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50주년에 하늘로 떠난 조양호
1차 오일쇼크때 시설·장비 가동률 높여9·11테러 이후 침체기에도 A380 선주문
‘스카이팀’ 창설 등 항공산업 전반 이끌어
2004년 8월 18일 인천국제공항에서 대한항공의 100번째 보잉기 도입을 기념하는 조양호(가운데) 회장.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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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회장이 처음 대한항공에 발을 들인 1974년은 1차 오일쇼크가 한창인 시절이었다. 연료비 부담으로 미국 최대 항공사였던 팬암과 유나이티드항공마저 직원 수천명을 줄일 정도였다. 하지만 조 회장은 선친과 함께 시설과 장비 가동률을 오히려 높였다. 항공기 구매도 계획대로 진행했다. 위기를 기회로 본 것이다. 빠른 판단 덕에 대한항공은 오일쇼크 이후 새로운 기회로 떠오른 중동 노선 진출과 승객을 잡을 수 있었다.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대한항공은 항공기 112대 중 14대를 빼고 모두 자체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조 회장은 비싼 값에 항공기를 팔고, 다시 빌려 쓰는 경영전략으로 유동성 위기에 대처했고 그렇게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넘겼다. 미국 9·11 테러의 영향으로 세계 항공산업이 침체에 빠진 2003년엔 남들의 만류에도 조 회장은 A380 항공기 등을 사들였다. 3년 뒤 세계 항공시장은 회복세로 돌아섰다. 다른 항공사가 새로운 항공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시간, 대한항공은 미리 선주문한 차세대 항공기로 시장을 넓혀 갔다.
국제 항공산업 전반을 주도하고 이끄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제75회 연차총회를 유치한 것도 조 회장의 힘이 컸다. 그가 IATA 최고 정책심의 및 의결기구 위원직을 20년 가까이 역임해서다. 그는 대한민국을 ‘항공산업 변방’이라고 보는 이들을 설득하는 역할을 했다.
조 회장은 2000년대 델타항공, 에어프랑스, 에어로멕시코와 함께 국제 항공 동맹체 ‘스카이팀’(SkyTeam)을 만들어 아시아 지역 신규 항공사들을 영입하기도 했다. 지난해 5월엔 미국 델타항공과의 조인트벤처(JV) 구성에 성공하며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도 했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진해운이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하자 2014년 한진해운 회장을 맡아 경영정상화에 힘썼다. 1조원이 넘는 자금을 지원하고, 사재도 출연했지만 한진해운은 결국 2017년 청산됐다.
조 회장은 기업인인 동시에 한국 스포츠 발전에 힘을 보탠 체육인이었다. 대한항공 그룹 산하에 배구단과 탁구단을 운영하며 2008년 7월 대한탁구협회 회장에 오르기도 했다. 특히 2009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1년 10개월 동안 해외 출장 50번을 다니면서 64만㎞(지구 16바퀴)를 이동했다. 한불최고경영자클럽 회장으로 한국과 프랑스 간 돈독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역할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 훈장을 받는 등 민간외교관으로도 활동했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이영준 기자 the@seoul.co.kr
2019-04-09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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