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의 주위에는 ‘셋’이 많아졌다. 일부러 택하거나 맞춘 것은 아닌데도 점심과 저녁자리가 대체로 셋의 구도로 짜여진다. 얼마 전, 동료 셋과 점심을 끝내고 걷다가 “왜 셋인가”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물론 둘만의 자리는 단출한 듯하고, 꼽사리로 한두 명이 더해진 네다섯과 달리 시끄럽지도 않고 자연스럽기는 하다.
어느 좌중에서 물었더니 누군가 “길 가는 세 사람에게는 스승이 있다”는 옛말을 꺼냈다. 한 친구는 “두 사람의 의견이 충돌할 때 방패막이용으로 꼭 있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셋의 의미를 부여한다. 사는 게 까다로운 요즘, 어느 자리에서든 언쟁이 없겠는가. 다른 이는 직장 분위기를 전한다. “단둘이 점심을 먹거나 만나면 뭔가 작당을 하려는 것으로 보여 최소한 셋은 모여야 안심이 된다”고 했다. 그저 듣고 지나치긴 찜찜하다.
‘셋’의 해석은 이처럼 다르다. 이래저래 공자가 ‘스승 역’을 강조한 ‘삼인지행’(三人之行)의 뜻도 다양해져야 할 것 같다. 사는 재미를 더하는 게 ‘꿈보다는 해몽’이라고 하는데···.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어느 좌중에서 물었더니 누군가 “길 가는 세 사람에게는 스승이 있다”는 옛말을 꺼냈다. 한 친구는 “두 사람의 의견이 충돌할 때 방패막이용으로 꼭 있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셋의 의미를 부여한다. 사는 게 까다로운 요즘, 어느 자리에서든 언쟁이 없겠는가. 다른 이는 직장 분위기를 전한다. “단둘이 점심을 먹거나 만나면 뭔가 작당을 하려는 것으로 보여 최소한 셋은 모여야 안심이 된다”고 했다. 그저 듣고 지나치긴 찜찜하다.
‘셋’의 해석은 이처럼 다르다. 이래저래 공자가 ‘스승 역’을 강조한 ‘삼인지행’(三人之行)의 뜻도 다양해져야 할 것 같다. 사는 재미를 더하는 게 ‘꿈보다는 해몽’이라고 하는데···.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2013-06-24 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