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기쁨을 아는 몸’/문소영 논설위원

[씨줄날줄] ‘기쁨을 아는 몸’/문소영 논설위원

입력 2015-06-22 23:36
수정 2015-06-23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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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다 건강한 양심의 주인은 아니었다. 그들의 베끼기는 격렬하였다. (중략) 첫 표절을 하고 두 달 남짓 뒤, 여자는 벌써 표절의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여자의 변화를 기뻐한 건 물론 출판사였다.’

‘기쁨을 아는 몸’이라는 구절을 넣은 다양한 패러디가 양산되고 있다. 메르스 확산과 관련해 “정부는 이미 이윤의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정부의 변화를 가장 기뻐한 것은 물론 삼성서울병원이었다” 등등. 올 상반기 ‘말말말’을 뽑는다면 단연 “아~ 몰라”라는 의미의 ‘아몰랑’이란 신조어와 함께 ‘기쁨을 아는 몸’이 선정될 것이다. 지난해의 말말말 중에는 ‘마리 안통하네트’가 있었다.

‘기쁨을 아는 몸’이란 표현은 소설가 신경숙이 ‘전설’에서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일본 탐미주의 작가이자 극우 인사인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의 우리말 번역본에 나온다. 표절 의혹을 제기한 소설가 이응준에 따르면 일본어 원문은 ‘기쁨을 알았다’는 평이한 서술이다. 그런데 시인 김후란이 1983년 번역을 맡으면서 그 표현에 시인의 감각을 첨가해 착 달라붙는 표현을 만들었다고 했다. 늘 쓰는 표현 같아도 이렇게 출처들이 있다.

‘전설’이 ‘우국’을 표절했다는 의혹에 대해 창비가 “일부 문장들이 표절 혐의가 충분히 제기될 법하다”며 미꾸라지 빠져가는 식으로 답변하거나, 문단의 원로들이 ‘문제 삼지 말자’며 옹호하거나, 문학적·학문적으로 표절 여부를 전문가가 진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목에 코웃음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최소한 ‘기쁨을 아는 몸’이 들어 있는 그 단락만큼은 명백한 표절로 보이는 탓이다. 밋밋하고 재미없는 문장을 쓰는 학계에서도 6개 단어를 연속으로 인용 부호나 출처 없이 가져오면 표절인데, 하물며 예술을 창조하는 소설가가 문단 전체를 들고 오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번 표절이 곤란한 이유 중 하나는 남성 작가의 성적 판타지를 여성 작가가 자각 없이 고스란히 옮겨 왔다는 것이다. ‘우국’에서 젊은 남녀가 쾌락을 알아 가는 시간의 흐름을 서술한 “첫날밤을 지낸 지 한 달이 넘었을까 말까 할 때 벌써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라는 대목은 전형적인 남성들의 판타지라는 지적이다. 남성의 시각에서 한 달이면 길고 충분한 기다림이겠으나 여성의 시각이라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여성 작가가 젊은 남녀 한 쌍의 육체적 사랑을 그렸더라면 다른 전개와 표현이 불가피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신경숙도 한 달은 너무 심하다고 판단했는지 ‘전설’에서는 ‘두 달 남짓’으로 변형하긴 했다. 표절은 그 형식에서 표현을 베끼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한 작가의 세계관과 철학 등 내면을 마치 자기껏인 양 고스란히 이식한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매번 이식된 세계관과 철학으로 쏟아내는 문학이 일류가 될 수 있겠나. 잘해 봤자 삼류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2015-06-23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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