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사스(SARS)의 교훈/오일만 논설위원

[씨줄날줄] 사스(SARS)의 교훈/오일만 논설위원

오일만 기자
오일만 기자
입력 2015-06-02 23:38
수정 2015-06-03 01:23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14
13년 전인 2003년 2월 베이징 특파원 시절에 중국 광저우에서 목격한 일이다. 길거리마다 사람들이 뭔가 불안한 기색으로 식초를 뿌리거나 태우는 행동이 자주 눈에 띄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지금 큰 감기가 돌고 있다. 식초가 특효약이란 소문을 듣고 따라 하는 중”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들이 말한 큰 감기는 후에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로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실체를 몰라 ‘괴질’로 불렸다.

이 괴질은 불과 한 달 후에 수도 베이징으로 옮겨 와 최악의 상황으로 변했다. 보건 당국이 사실을 축소, 은폐하면서 초기 방역의 ‘골든타임’을 놓친 것이 주요 이유다. 사망자가 속출하는 시점에도 중국 당국은 “베이징은 안전하며 사스는 곧 억제될 것”이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진실은 밝혀지는 법. 사스의 실체가 속속 드러나면서 외국인들과 그 가족들의 베이징 ‘탈출 러시’가 이어졌고 중국 당국은 수도를 봉쇄하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사람들이 모이는 극장이나 백화점, 목욕탕은 물론 술집도 모두 폐쇄됐다. 베이징은 활기를 잃은 채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다.

막 출범한 4세대 지도부,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는 정권 자체의 위기를 맞아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영웅 장옌융(蔣彦永)이 등장한다. 인민해방군 301병원에 의사로 재직 중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사망자를 목격한 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중국 당국의 사스 은폐 사실을 폭로했다. 중국 당국이 비밀주의를 버리고 ‘사스와의 공개 전쟁’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됐다.

의사 장옌융의 의지를 실현한 인물은 왕치산 현 상무위원이다. 중국 지도부는 당시 금융위기를 처리해 ‘소방대장’으로 불린 왕치산 하이난성 당서기를 그해 4월 22일 베이징시 시장대리로 전격 임명한다. 그는 취임 직후 전체 회의를 소집한 뒤 “1은 1이고 2는 2다. 누구도 거짓 정보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엄명한다. 정부는 이날부터 매일 감염자와 사망자 수를 낱낱이 공개했다. 3개월 후인 6월 24일 세계보건기구(WHO)는 베이징 지역에 내린 ‘사스 경보’를 취소했다. 사스와의 전쟁에서 최종 승리가 확인된 순간이다. 전체 사망자(775명)의 84%(648명)를 차지했던 중국은 경제적 손실만 2100억 위안(약 37조원)에 달할 정도로 직격탄을 맞았다. 그야말로 국가적 재난이었다.

‘중동판 사스’로 불리는 메르스 사태에 직면해 우리 보건 당국은 사스 초기 중국 관료들의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미숙한 초기 대응 등 후진적 방역체계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고위험 의심 환자를 ‘사스 트라우마’가 심한 중국으로 출국시켜 국제적 ‘민폐국’이란 오명도 뒤집어썼다. 2009년 신종플루 창궐 당시 질타를 받았던 방역 시스템에 다시 구멍이 뚫린 것이다. 반성없는, 안일한 대응이 빚은 전형적 인재(人災)로 보는 이유다.

오일만 논설위원 oilman@seoul.co.kr
2015-06-03 31면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전북특별자치도 2036년 하계올림픽 유치 가능할까?
전북도가 2036년 하계올림픽 유치 도전을 공식화했습니다. 전북도는 오래전부터 유치를 준비해 왔다며 자신감을 보였지만 지난해 ‘세계잼버리’ 부실운영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은 상황이라 유치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습니다. 전북도의 올림픽 유치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가능하다
불가능하다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