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열 임산부약물정보센터 이사장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사항에 따르면 이소트레티노인은 여느 치료법으로는 없애기 어려운 중증의 여드름 치료를 위해 쓰는 약이다. 국내에서 30여개 회사에서 다양한 약품명으로 팔고 있으며 연간 1640만정이 유통되고 있다. 한 해 처방 건수는 40만건이다.
그러나 이소트레티노인이 태아 기형을 유발한다는 사실은 모르는 이가 많다. 캐나다에서는 임신 중 이 약물에 노출될 경우 임신중절을 권할 정도로 심각한 기형 유발 물질로 알려져 있다. 임신 중 기형 유발 가능성은 35% 정도다. 주로 중추신경계, 얼굴, 심장, 흉선에서 기형을 일으킨다. 더 중요한 사실은 뇌 손상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신체 기형이 없는 경우에도 절반 정도는 지능저하를 경험할 정도로 위험한 약물이다.
생식독성학자 중에는 입덧치료제로 쓰이다 1만명 이상의 팔다리 기형아를 발생시켰던 ‘탈리도마이드’보다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탈리도마이드는 팔다리 기형만 유발하지만 이소트레티노인은 뇌 손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국내에서 해마다 유통되는 이소트레티노인 양은 우리나라 모든 임신부는 물론 가임기 여성 1200만명을 위험에 빠뜨리고도 남을 만큼 많은 양이다. 심지어 인터넷 중고시장에서 복용하고 남은 약을 유통하는 사례도 있다.
더 큰 문제는 무분별한 처방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지난해 6개월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건강보험에 의한 처방·조제건수는 2만 5000건이었지만 비보험 처방은 17만건으로 허가사항 외 오남용 문제가 심각하다. 2010년 이후 임산부약물정보센터의 상담자료 분석 결과 임신 중 이소트레티노인 사용 후 상담 사례는 900건이 넘을 정도로 많았다.
상담 임신부의 80%가 태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시기에 약물을 복용한 것으로 분석됐다. 임신부 1명당 짧게는 18일에서 길게는 10년 이상 복용한 사례도 밝혀졌다. 학계 통계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약물에 노출된 임신부의 20%가 자연유산을 하고 50%는 어쩔 수 없이 임신중절을 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외에도 임신부의 이소트레티노인 노출 예방을 위한 다양한 제도가 있다. 가장 강력하게 관리하는 나라는 미국이다. 우선 처방은 프로그램에 등록된 의료인만 가능하다. 또 여기에 등록된 약국과 약사에 의해서만 약의 조제가 가능하다. 허가사항에는 경고 문구, 임신 예방을 위한 환자 상담, 환자의 동의서 작성, 치료 시작 전 임신 반응검사 요구, 처방 의료인에 의한 데이터베이스 등록, 매달 임신반응 검사 요구 등을 포함해 엄격하게 관리한다.
현재로선 ‘이소트레티노인 임신예방프로그램’ 도입이 우리나라 임신부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최근 식약처는 ‘중증 여드름 치료제 이소트레티노인제제의 기형 유발성 경고 및 약물의 안전사용 당부’ 자료를 의료인들에게 제공했다. 아울러 이 약을 ‘위해성 관리대상 의약품’으로 지정해 제한된 의사와 약사만 처방·조제하고 피임에 동의한 환자에게만 약을 쓰도록 하는 등 임신예방프로그램을 도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늦었지만 식약처가 대응 방안을 강구하고 임신예방프로그램 도입 의지를 밝힌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이소트레티노인에 노출된 임신부가 더이상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안전한 출산환경 조성과 임신부 안전망 구축을 저출산 대책의 완성으로 보는 것은 무리일까’라고 다시 반문해 본다.
2018-05-14 25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