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수의 헌법 너머] 광복절 그리고 두 나라의 헌법

[이종수의 헌법 너머] 광복절 그리고 두 나라의 헌법

입력 2019-08-18 22:22
수정 2019-08-19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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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광복절이 지난주였다. 이웃하는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일로에 있는 즈음에 이번 광복절을 앞두고서는 자못 비장감마저 든다. 그래서인지 연일 계속되는 홍콩의 시위 현장에서 한 젊은이가 ‘광복’(光復)이라는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든 모습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서로 국경을 맞대고서 전 역사에 걸쳐서 전쟁이 잦았던 유럽은 유럽연합(EU)을 중심으로 꾸준히 통합의 길로 나아가는데, 동아시아는 패권과 영토를 두고서 국가 간의 반목과 갈등의 골이 여전히 깊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먼저 동아시아 국가들에 공히 강하게 남아 있는 국가주의에 그 이유가 있겠다. 우리도 예외는 아닐 터다. 그러나 우리는 그간의 민주화운동과 수년 전의 촛불항쟁에서 국가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시민사회의 역량이 확인됐듯이 여느 나라들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그래서 아베 정부의 최근 조치와 개헌 시도에 저항하면서 시위하는 일본 시민들의 모습에서 앞으로의 희망을 내다본다.

독일과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전범국가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또한 전후에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대표적인 나라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 나라는 통일 이후에도 기본법을 그대로 고수하려 하고, 다른 한 나라는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호시탐탐 헌법을 바꾸려고 시도한다.

독일은 동서독 통일 이후에도 여전히 헌법인 기본법을 내치지 않고 있다. 많은 독일인은 이 기본법과 더불어 비로소 민주법치국가로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 그리고 민족의 재통일을 가져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앞으로도 기본법과 함께 독일의 미래를 펼쳐 나가려 한다. 여기에는 수백만명의 유대인이 희생된 나치 불법국가에 대한 청산 작업과 피해자인 여러 이웃 나라와 그 시민들에 대한 진솔한 사죄가 전제됐다. 부끄러운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다짐이 학교교육과 시민교육을 통해 독일 사회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에 일본의 경제 발전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눈부시다. 정치적으로도 나름 안정적이다. 과거에 군국주의 아래 제국주의적 야욕으로 자국 시민들뿐만 아니라 우리를 포함해 여러 이웃 나라를 고통스럽게 했기에 올곧이 지금의 ‘평화헌법’을 통해 이룬 성과임을 그 누구도 부인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방어력으로 자위대도 보유하고 있기에 딱히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일본의 보수세력은 줄곧 ‘전쟁 가능한 보통국가’를 내세우면서 평화헌법의 개정을 꾀해 왔다. 미국 점령하에서 강제된 조항이라 설령 그들이 스스로 원했던 헌법이 아니더라도, 평화헌법의 개정에는 그것이 삽입된 전후(戰後)의 역사적·국제정치적 조건을 고려할 때에 적어도 우리와 중국 등 주변 국가들의 이해가 필요하다는 게 뜻있는 일본 헌법학자들의 견해다.

우리와 일본, 두 나라가 전부터도 그리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으나, 그간 서로 선을 넘지 않은 채로 관계를 지속해 왔다. 최근에 불거진 갈등은 두 나라의 과거사가 제대로 매듭지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이 뒤섞여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로 인해 일본인들에게는 스스로 피해자라는 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다.

미국에게는 일본이 피해자일 수 있어도, 그렇다고 해서 난징대학살, 간토대학살,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서 저지른 갖은 잔혹한 행위들이 용서되지는 않는다. 논란이 되는 개인청구권을 포함해 강점으로 인해서 빚어졌던 모든 부채와 문제가 그간의 협정으로 일괄타결됐다고 강변하는 아베 정부와 이 같은 적반하장격의 주장에 동조하는 국내 일부 세력의 망발을 접하고 많은 이들에게는 가해자의 자기만족적인 용서가 황망하게 다루어졌던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이 떠올랐을 법하다.

‘오모이야리’(思い遺り)라는 일본말이 있다. “상대를 먼저 배려하는 기특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대다수 일본 시민들도 언젠가는 이 마음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과거에는 ‘보호’를 앞세워 우리를 강점했고, 지금은 ‘(수출)관리’라는 미명으로 생뚱맞게 경제보복을 시도하는 그들 앞에 당당하게 맞서는 것 말고는 달리 무슨 도리가 있겠나. 아무쪼록 이번 일이 그간 우리가 놓친 것, 그리고 부족했던 점을 새삼 깨닫고서 채워 가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2019-08-19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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