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석 국제부 기자
혹시 영화 ‘조커’의 줄거리를 스포일러하는 거냐고 묻는 독자가 있다면 오해다. 이건 영화와 전혀 무관한 레온카발로의 오페라 ‘팔리아치’의 결말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오랜만에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머릿속에선 다른 얘기이지만, 뭔가 비슷한 부분이 있는 120여년 전 오페라가 떠올랐다. 영화든, 오페라든 사람을 웃겨야 할 광대가 눈물을 흘리고, 세상을 저주하니 말이다.
‘조커’를 보고 나서 광대가 주인공인 또 다른 작품 베르디의 ‘리골레토’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멸시받는 하층민 광대 리골레토가 바람둥이 권력자인 만토바 공작에게 복수하려다 스스로 파멸한다는 이 유명 오페라의 줄거리는 영화와 닮았다. 우연인지 모르나 프랑스어로 ‘장난치다, 농담하다’는 뜻인 ‘리골레’(rigoler)에서 유래한 광대 이름 ‘리골레토’는 미국식으로는 ‘조커’가 되는 셈이기도 하다.
‘광대 서사’라는 게 있는 걸까. 광대가 나오는 이야기들이 조금씩 닮은 구석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를 보며 떠오른 의문은 지난해 말 전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온 시위 뉴스를 보면서 조금이나마 해소됐다. 새하얀 얼굴 화장에 새빨간 입술을 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부자와 권력자, 정부를 향해 분노를 쏟아내는 모습은 홍콩과 레바논, 칠레, 이란 등 수많은 나라에서 볼 수 있었다. 세계 시민들은 불평등과 부조리에 분노해 스스로 악당이 되기로 한 조커에 자기 자신을 투영한 것이다.
‘팔리아치’와 ‘리골레토’를 바라보는 관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의 모든 오페라가 반드시 ‘테너와 소프라노가 사랑하는데, 바리톤이 방해해서 소프라노가 죽는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100년 전, 200년 전 사람들도 오페라극장에서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을 경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게 가면 뒤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웃어야 하는’ 광대의 역설은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질 것이 없는 비루한 민중의 삶을 은유하기에 어떤 캐릭터보다도 적절했던 게 아니었을까.
시대가 흘러 이제 현대인들은 ‘조커’, ‘기생충’과 같은 영화를 보며 불평등에 다시 눈을 뜨고 있다. 그렇게 작품을 관람하는 경험이 쌓이고 쌓여 극장은 시민들이 사회적 모순을 자각하는 공간이 된다.
수많은 뉴스에 밀려 관심을 끌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는 불평등에 분노하는 시위가 해를 넘겨서도 이어지고 있다. 안타깝지만 올해가 끝날 때쯤에도 이 같은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이란 기대는 들지 않는다.
설마 100년 뒤, 200년 뒤 사람들도 또 다른 광대 이야기에 자기 자신을 투영하는 것은 아닐까. ‘광대 서사’는 매력적이면서도 씁쓸하다.
sartori@seoul.co.kr
2020-02-05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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