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안락사 여행/박홍환 논설위원

[씨줄날줄] 안락사 여행/박홍환 논설위원

박홍환 기자
입력 2015-08-18 18:10
수정 2015-08-18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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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회의가 많았던 20대 여성 D씨는 최근 스위스 취리히를 다녀왔다. 안락사 지원 전문병원 디그니타스를 방문하기 위해서다. 홈페이지에 적혀 있는 전화로 메시지를 남기고 편지까지 보냈지만 답장이 오지 않아 직접 가볼 결심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의사의 확인서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D씨는 다행스럽게도 죽음에 이르지 못했지만 죽을 권리가 허용되지 않는 고국을 떠나 스위스의 디그니타스에서 생을 마친 사람들이 지난 17년간 1749명에 이른다고 한다. 독일인이 920명으로 가장 많고, 영국인 273명, 프랑스인 194명, 이탈리아인 79명 등이다. 죽기 위해 생의 마지막 여행에 나선 이른바 ‘안락사 여행자’다. 디그니타스는 스위스에 있는 4곳의 안락사 지원 병원 중 유일하게 외국인을 받아들이고 있다.

1998년 5월 17일 인권변호사인 루드비히 미넬리가 말기암 등 불치병 환자가 생을 존엄하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설립한 디그니타스 병원에서는 의사가 처방해 준 수면제와 극약을 먹고 ‘깊은 잠’을 자는 것처럼 죽을 수 있다. 환자 스스로 약을 먹는다는 점에서 의사가 직접 약물을 투여해 사망케 하는 적극적 안락사나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소극적 안락사, 이른바 존엄사와는 구별된다. 병원도 ‘자살 조력’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라틴어로 ‘존엄’을 뜻하는 디그니타스는 같은 이름의 비영리단체도 운영하고 있는데 현재 전 세계 수천 명의 회원이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회원이 되려면 치료가 불가능한 병을 앓고 있다는 의사의 확인을 받고, 스스로 죽음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입회비로 208유로(약 27만원), 연회비로 84유로를 받는다. 폐암 판정을 받은 영국인 남성 밥 콜(68)이 최근 이 병원에서 숨을 거두며 “조력사망법이 통과되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밝혀 전 세계적으로 안락사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현재 스위스를 비롯해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이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다. 미국은 오리건·워싱턴 등 5개 주에서 안락사를 인정하고 있으며 프랑스도 지난 3월 이른바 ‘깊은 잠’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다. 각국의 안락사 허용 대상과 방식은 각각 다르지만 죽을 권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적극적 안락사는 거론조차 안 되지만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존엄사는 일부 인정되고 있다. 의사 출신인 새누리당 신상진 의원은 아예 존엄사를 제도화하자며 18대 국회 때 자동 폐기된 ‘존엄사법’을 최근 또다시 발의했다.

각자 다양한 명목의 여행에 나서지만 ‘안락사 여행’ ‘자살 여행’은 비극적이다. 죽을 권리를 넘어 인간의 기본권이 어디까지 확장될지 궁금해진다.

박홍환 논설위원 stinger@seoul.co.kr
2015-08-19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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