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전화는 벨이 전화기를 발명하고 나서 20년이 지난 1896년 덕수궁에 가설되었는데 공무용이었다. 당시 전화는 ‘텔레폰’(telephone)의 음을 딴 ‘덕율풍’(德律風), ‘다리풍’(?釐風)이나 ‘전어기’(傳語機), ‘어화통’(語話筒) 등으로 불렸다. 한국 최초의 공중전화는 언제 생겼을까. 1902년 3월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가 개통되었는데 교환시설을 갖춘 ‘전화소’라는 관서가 설치됐다. 일반인도 이곳에서 전화를 사용할 수 있었다. 전화소는 1902년 한성·인천·개성에, 이듬해엔 평양·수원·마포·도동(남대문)·시흥(영등포)·경교(서대문) 등 아홉 곳에 설치됐다. 이 전화소를 최초의 공중전화로 볼 수 있겠다. 전화소에는 장리(掌吏)라는 관리가 있어서 교환원 역할을 하면서 요금도 받았다. 말이 들릴락말락하는 거리에 앉아서 통화 내용을 감시하기도 했다. 장리는 저속하거나 불온한 말을 하면 통화를 중단시킬 수 있었다. 외국인 사용자들은 프라이버시 침해라며 항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요금은 서울에서 인천까지 5분에 50전이었고 전화 받을 사람을 불러주는 호출 서비스도 있었는데 거리 1리마다 2전씩 더 내야 했다.
6·25전쟁으로 전화시설이 대부분 파괴되고 1954년 8월 첫 공중전화가 설치되었는데 사람이 지키는 유인(有人) 공중전화였다. 옥외 무인공중전화기는 1962년 7월 1일 첫선을 보였다. 주홍색의 ‘벽괘(壁掛)형’이다. 한 통을 거는 요금은 5원이었다. 이때부터 명실공히 공중전화 시대가 열렸다고 할 수 있다. 공중전화는 그 뒤 변신을 거듭했다. 구멍가게에도 탁상형 공중전화가 있어서 동전을 넣고 전화를 걸 수 있었다. 1971년 DDD라 부르는, 교환원 없이도 걸 수 있는 장거리 직통 전화가 개통되었고 DDD 공중전화도 1977년 등장했다.
휴대전화가 보편화되면서 공중전화는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80년 5만 8017대였던 공중전화는 1999년 56만 4054대까지 늘어났다가 지난해 말에는 7만 6783대로 줄었다. 한달에 한명도 사용하지 않는 공중전화가 전국에 200대가 넘는다고 한다. 1990년대 말에는 공중전화 옆에서 휴대전화를 쓰는 행위를 과소비의 전형이라고 욕하기도 했을 만큼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았는데 말이다. 공중전화는 한달에 500대꼴로 철거되고 있다. 5년 동안 1700억원의 적자를 보았다고 하니 무조건 비난할 수도 없다. 그래도 공중전화는 휴대전화가 없는 극빈층이나 군인 등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연락 수단이다. 길게 늘어서서 통화 차례를 기다리던 추억 또한 아직 공중전화가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6·25전쟁으로 전화시설이 대부분 파괴되고 1954년 8월 첫 공중전화가 설치되었는데 사람이 지키는 유인(有人) 공중전화였다. 옥외 무인공중전화기는 1962년 7월 1일 첫선을 보였다. 주홍색의 ‘벽괘(壁掛)형’이다. 한 통을 거는 요금은 5원이었다. 이때부터 명실공히 공중전화 시대가 열렸다고 할 수 있다. 공중전화는 그 뒤 변신을 거듭했다. 구멍가게에도 탁상형 공중전화가 있어서 동전을 넣고 전화를 걸 수 있었다. 1971년 DDD라 부르는, 교환원 없이도 걸 수 있는 장거리 직통 전화가 개통되었고 DDD 공중전화도 1977년 등장했다.
휴대전화가 보편화되면서 공중전화는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80년 5만 8017대였던 공중전화는 1999년 56만 4054대까지 늘어났다가 지난해 말에는 7만 6783대로 줄었다. 한달에 한명도 사용하지 않는 공중전화가 전국에 200대가 넘는다고 한다. 1990년대 말에는 공중전화 옆에서 휴대전화를 쓰는 행위를 과소비의 전형이라고 욕하기도 했을 만큼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았는데 말이다. 공중전화는 한달에 500대꼴로 철거되고 있다. 5년 동안 1700억원의 적자를 보았다고 하니 무조건 비난할 수도 없다. 그래도 공중전화는 휴대전화가 없는 극빈층이나 군인 등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연락 수단이다. 길게 늘어서서 통화 차례를 기다리던 추억 또한 아직 공중전화가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2013-10-16 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