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광장] 경인년 세밑의 備忘(비망) /김성호 논설위원

[서울광장] 경인년 세밑의 備忘(비망) /김성호 논설위원

입력 2010-12-30 00:00
수정 2010-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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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비록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이 세계적인 명언을 남긴 네덜란드의 스피노자(1632~1677)는 파란 많은 질곡의 생을 살다 간 철학자다. 빼어난 철학자였으면서도 사업가, 보석밀매업자, 안경제조업자를 전전하며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천재. ‘자연이 곧 신’이라는 범신론으로 해서 괴테는 그를 ‘신에 취한 사람’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런 그가 말년에 간절하게 부르짖은 사과나무의 희망은 불확실성을 핑계로 현실을 바로 보지 않는 왜곡과 태만에 대한 경계와 다름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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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논설위원
김성호 논설위원
얼마 전 영국 일간 가디언이 올 한해 화제가 됐던 단어와 신조어 20개를 추려 그 의미를 기발하게 해석해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그 해석들엔 유난히 왜곡과 진실의 은폐가 범람한다. 리스트의 맨 위에 등장한 위키리크스 설립자 어산지(Assange)는 ‘방종을 경건한 행위처럼 가장하는 행동’으로 소개됐다. 그런가 하면 긴축(Austerity)은 ‘독실한 척하는 비열한 짓’이고, 적자(Deficit)는 ‘잘못된 행동에 대한 변명’이란다. 과장과 비약의 억지 인상이 짙지만, 현실의 가장과 숨기기를 겨냥해 빗댄 뉘앙스들이 신선하다.

가디언의 단어·신조어 연말결산이야 그저 웃고 넘길 수 있는 세태의 반영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교수신문이 낸 올해 결산 사자성어의 뉘앙스는 사뭇 심각하다. 쫓기던 타조가 급한 나머지 덤불 속에 머리만 숨긴 채 꼬리를 드러낸 상황이라는 ‘장두노미’(藏頭尾). 감추는 바가 많아 행여 들통날까 전근긍긍하는 모습을 꼬집은 것이다. 교수신문 필진과 주요 일간지 칼럼 필진, 주요 학회장, 전국대학교수회장 212명 중 41%가 압도적으로 선택한 성어라니 비리·일탈과 은폐에 대한 적대의 공감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교수신문이 선정한 장두노미의 배경은 교수들의 설명 그대로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사건과 그것들의 해결 과정에 있을 것이다. 천안함 폭침과 영포게이트로 불리는 민간인 사찰, 연평도 포격, 한·미 FTA 재협상, 예산안 파동…. 경인년을 관통하며 나라 안팎의 관심을 모은 사안들이지만 진실 공개와 의혹의 해명보다는 덮고 감추기에 급급한 정부를 겨냥한 지적일 터이다. 그런데 이 장두노미가 정치·국방·외교에만 국한할까.

복원 3개월 만에 금이 간 광화문 현판, 엉터리 장인에 놀아난 국새 사기극, 외교부 장관 딸 특채사실 공개 후 공직사회 전방위에서 불거진 특채, 퇴직자들에게 성과급을 듬뿍듬뿍 퍼줬다는 공기업들…. 무리한 공기 단축이 부른 균열과 공직자들의 간여가 명백한 사기극인데도 날씨 탓이니 어쩌니 하며 변명에 급급한 도덕 불감. 제 식구 감싸기의 결탁·특혜의 일탈과 제 배 불리기의 뻔뻔한 불법에도 비상식의 해명만 붙을 뿐이다. 나라망신에 대한 지적과 박탈·소외에 대한 원성이 높은데도 공정과 균등의 구호는 여전히 요란하다.

‘가야산 호랑이’ 성철 스님이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3000배를 시켰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3000배의 절값을 달라는 말에는 어김없이 “쏙이지 말그래이.”하며 불기자심(不欺自心)의 화두를 주었다는 스님. 스스로에게 엄하고 정직하게 자신과의 약속을 꼭 지키라는 불기자심의 화두는 실천으로 빛이 나는 일갈이다. 수행 중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에게 돌멩이를 던지며 차갑게 외면한 수행, 신도가 선물한 고급시계를 도끼로 박살낸 뒤 “공부하는 놈이 시계 볼 여유가 어디 있냐.”며 호통을 쳤다는 얘기는 결기의 결정인 것이다.

경인년도 사흘만 남겨놓은 세밑이다. 나를 속이지 말고 남을 배려하라는 교훈이 어디 성철 스님의 ‘쏙이지 말그래이’뿐일까. 나와 남을 속이고 세상을 썩히는 비극은 되풀이하지 말자. 사과나무의 희망은 계속되어야 한다. 올해의 사자성어는 올해의 사자성어일 뿐. 새해엔 ‘장두노미’ 같은 씁쓸하고 미운 말 대신 기분 좋고 예쁜 사자성어를 한번 들어보자.

kimus@seoul.co.kr
2010-12-3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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