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언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풍부한 유동성은 벤처기업들의 자금난을 해소하고 기술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버블’을 형성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시장이 협소해 특정 부문으로 자금이 집중될 때 버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국내외 경기둔화 우려, 금융시장 변동성 확대 등 불안 요인도 산재한다.
KPMG의 글로벌 벤처 투자 분석에 따르면 글로벌 벤처캐피탈 투자는 지난해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으나 올 상반기에는 위축되고 있다. 미중 무역갈등 장기화와 글로벌 경기 둔화, 브렉시트, 신흥국 불안 등으로 투자가 둔화된 것으로 파악된다. 우리나라 또한 이러한 문제들을 피해 가기 어려워 보인다. 대내외 경제가 불안한 상황에서 정부의 지원만으로 리스크가 높은 벤처기업이 성장세를 이어 가기는 쉽지 않다. ‘벤처붐’이 과거 닷컴 버블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벤처 생태계의 내실화를 통해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뤄 내야 한다.
이를 위해 첫째, 벤처기업들이 협소한 국내 시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글로벌 사업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여기에는 벤처 강국인 이스라엘의 기술 인큐베이팅(보육) 프로그램이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이는 정부가 운영하는 창업 초기 벤처 육성 프로그램에 과학자 등이 참여해 원천 기술 개발을 돕고, 창업 초기부터 글로벌 시장을 염두에 둔 사업 모델을 개발하도록 지원한다. 우리나라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벤처기업들을 대상으로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나 자금 유치를 주요 목적으로 한다는 비판이 있다. 따라서 현재의 프로그램을 개선해 글로벌 사업 모델 개발과 같은 경영 관련 교육을 강화하고 해외 기업, 투자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도 필요하다. 이처럼 창업자들의 비용 부담이 적은 초기부터 세심한 관리와 지원을 통해 옥석을 제대로 가려 실패의 비용을 줄여야 한다.
둘째, 증권사의 벤처 투자를 확대해 초기 단계를 지나 성장 단계에 있는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한다.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 단계 중 ‘시리즈B’라고 불리는 성장 단계 투자에는 통상 70억~100억원의 자금 공급이 이뤄지며, 최근에는 규모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국내 벤처캐피탈(중소기업창업투자회사, 신기술사업금융회사) 규모는 대부분 중소형이어서 대규모 투자에는 자본력이 부족하다. 즉 대형 금융기관의 참여가 필요한 것이다. 최근 은행과 금융지주사의 벤처 투자가 확대되고는 있지만 증권사의 경우에는 모험자본 투자 중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는 약 14%에 불과하다.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는 리스크가 상당히 높으므로 은행보다는 모험자본 역할을 하는 증권사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셋째, 벤처 투자 이후 어느 정도의 수익을 가급적 빠른 기간에 회수함으로써 ‘투자-회수-재투자’가 선순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투자 회수 방법으로는 기업 공개와 인수합병(M&A)이 있다. 우리나라 벤처투자 회수 방식은 기업 공개가 대부분이고, 이에 정부는 코넥스·장외주식시장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등 상장을 쉽게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장 자체가 정체돼 있고, 변동성도 상당히 높을 뿐만 아니라 상장까지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는 문제가 있다.
반면 M&A는 기업 공개 이전에 대기업이나 사모펀드 등 소수의 전문적인 참여자에 의해 이뤄지므로 투자금의 회수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 M&A에서는 인수 대상 기업을 면밀하게 평가하므로 벤처기업들 중 옥석을 가리는 기능도 있다. 이러한 순기능으로 인해 글로벌 벤처시장에서는 M&A를 통한 회수 비중이 70%를 차지한다. 국내에서도 M&A 활성화에 대해 논의되고 있지만 기술이나 인력 탈취 문제 때문에 부정적 인식이 더 큰 것이 현실이다.
벤처기업 M&A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와 제도적 혁신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대기업이 중소벤처기업과 상생하는 동반자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사회적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2019-08-27 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