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조림가와 육림가/정기홍 논설위원

[씨줄날줄] 조림가와 육림가/정기홍 논설위원

입력 2014-04-08 00:00
수정 2014-04-08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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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조림가(造林家)는 신라시대 학자인 최치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경남 함양군의 태수로 있을 때 고을에 흐르는 뇌계(지금의 위천)가 범람하자 쌓은 둑에다 활엽수를 심었다고 한다. 지금의 상림(上林)이다. 12㏊ 규모의 숲에는 100여종의 활엽수가 숲을 이룬다. 상림은 1961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그로부터 1000여년, 최치원의 조림사업이 무색할 만큼 우리의 산야는 질곡의 역사를 써왔다. 울창하던 산림은 일제의 산림 수탈과 한국전쟁 등으로 민둥산으로 변하고 말았다. 얼마나 산이 헐벗었으면 조선 땅을 ‘흰옷’과 ‘붉은산’으로 빗대 표현했을까.

산림녹화가 국가사업으로 시작된 것은 1973년이었다. 1, 2차에 걸친 20년간의 치산녹화사업에서 200만㏊의 산에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1차 사업 때는 어린 묘목을 심었고, 2차 때는 비료를 주고 간벌을 하는 등 가꾸었다. 민둥산에 나무를 심던 1960~70년대가 조림의 시기라면, 나무를 키우는 80년대는 육림의 시기로 볼 수 있다. 정부가 조림을 어느 정도 마친 1977년 ‘육림의 날’을 제정한 것은 이를 대변한다.

민둥산의 기적은 독림가(篤林家)로 통칭되는 조·육림가의 몫이 실로 컸다. 1960년대 UN에서마저 “산림 황폐도가 고질적이어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다”는 평가를 내린 나라였다. 이들은 치산녹화가 한창일 때 “우리 다 같이 애국가를 부르면서 산으로 가자”며 곡갱이와 삽을 들고 하루 종일 산에 파묻혀 나무를 심고 가꿨다고 한다. 많은 산주들은 사재도 털었다. “치산치수도 하고 국가에 봉사도 하는 심정으로 심고 또 심었다”는 이들의 말에는 애국심이 묻어난다. 50년 전부터 전남 장성의 축령산 570㏊(남산은 340㏊)에 편백나무를 심었던 임종국씨의 육림사업은 이를 대변한다. 그는 조림과 육림에 1억원쯤 투자했다고 한다. 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의 재산이 3억원이었다니 규모를 알 만하다. 그가 아들의 이름을 ‘육림’으로, 딸 이름은 ‘자연’으로 지었다는 것도 유명한 뒷얘기다. 이 같은 사례는 전국에서 얼마든지 있었다. 1971년 대규모 독림가가 270명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다.

우리는 산림 강국으로 자리했다. 경제성장과 산림녹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는 찬사도 듣고 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산림사업은 정부가 호언했던 것만큼의 ‘돈 되는 사업’은 아니다. 하지만 40년 치산녹화사업으로 키우고 가꾼 산림은 치유와 휴양, 문화가 어우러진 공간으로 변모했다. 산림이 둘도 없는 ‘부가가치의 보고’가 된 셈이다. 이제 ‘녹색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하며 그 영역을 무한히 넓히고 있다. 나무를 심는 주간을 맞아 잊힌 독림가들을 찾는 행사를 기획해 보는 것은 어떨까.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2014-04-08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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