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현 건국대 신경정신과 교수
“저 자퇴했어요.” 당장 눈에 보이는 학교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어진 덕분에 아이의 표정이 좋아진 것이었다. 아이 엄마도 검정고시를 치거나 대안학교를 보내면 되지 않겠느냐면서 아이가 굳이 싫다는데 보낼 생각이 없다는 의견이었다. 아마도 부모 자신들이 갖고 있는 학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한몫했으리라. 그건 그렇다고 치고, 나는 일련의 과정이 속전속결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와 아이가 학교를 가고 상담을 하며 자퇴에 대해 얘기를 하면 선생님이 심층 면담을 하고, 도와줄 방법을 찾아보면서 시도를 하는 과정을 거치기를 기대했다. 최소한 그 과정이 한두 달은 가리라 여겼다. 그러나 너무 쉬웠다. 그냥 자퇴를 하겠다고 하자, 형식적으로 면담을 하면서 확인하고, 서류를 내고, 그리고 끝이었다는 것이다. 쉬워도 너무 쉽다.
통계를 찾아보았다. 2008년 학업을 중단한 고교생은 질병을 제외하고 3만 769명이었는데, 이는 2006년에 비해 무려 9000명이 늘어난 수였다. 이는 총학생 1000명당 17명에 달하는 무시 못할 비율이다. 그 중에서도 실업계 학교의 자퇴율은 1000명당 30명으로 평균의 2배 가까웠다. 1년에 3만명이면 고교시절 3년이 누적된다고 보면 대략 10만명 정도나 되는 십대들이 학교 밖으로 튕겨져 나와 있는 것이다. 대안학교도 있고 검정고시도 있지만 교육의 트랙 안으로 다시 들어가기란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다.
아이들에게 뭘 하고 싶냐고 물으면 막연히 “돈을 벌고 싶어요.”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압도적이다. 그러고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 생활전선으로 뛰어든다. 주유소, 편의점, 패스트 푸드점으로. 처음 부모가 생각했던 대안학교, 검정고시와는 길이 멀어진다. 아이들의 생각도 일리는 있다. 대학에 들어간다고 뾰족한 희망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다고 취업이 특별히 잘될 것 같지도 않다. 학교에서도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성적 하위권을 깔아주는 아이들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학교는 재미가 없고, 친구도 별로 없고, 교실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은 시간낭비라 여길 뿐이다. 단순하게 생각해 봐도 이런 분위기면 학교에 남아 있는 것이 도리어 손해라고 판단할 만한다.
학교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한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훈련소보다 기본적으로 독립적인 사회인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습득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학교가 아이들을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있고, 학교는 ○○대학 몇 명 입학에만 목을 맨다. 이혼이 급증하자 법원에서 숙려기간을 주었듯이 학교에서 자퇴를 원하는 아이에게 결석일수와 상관없이 고민을 해볼 수 있는 적당한 기간을 재량껏 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 기간에 원인을 다각적으로 알아보고, 상담도 받고, 도움을 받을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무엇보다 어떻게든 현재 겪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겠다는 충동이 가라앉는 데에는 절대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나오기는 쉽다. 그렇지만 돌이키는 것은 많은 대가를 요구한다. 사회와 학교의 관심이 필요한 때다.
2010-06-12 2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