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현웅 변호사
어떤 사람에게 아들 둘이 있었는데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재산의 한몫을 제게 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작은아들에게 살림을 나누어 주었더니 며칠 후에 작은아들은 제 몫을 다 거두어 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갔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여 자기 재산을 흩어버렸는데 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즈음에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는 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고장 사람 중 하나에게 가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고 그 사람은 그를 자기 농장으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했습니다. 그는 돼지가 먹는 가룹 열매로나마 배를 채워 보려고 했지만 아무도 그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그는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는 일어나 자기 아버지에게로 갔습니다.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는 그를 알아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했습니다.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가져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사실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즐기기 시작했습니다.(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했을 때 못 준다 하지 않고 작은아들이 원하는 대로 모두 내 줍니다. 그리고 그 재산을 가지고 떠난다 할 때도 막지 않고 떠나보냅니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받은 재산을 가지고 독립해서, 성공할지 아니면 다 거덜내고 거지꼴로 돌아올지 알 수 없지만 작은아들이 요구하는 대로 그저 다 들어줍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선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작은아들이 방탕한 생활을 해 재산을 흩어버리고 거지꼴이 돼 돌아올 때도 미리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작은아들이 돌아왔을 때 내치거나 혼을 내거나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기뻐하며 그것도 미리 달려가서 기꺼이 맞이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회개하는 인간에게 무한한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저는 그리스도교가 전하려는 중요 핵심 진리가 이 비유에 담겨 있다고 이해합니다. 그리스도교가 믿는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선사하시는 하느님이고 또한 무한한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표방하면서 즉 예수 믿는 종교라고 말하면서 신자들의 자유를 옥죄고 지옥의 심판을 자주 언급하며 믿는 자들 중 극히 일부만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강조하는 종교는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이단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자유를 옥죄고 지옥의 심판이라는 무서운 말로 겁주는 방식은 하느님을 온전히 믿게 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주 등 일부 세력이 예수를 빙자해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선사하시는 분이고 언제든지 회개하고 돌아오면 무한한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라고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에 반하는 종교는 진정한 그리스도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자유를 옥죄는 방식은 다른 생각을 못하게 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그러나 의심할 자유 없이는 자유를 선사하신 하느님을 오히려 배척하는 것으로 온전한 그리스도 신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지옥의 심판을 언급하며 공포심을 불어넣는 것도 맹목적 신앙인을 만드는 데 효과적입니다. 그러나 공포심 때문에 믿는 신앙은 자비의 하느님을 배척하는 것으로 온전한 그리스도 신앙의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법정이 아니라 병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심판을 받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치유받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있는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주변에 유독 많은 사람이 조용히 서성이며 기도하는 이유가 비단 거장의 명화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2020-03-1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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