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남산에서 본 명동
91×72.7㎝, 캔버스에 오일, 2015
빛과 새벽, 야경을 주로 그리는 서양화가
빛과 새벽, 야경을 주로 그리는 서양화가
간밤에 나는 밤새도록 꼬박
얼굴이 없는 한 사나이와 노름을 했다
따고 잃고 그러다가
그만 내 밑천이 다 나가고 말았다
예전에 도스토예프스키는 밑천이 떨어지자
갓 결혼한 아내의 패물을 내다 처분했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의 도박을 통해 그간
적잖이 세상적인 것을 날려온 터라
이제 정년 퇴직금쯤 어렵잖게 들이대었다
땄다 잃었다 날이 샐 즈음해선
그 역시 깡그리 날려버리고 말았다
얼굴이 없는 사나이와 나는 쉬 다시 만나
한판 또 붙자고 악수를 나눈 뒤 헤어졌다
다음 밑천으론 내 아직도 연연해있는
마지막 세상적인 것을 몽땅 디밀 참이다
얼굴이 없는 사나이가 앉았던 자리에
내 데드마스크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 추석이 지나고 첫서리가 내린 다음날 저녁 숟가락을 내린 뒤. 어머니는 내 생일을 이렇게 말했다. 전쟁 끝나고 1년 뒤. 물자는 부족했고 삶은 만만한 구석이 없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세상엔 별의별 일이 많았다. 기쁨보다 슬픔, 희망보다 절망, 그리움보다 고통. 탄식 속에서 살아온 이유, 이 시를 읽으며 문득 깨닫는다. 끝없이 이어지는 얼굴 없는 사내와의 도박. 절대 승리할 수 없는 삶과의 대결. 세상적인 것을 몽땅 디밀며 펼치는 마지막 승부. 태어난 이상 이 승부를 거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곽재구 시인
2019-12-06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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