결정하는 국민투표를 앞둔 당시에도 EU 탈퇴와 잔류를 지지하는 칼럼을 각각 써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EU 탈퇴 지지로 마음을 굳힌 그는 결국 브렉시트 지지 진영의 좌장 역할을 맡아 이끌었으며, 이번 당대표 경선 캠페인을 시작하면서도 “(브렉시트) 연기는 코빈(노동당 대표가 정권을 잡는 것)을 의미한다. 연기하면 우리 모두 죽게 될 것”이라며 브렉시트 완수에 정치적 사활을 내걸었다. 존슨이 총리직에 오름과 동시에 영국 안팎에서 ‘노딜 브렉시트’ 공포가 치솟은 것은 이 때문이다.

노딜 브렉시트는 쉽게 말해 ‘협의 없는 이혼’이다. 영국이 EU를 탈퇴함으로써 관세 부과와 국경 검문은 부활하지만, 아무런 규정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력과 물자의 이동이 이뤄져야 해 대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영국 본토 서쪽에 있는 아일랜드섬 내 아일랜드와 영국령인 북아일랜드 국경에서 ‘하드 보더’(엄격한 통행·통관 절차)가 부활하면 1998년 가까스로 봉합된 유혈 충돌의 역사가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아일랜드는 1949년 영연방에서 독립했다. 아일랜드계 구교도(가톨릭)보다 영국계 신교도가 많은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남았는데, 영국이 소수 가톨릭계 주민에 대해 차별적 정책을 취하면서 신·구교도 간 갈등으로 반세기 가까이 피의 역사로 얼룩졌다.

●아일랜드·북아일랜드 ‘유럽의 화약고’ 될 우려

1998년 영국과 아일랜드는 벨파스트 협정을 맺어 유혈 분쟁을 종식했다. 양국 간 자유로운 통행·통관을 보장하는 대신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 영유권을 포기하는 것이 이 협정의 핵심이다. 이로 인해 현재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에는 지도상의 경계선만 있을 뿐 사실상 국경이 없어 인적·물적 이동에 아무런 제약 없다.

노딜 브렉시트로 갑작스럽게 다시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간 국경선이 그어질 경우 아일랜드는 다시 ‘유럽의 화약고’가 될 수 있다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존슨 총리는 취임 일주일 만인 지난달 30일 아일랜드 총리와 전화통화를 갖고 어떤 경우에도 양국 국경에서 물리적인 검문·검색을 실시하지 않겠다면서도 “안전장치는 폐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메이 전 총리가 EU와 도출한 합의안에 담긴 ‘백스톱’(안전장치·영국의 EU 관세동맹 잔류) 조항이다. EU 탈퇴를 원하는 영국인, 특히 보수당 내 브렉시트 강경파와 야당인 노동당은 메이 전 총리의 합의안에 안전장치 유지 기한이나 폐기 조건 등을 명시되지 않아 이 조항이 영국의 발목을 영원히 잡을 수 있다며 강하게 반발해 왔다. 존슨 총리는 보수당 대표 경선 과정에서 이미 ‘백스톱 폐기’를 선언해 왔으며 취임 후에도 이를 재확인했다. EU는 백스톱 조항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이어서 ‘노딜 브렉시트’ 가능성은 증폭됐다.

실제 존슨 내각은 노딜 사태를 대비해 대규모 예산 확보에 나섰다. 재정을 풀어 브렉시트에 따른 충격을 흡수하겠다는 심산이다. 사지드 자비드 영국 신임 재무장관은 지난달 31일 성명을 통해 92일밖에 남지 않은 브렉시트를 앞두고 21억 파운드(약 3조 530억원) 규모의 예비 자금을 준비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브렉시트를 위한 총예산은 63억 파운드로 늘었다.

노딜 브렉시트는 영국과 EU 경제에 모두 엄청난 충격을 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영국 예산책임처(OBR)는 지난달 18일 펴낸 보고서에서 노딜 브렉시트를 할 경우 2020년 말까지 경제 규모는 기존보다 2% 축소되면서 침체에 빠질 것으로 전망했다. 영국뿐 아니라 네덜란드와 벨기에, 아일랜드 등 국가의 국내총생산(GDP)은 각각 4%, 3.5%, 8% 감소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노딜 브렉시트 이후 비상체제를 이끌어갈 ‘전시 내각’도 만들어졌다. 존슨 총리를 필두로 마이클 고브 영국 정부 국무조정실장, 자비드 재무장관, 도미닉 라브 외무장관, 스티브 바클레이 브렉시트부 장관, 제프리 콕스 검찰총장 6명으로 꾸려졌다. EU와의 추가적 합의 없이 브렉시트를 맞게 될 경우를 전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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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드화 5월 이후 주요 통화 대비 6~9% 하락

영국 중앙은행인 영국은행(BOE)은 지난 1일 올해와 내년 영국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의 1.5%, 1.7%에서 1.3%로 동일하게 하향 조정했다. 노딜 브렉시트 시에는 추가 성장률 하락, 물가 상승, 파운드화 가치 절하 등이 발생할 것이라고 분석하면서 향후 통화정책은 상황을 지켜보며 탄력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파운드화 가치는 이미 존슨 총리의 취임과 동시에 2017년 3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급락했다. 지난달 29일 외환시장에서 파운드당 달러 환율은 1.22달러까지 밀렸다. BBC는 “다른 주요 통화 대비 파운드화 가치가 지난 5월 이후 6~9% 하락했는데, 이는 1985년 플라자합의와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라며 “화폐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이나 관광업에는 도움이 되지만 소비자물가가 올라 외국에서 부품을 수입하는 제조업체에는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했다. CNN도 “파운드 급락이 투자 감소와 자본 이탈로 이어지면 설령 노딜 브렉시트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영국 경제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전했다.

영국을 구성하는 4개국의 움직임도 심상찮다. 북아일랜드 민족주의 정당인 신페인당 메리 루 맥도널드 대표는 지난달 31일 북아일랜드를 방문한 존슨 총리에게 “영국과 EU 사이의 합의 없는 ‘하드 브렉시트’가 일어나면 북아일랜드가 영국연합(잉글랜드·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웨일스)에서 탈퇴하기 위한 국민투표 방안을 추진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스코틀랜드는 존슨 총리의 브렉시트 강행 움직임에 반대하며 영국연합에서 분리독립하기 위한 작업에 재돌입하겠다는 입장이다. 스코틀랜드는 2014년 분리독립 주민투표를 실시했지만 근소한 차이로 부결된 바 있다.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는 “존슨은 영국의 55대 총리가 아니라 잉글랜드의 ‘초대 총리’로 기억될 수도 있다”며 불안한 동거를 이어온 영국연합이 노딜 브렉시트로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럼에도 존슨 총리는 메이 전 총리를 반면교사 삼아 노딜 브렉시트를 불사하려 한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메이 전 총리가 도출한 EU와의 합의안은 ‘하드 브렉시트’와 ‘소프트 브렉시트’ 지지자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의회 승인을 얻는 데 끝내 실패했다. 일간 텔레그래프는 여론조사 업체 콤레스가 지난달 26일부터 사흘 동안 성인 2400명을 대상으로 차기 총선 정당 지지도를 조사한 결과 노딜 브렉시트 후 총선을 치르는 경우에만 보수당이 과반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란 예측이 나왔다고 보도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2019-08-06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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