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친애하는 베이커씨에게/김상연 정치부 차장

[데스크 시각] 친애하는 베이커씨에게/김상연 정치부 차장

입력 2014-04-29 00:00
수정 2014-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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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 담긴 애도의 편지 감사합니다. 편지를 읽으면서 문득 지난해 미국에 있을 때 당신과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당신은 이렇게 말했죠. “나는 무엇보다 한국이 이룬 경제적 성취를 높이 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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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연 정치부 차장
김상연 정치부 차장
우쭐해진 나는 이렇게 대답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경제적인 측면뿐 아니라 문명적인 측면에서도 한국은 이제 선진국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솔직히 말해 중국은 덩치만 컸지 문명적으로 한국을 쫓아오려면 한참 멀었고, 일본은 이미 쇠락하는 선진국입니다.”

그런데 입에서 씹던 음식이 튀도록 ‘열변’을 토하는 나를 보던 당신의 표정은 왠지 좀 불편해 보였습니다. 입에 발린 소리를 좀처럼 하지 않는 편인 당신은 “어쨌든 나는 한국의 경제적 성취를 높이 평가한다”는 말만 한 차례 더 거듭할 뿐 나의 ‘선진국론’에 맞장구를 치지 않았습니다. 그런 당신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한번 한국에 와서 진면목을 보면 동의하게 될 거다’ 라는 오기를 품었던 것 같습니다.

베이커씨, 지난해 당신에게 내뱉었던 열변을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회수합니다. 당신이 그때 왜 불편한 표정을 지었는지 이제 알게 됐습니다. 한국은 선진국이 아닙니다.

며칠째 CNN 방송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세월호 사고 뉴스가 큼지막하게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제발 당신이 ‘파렴치한 선장과 선원’에 대한 뉴스를 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미국인들은 어린이와 여자를 보호하지 않는 남자를 누구보다 경멸하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제발 당신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선박을 무리하게 개조하고 승선인원도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선박회사’에 대한 기사를 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나는 평소 당신에게 한국은 돈보다 더 지고한 것을 지향하는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자랑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제발 당신이 ‘침몰 사실을 신고하는 탑승객에게 경도와 위도를 묻느라 시간을 허비한 해경’에 대한 뉴스를 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한국을 정말로 ‘미개한 나라’로 볼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베이커씨, 올여름 한국을 여행하겠다는 당신의 계획을 무기한 연기해줄 것을 간곡히 청합니다. 고백컨대, 한국에서 세월호는 바다에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세월호의 배아(胚芽)’들을 발견하고 놀라는 당신의 얼굴 표정은 상상조차 하기 싫습니다.

나는 당신이 한국에서 길을 건널 때 양보하지 않고 차 앞머리를 들이미는 운전자들을 보고 충격을 받을까 두렵습니다. 나는 당신이 버스에서 내리기도 전에 문을 닫고 출발하려는 한국의 버스 기사를 보고 까무러칠까 두렵습니다. 나는 한국음식을 무척 좋아하는 당신이 한국에서 커피 크림을 넣은 설렁탕처럼 재료를 속인 음식을 먹고 실망할까 두렵습니다. 나는 당신이 금연빌딩 안에서 양복 차림으로 죄의식 없이 담배를 피워대는 한국의 화이트칼라들을 보고 경악할까 두렵습니다.

친애하는 베이커씨, 언제쯤 당신에게 떳떳한 내 나라를 보여줄 수 있을지 솔직히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런 날이 영영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한국인은 큰 재앙을 당하고도 너무 빨리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carlos@seoul.co.kr
2014-04-2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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