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바라보면 매우 높고 험준하며, 바싹 다가서면 산세가 겹쳐 있는 것이 보인다. 앞의 작은 봉우리 하나는 가운데가 굴같이 비어 있고 양쪽 사이가 벌어져 있는데, 그곳에 배를 감출 수 있을 정도다. 옛날에는 이곳이 사신의 배가 묵는 곳이었다. 관사도 아직 남아 있다. 그런데 이번 길에는 여기서 정박하지 않았다.’
중국 북송의 문신 서긍(1091~1153)이 묘사한 흑산도의 모습이다. 그는 1123년 고려에 국신사(國信使)로 와서 한 달 동안 개성에 머물렀다. 사절단은 5월 16일 중국 명주를 떠난 뒤 6월 12일 고려의 수도 개경에 들어와 7월 13일 다시 배에 올랐는데, 일기가 순조롭지 못해 42일이 지난 다음에야 명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고려와 북송의 외교와 교역은 애초 산둥반도와 대동강이나 예성강을 잇는 북로(北路)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거란이 중국 북방을 휩쓸자 고려와 북송은 문종 28년(1074) 남쪽의 명주에서 서해를 건너 흑산도~군산도~마도~자연도~예성항을 잇는 남로(南路)를 이용하기로 합의하게 된다. 군산도는 군산 앞바다의 선유도, 자연도는 인천 영종도를 가리킨다.
서긍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라는 40권의 사행 보고서를 남겼다. 바로 ‘고려도경’이다. 고려의 문물을 폭넓게 소개했는데, 오가는 길에 마주친 서민 생활까지 자세히 관찰해 기록했다. 특히 제34권부터 제39권까지는 바닷길(海道)이라는 제목으로 항해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집중적으로 적어 놓았다.
서긍 일행에 대한 고려의 공식적인 환영 절차는 군산도의 군산정에서 6월 6일 시작됐다. ‘군산정 문밖에 관아 건물이 10채 남짓 늘어서 있고, 깃발을 들고 환영하는 사람도 100명 남짓’이라고 했으니 영빈관의 규모도 상당하고 손님 접대도 융숭했을 것이다. 7일에는 태안 마도 안흥정, 9일에는 자연도 경원정에 올라 사흘 동안 휴식하고 왕도(王都)에서 30리 떨어진 예성강 기슭 벽란정에 도착한다.
서긍은 흑산도에 대해 ‘이번 길에는 정박하지 않았다’고 했다. 접빈 기능이 잠시 중단됐을 수도 있고, 항해가 순조로워 굳이 묵어 갈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다. 서긍은 ‘사신의 배가 이르면 밤에 산마루에서 봉화를 밝히고 여러 산이 차례로 호응해 왕성으로 소식을 전한다’고 했다. 외교적 효용이 이런 정도였으니 국방에서도 흑산도의 중요성은 여전했을 것이다.
지난해부터 흑산도 진리의 무심사 터에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고려시대 전성기를 누린 무심사 옛터에서는 청자상감향로를 비롯해 절해고도에는 있을 것 같지 않은 수준 높은 유물들이 나왔다. 절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서긍이 언급한 관사(館舍)로 추정되는 건물군(群)도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 기회에 통일신라 이후 동북아 외교 및 교역의 ‘허브’ 흑산도의 역사가 제대로 드러났으면 좋겠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고려와 북송의 외교와 교역은 애초 산둥반도와 대동강이나 예성강을 잇는 북로(北路)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거란이 중국 북방을 휩쓸자 고려와 북송은 문종 28년(1074) 남쪽의 명주에서 서해를 건너 흑산도~군산도~마도~자연도~예성항을 잇는 남로(南路)를 이용하기로 합의하게 된다. 군산도는 군산 앞바다의 선유도, 자연도는 인천 영종도를 가리킨다.
서긍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라는 40권의 사행 보고서를 남겼다. 바로 ‘고려도경’이다. 고려의 문물을 폭넓게 소개했는데, 오가는 길에 마주친 서민 생활까지 자세히 관찰해 기록했다. 특히 제34권부터 제39권까지는 바닷길(海道)이라는 제목으로 항해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집중적으로 적어 놓았다.
서긍 일행에 대한 고려의 공식적인 환영 절차는 군산도의 군산정에서 6월 6일 시작됐다. ‘군산정 문밖에 관아 건물이 10채 남짓 늘어서 있고, 깃발을 들고 환영하는 사람도 100명 남짓’이라고 했으니 영빈관의 규모도 상당하고 손님 접대도 융숭했을 것이다. 7일에는 태안 마도 안흥정, 9일에는 자연도 경원정에 올라 사흘 동안 휴식하고 왕도(王都)에서 30리 떨어진 예성강 기슭 벽란정에 도착한다.
서긍은 흑산도에 대해 ‘이번 길에는 정박하지 않았다’고 했다. 접빈 기능이 잠시 중단됐을 수도 있고, 항해가 순조로워 굳이 묵어 갈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다. 서긍은 ‘사신의 배가 이르면 밤에 산마루에서 봉화를 밝히고 여러 산이 차례로 호응해 왕성으로 소식을 전한다’고 했다. 외교적 효용이 이런 정도였으니 국방에서도 흑산도의 중요성은 여전했을 것이다.
지난해부터 흑산도 진리의 무심사 터에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고려시대 전성기를 누린 무심사 옛터에서는 청자상감향로를 비롯해 절해고도에는 있을 것 같지 않은 수준 높은 유물들이 나왔다. 절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서긍이 언급한 관사(館舍)로 추정되는 건물군(群)도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 기회에 통일신라 이후 동북아 외교 및 교역의 ‘허브’ 흑산도의 역사가 제대로 드러났으면 좋겠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2016-07-21 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