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석의 서울살이] 덕수궁 돌담길의 진실

[노주석의 서울살이] 덕수궁 돌담길의 진실

입력 2017-11-17 17:52
수정 2017-11-17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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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대한문 앞에서 덕수궁 돌담을 끼고 정동 골목을 쑤욱 들어가노라면 … 경성지방법원 앞까지 와서, 본래 같으면 이화학당 앞을 지나 서대문으로 나가는 길로 들어섰을 것을 … 그 둘은 기약지 않고 좀더 은근한 방송국 넘어가는 길을 택하려 들었다.”

1930년대 경성에서 제일 잘나가는 모던보이 구보 박태원이 단짝 이상을 모델로 쓴 단편소설 ‘애욕’에서 읊은 덕수궁 돌담길 풍경이다. 소설 속 경성지방법원이 대법원을 거쳐 서울시립미술관, 이화학당이 이화여고, 경성방송국이 덕수초등학교로 변했을 뿐 으슥한 길을 찾는 연애 풍속도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그 옛날에는 덕수궁 담 뒤에 있는 영성문 고개를 사랑의 언덕길이라고 일러 왔다. … 남의 이목을 꺼리는 젊은 남녀들은 흔히 사랑을 속삭이고자 찾아왔던 것이다. … 오늘날 이십대의 젊은이들은 영성문 고개가 사랑의 언덕길이었던 것조차 모르게 되었다.”

1954년 정비석이 서울신문에 연재한 ‘자유부인’에도 돌담길이 등장한다. 영성문은 신문로에서 덕수초등학교를 거쳐 미국대사관저까지 이어지는 고갯길이었다. 덕수궁(경운궁)의 북쪽 대문이고 왕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이 있어서 사람들은 경운궁을 ‘영성문 대궐’이라고 불렀다. 선원전은 옛 경기여고 터, 덕수초등학교, 구세군중앙회관에 걸쳐 있었다.

덕수궁 돌담길은 어쩌다가 사랑길의 대명사가 됐을까. 멀게는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가 남긴 불멸의 러브스토리가 기원이다. 이성계는 금기를 깨고 경복궁에서 고개만 들면 보이는 곳에 애처의 무덤을 만들었다. 미국 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가 능침 자리다. 태종 이방원은 계모의 능을 파헤쳐 지금의 정릉동으로 옮기고, 석물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도록 광통교 바닥에 깔았다. 그러나 사랑의 힘은 사라지지 않고 정동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았다. 600년 묵은 원조 사랑길이다. 개화기 서양 문물의 첫 정착지였던 정동에 자유연애의 유전자가 이어진 것도 자연스럽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정동제일교회 예배당을 중심으로 들어서면서 남녀칠세부동석의 엄혹한 윤리가 해체되기 시작했다. 두 학교 청춘들의 애틋한 만남과 헤어짐의 사연이 덕수궁 길에 깃든 것이다.

이별을 강조하는 속설은 다소 근거가 부족하다. 본래 독일영사관이 있던 자리에 경성재판소가 들어선 것은 우연의 일치였다. 실제 그 시절 이혼 재판정이 돌담길의 정체성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 힘들다. 시대를 앞서가는 청춘들의 연애를 시샘하는 사회적 우려와 질투가 만들어 낸 아포리즘이 아닐까. 최근 서울시민이 뽑은 ‘가장 잘생긴 서울’ 1위에 덕수궁 돌담길이 올랐다. 누구나 이 길을 좋아한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길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이 돌담길을 좋아하는 이유는 길에 얽힌 스토리보다 궁 안팎을 넘나드는 절묘한 동선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돌담길 주변은 모두 옛 경운궁 구중궁궐이었다. 고종의 집무실이자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이 담 밖에 나와 있는 이유도 덕수궁을 관통하는 남북 간 도로가 궁을 쪼갰기 때문이다. 덕수궁 돌담은 1921년에 놓인 이 신작로의 부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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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석이 말한 덕수궁 돌담길, 영성문 고갯길의 선원전이 복원된다고 한다. 영국대사관 소유 미완성 돌담길 70m도 뚫릴 날이 머지않았다. 다만 덕수궁 돌담길은 우리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국 대한제국이 남겨 준 값비싼 선물이란 점을 기억했으면 한다. 나라 잃은 대가로 누리는 아픈 길이다.
2017-11-18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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