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2월 11일, 콩나물시루 같은 설 귀성열차 안의 모습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서 있고 선반에는 고향에 가져갈 선물이 든 가방들이 빼곡하게 올려져 있다. 가방을 얹을 곳이 없어 머리에 이고 있는 사람도 보인다. 서울로 올라와 한 해를 힘들게 보내며 돈을 벌었던 지방민들에게 명절의 귀성은 어떤 난관도 뚫어야 하는 연례행사였다. 밤을 새워서라도 기차표를 구해야 했고 아무리 좁아터져도 기차에 올라타야 했다. 한마디로 귀성전쟁이었다.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 귀성 교통수단은 오로지 기차밖에 없었다. 1960년대에 서울역을 통한 귀성객은 하루 10만명이 넘었다. 열차가 도착하면 서로 먼저 타려고 뛰어가다 앞사람이 넘어진 위로 뒷사람들이 덮쳐서 수십명씩 다치는 사고는 명절 때면 늘 있었다. 질서유지를 위해 500명이 넘는 경찰관과 철도 공안원이 동원됐지만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승객들을 통제하기는 불가능했다.
서울의 인구는 계속 늘어 귀성 인파도 해마다 늘어났다. 철도 당국은 명절이면 임시열차를 최대한 늘려 편성했지만 몰려드는 승객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서울역에는 암표상들이 활개를 쳤고 날치기와 자리를 대신 잡아주는 ‘자리잡이’ 등으로 역 구내는 난장판이 되었다. 정원의 서너 배가 넘는 승객을 태워 열차의 스프링이 휘거나 부러져 운행이 중단된 사고도 여러 번 있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서울의 인구는 계속 늘어 귀성 인파도 해마다 늘어났다. 철도 당국은 명절이면 임시열차를 최대한 늘려 편성했지만 몰려드는 승객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서울역에는 암표상들이 활개를 쳤고 날치기와 자리를 대신 잡아주는 ‘자리잡이’ 등으로 역 구내는 난장판이 되었다. 정원의 서너 배가 넘는 승객을 태워 열차의 스프링이 휘거나 부러져 운행이 중단된 사고도 여러 번 있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2013-02-12 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