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주 한국청년유권자연맹 운영위원장
‘나는 가수다’라는 제목답게 요즘 보기 드물게 가창력으로 승부를 겨루는 가수들의 모습을 보는 재미와 기대는 한주의 피로까지 말끔히 풀어주는 듯했다. 그동안 이와 유사한 프로그램들이 신인들을 대상으로 한 발굴을 목적으로 했다면, ‘나는 가수다’는 진짜 유명 가수들이 출연하여 경쟁하는 프로의 세계를 보여주는 신선한 기획이었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경합이 진행되고 무엇보다 청중들이 평가단으로 참여한다는 점은 공정사회가 화두인 작금의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분명하여 연출 PD와 방송사의 기획력이 새삼 돋보였다.
그러나 결말에 제작진과 참가자들에 의해 정해진 규칙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졸속으로 새로운 규칙이 만들어지는 장면이 여과 없이 방영되는 걸 보면서 차라리 방송을 보지 말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500명 평가단의 심사결과가 너무도 쉽게 무시당한 채 탈락이 결정된 참가 가수가 가장 선배이고 과거 경력이 화려했다는 이유로 재도전이 결정되는 과정은 이 시대 불공정 사례의 한 표본을 보는 것 같았다.
그동안 이와 유사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기회를 공평하게 주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통해 숨은 인재들이 부상하는 과정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우리에게 희열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이 시대 최고의 프로 가수들이 출연한 프로그램이 오히려 청중 평가단을 한순간 바보로 만들고 전국의 시청자들을 우롱하는 장면은 정말로 실망스러웠고, 이를 기획한 방송사에 대한 신뢰도 추락이 가져다줄 후유증에 속이 상했다.
요즘 우리 신문은 1면부터 7~8면, 더러 10면에까지 일본 대지진 뉴스로 도배하고 있다. 때로는 자극적인 기사도 있고, 때로는 지나치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건 아닌가 할 정도로 일본 지진 뉴스가 열흘이 넘도록 주요 기사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 많은 일본 관련 기사 속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일본 국민의 정부와 공공기관에 대한 높은 신뢰도에 기초한 침착하고 이성적인 대응 자세이다. 어릴 때부터 지진에 대한 대비와 훈련이 몸에 밴 탓이라고 해도 일본국민의 태도에 새삼 감탄하고 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우리나라가 그와 같은 상황에 부닥쳤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자신이 없다. 청와대, 국회, 국정원, 검찰, 경찰 등 정부와 각종 공공기관의 발표를 믿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심지어 명백한 근거자료와 증거에도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우리 사회가 아닌가.
직업병일까.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문득 지금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4월 보궐선거 후보 공천 관련 소란이 연상되었다. 각 정당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유권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투명하고 공정한 경선과정을 통해 후보를 선정하겠다고 큰소리치면서도, 실제로는 정당 지도부와 특정 정파의 입맛에 맞는 후보를 선정하려고 너무도 쉽게 규칙을 바꾸는 건 아닌지 의심받고 있다.
국민이 참여한 경선과정을 통해 후보가 결정되어도 ‘나는 가수다’ 프로그램의 청중 평가단이 그랬던 것처럼 한순간에 무시당하고 전략공천이란 이름으로 유권자의 의사와 상관없는 후보가 결정되는 건 아닐는지. 그래서 유권자들은 바보가 되고 국민은 또다시 정치에 실망하여 등을 돌리게 되는 건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개인과 개인은 물론 정부, 국회, 언론 등 공적 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감 회복이다. 가끔은 우리에게 애초 신뢰란 것이 있기나 했던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우리는 불신의 풍조 속에 사는 것 같다. 대통령의 약속도, 정치지도자의 공약도, 심지어 종교지도자의 말조차 믿지 못하는 극도의 불신 사회를 지난 주말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다시 확인하고 말았다. 우울하고 슬프다.
2011-03-2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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