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빛바랜 ‘아메리칸 드림’/구본영 이사대우 논설위원

[씨줄날줄] 빛바랜 ‘아메리칸 드림’/구본영 이사대우 논설위원

입력 2014-10-21 00:00
수정 2014-10-21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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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윌리는 60세가 넘은 세일즈맨으로 아직도 월부 부금에 쫓기면서도 시대의 패배자라는 걸 깨닫지 못한다. 그런데도 전직하려다 외려 해고를 당하고 아들에게 걸었던 꿈도 깨어지자 가족들이 생명 보험금을 타도록 하려고 자동차 폭주로 죽음을 맞이한다.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의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의 줄거리다. 대공황기인 1930년대 뉴욕의 평범한 세일즈맨의 좌절을 형상화했다.

밀러의 이 작품은 더스틴 호프만 주연으로 영화화도 됐었다. 그러나 초연 이후 연극의 메카인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무려 800회 넘게 공연되고 있는 드라마로 더 유명하다. 이 작품이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끊임없이 무대에 올려지고 있는 까닭이 뭘까. 지구촌의 갑남을녀 누구에게나 주인공의 이룰 수 없는 욕망과 참담한 좌절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게다. 돈도 권력도 없는 미국 시민들이 ‘아메리칸 드림’의 붕괴를 보여주는 이 드라마에 눈물을 흘리듯이….

재닛 옐런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며칠 전 미국의 경제적 불평등 심화를 경고하고 나섰다. 즉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100년 만에 최고 수준에 근접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저소득층이 ‘소득 사다리’를 타고 상위 계층으로 올라가는 게 더욱 어려워졌다”면서 “이런 경향이 미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중시했던 기회균등이라는 가치에 부합하느냐”고 반문했다. 이대로는 미국이 아메리칸 드림을 일굴 ‘기회의 땅’이 될 수 없다는 경고다.

1990년대 미국 동부에서 연수 시절 놀란 적이 있다. 세들어 살던 아파트 뜰에 오이씨를 뿌렸더니 어른 팔뚝만 한 오이가 주렁주렁 열리는 걸 보면서다. 그 광활한 대지의 비옥함이 한없이 부러웠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인의 삶의 질도 옛날 같진 않은 모양이다. 워싱턴포스트도 소득 불평등을 알리는 지표인 세후 지니계수가 0.434로 미 인구통계국이 가계소득 조사를 시작한 1967년 이후 가장 높다고 보도했다. 옐런의 이례적 경고가 엄살이 아님을 말해준다.

물론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가 곧 저물 것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성급하다는 분석도 있다. 셰일가스 채굴 기술의 진보로 미국이 조만간 세계 최대 산유국이 될 텐데 무슨 걱정이냐는 낙관론도 없진 않다. 특히 각종 혁신을 선도할 전 세계의 고급 인력은 여전히 미국으로 몰려들고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더 걱정이다. 지난 5월 기준으로 올해 우리나라의 두뇌유출지수가 46위로 지난해에 비해 9계단이 하락했단다. 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소득 양극화도 심화되고 있다면 뭔가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할 시점이다.

구본영 이사대우 논설위원 kby7@seoul.co.kr
2014-10-21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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