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보랏빛 혁명/최광숙 논설위원

[씨줄날줄] 보랏빛 혁명/최광숙 논설위원

입력 2013-06-19 00:00
수정 2013-06-19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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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퍼플’이라고 불렸던 시절이 있었다. 퍼플(purple)은 보랏빛을 말한다. 대학 시절 보라색 옷을 자주 입고 수업에 나타난 여학생이 눈에 띄었던지 한 교수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그때 봄에는 보라색 조끼를, 겨울에는 보라색 오리털 점퍼를 즐겨 입었다.

그러나 예전엔 보라색이 무척 귀했다. 기원전부터 유럽에서는 달팽이의 진액을 이용해서 보라색을 만들었다고 한다. 달팽이 1만 마리로 겨우 손수건 한 장 크기의 보라색 염료가 나왔다니 그 가격이 황금보다 비싸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듯하다. 그래서 왕과 귀족 등 힘깨나 쓰는 이들만 보라색을 즐길 수 있었다. ‘왕의 신분으로 태어나다’라는 뜻의 ‘be born in the purple’이라는 영어 표현도 그런 배경에서 나왔을 터. 중세 말까지 고귀한 사본(寫本)에 쓰인 양피지도 보랏빛으로 곱게 물들였다.

산업디자이너 김영세씨는 청색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도, 사무실의 화이트 칼라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일을 하는 이들을 ‘퍼플 피플’이라고 부른다. 과거 세대와 달리 일하는 과정에서 즐거움과 보람을 찾고자 하는 요즘의 창의적인 인재가 바로 ‘퍼플 피플’이라는 것이다.

보라색은 고귀함과 귀함을 뜻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울함과 허영을 상징하기도 한다. 정열의 빨강과 고독의 파랑이 섞여 만들어진 탓인지 정서불안, 질투나 우울 등 복잡한 심리 상태를 나타낸다. 여성적인 빨강과 남성적인 파랑이 섞여서일까, 보라색은 무지개 색과 함께 동성애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렇듯 두 얼굴을 지닌 애매모호한 색인 보라색을 정치세계에서는 진보 진영이 즐긴다. 지난 2006년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은 엷은 보라색 투피스 등 온통 보라색으로 휘감고 서울시장 선거에 나온 적이 있다. 통합진보당 로고에도 보라색 물결 세 개가 굽이친다.

최근 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예상을 깨고 온건파 하산 로하니가 당선됐다. 핵무기 개발에 따른 경제 제재와 경제난에 시달리는 이란 국민의 정권 교체 열망이 표출된 것이라고 외신은 분석한다. 로하니가 당선되자 지지자들은 그의 상징색인 보라색 펼침막과 스카프를 들고 환호했다고 한다. 로하니는 이번 선거운동 내내 보라색을 중도개혁파의 상징색으로 내걸었다. 그는 강경 일변도의 대외 노선에서 벗어나 서방 세계와 대화를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에 당선됐다고는 하나 이란에서 국가정책의 최종 결정권은 여전히 최고 성직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에게 있다. 2인자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보랏빛 혁명’의 길을 걸을지 궁금하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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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9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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