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승자 없는 게임/김태균 산업부장

[데스크 시각] 승자 없는 게임/김태균 산업부장

김태균 기자
입력 2017-08-31 22:56
수정 2017-09-01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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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균 산업부장
김태균 산업부장
“한 달에 1만원 이상 요금을 더 내고 계셨네요.”(이동통신 대리점 직원)

“아, 제가 그동안 손해를 보고 있었던 건가요?”(나)

“그렇네요. 작년 ○월부터 약정할인 자격이 되셨어요. 하지만 통신사들이 그런 걸 가입자들에게 먼저 알려 드리지는 않거든요. 어쨌거나 이제부터는 할인을 받으실 수 있도록 제가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더 낸 돈을 환불받을 수는 없나요?”

“그건 불가능할 텐데요.”

몇 달 전이었다. 내가 통신요금 할인을 1년 이상 ‘부당하게’ 못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동안 더 낸 요금을 합해 보니 얼추 15만원이 넘었다. 눈 뜨고 코 베이는 게 이런 건가. 나름 똑똑한 통신 소비자라고 여겨 왔던 자부심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약정할인’이란 단어가 매일 뉴스에 오르는 국민 상식 용어가 된 건 그로부터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대리점에서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새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통신요금 인하에 착수했다. 이전 정부들과 동일한 선택이었다. 어린이부터 노인층까지 전 연령대가 해당되는 통신요금의 인하는 언제부턴가 새 정부가 국민들에게 주는 일종의 선물처럼 활용돼 왔다.

국정기획위의 목표는 모든 이통통신 가입자에 대한 1만 1000원의 월 기본료 폐지였다. 통신업계는 당초 예상보다 강력한 압박에 어느 때보다 강하게 반발했다. 새 정부가 기본료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우긴 했지만, ‘65세 이상 취약계층’과 같이 대상을 일부에 한정할 것으로 예상했던 업계의 당혹감은 컸다. 당시 주무 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국정기획위의 의중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미흡한 인하 계획’을 제출했다가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결국 국정기획위는 기본료 폐지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일정 기간 가입을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요금을 깎아 주는 약정할인의 폭을 기존 20%에서 25%로 확대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업계는 ‘행정소송 불사’라는 배수의 진을 쳤다. 정부도 “모든 가입자에게 적용되는 요금 인하”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공정거래위원회와 방송통신위원회는 업계 요금 담합 의혹과 약정할인 고지 준수 여부 등에 대해 조사에 나서는 등 행정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 싸움이 지난 29일 공식적으로 마무리됐다. 통신업계가 소송 제기 없이 약정할인 상향 적용을 수용하기로 했다. 지루한 싸움이 끝났지만 승자는 안 보인다. 통신업계는 앉아서 수천억원대 매출 감소를 보게 됐다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정부에 찬사를 보내는 소비자도 없다. 약정할인 조정 관련 기사에는 정부가 공약을 안 지켰다는 성난 댓글이 이어진다.

이번 정부와 업계의 갈등 과정은 양쪽 모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부는 소비자 관련 정책을 펴면서 기업과 소통하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필요해졌다. 과거와 똑같은 방식의 일방적인 압력 대신에 시장 원칙을 지키면서 국민과의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이번과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그래서 피로도가 누적되면 정책의 연착륙은 어려워진다. 통신업계도 소비자의 신뢰를 확보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번에 여론을 통해 확인된 것은 통신업계에 대한 소비자들의 커다란 불신이었다.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곰곰이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windsea@seoul.co.kr
2017-09-0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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