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경영권 승계’ 큰그림…대한전선은 경영권 포기
재계의 경영권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영 환경, 대기업 오너들의 연령과 건강 등에 비춰 경영권을 차세대에 넘겨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지만 기업들을 둘러싼 외부 여건은 투명하고 합법적인 경영권 승계를 쉽게 허락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기업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에 대한 고민도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웅진·STX·동양그룹 등 재계 30위권 안팎 대기업들의 부실이 수면 위로 떠올라 잇따라 법정관리(기업 회생절차)를 신청하는 등 코너에 몰렸고 다수의 재벌 총수가 횡령·탈세·배임 등의 혐의로 한꺼번에 법의 심판대에 올랐다.
SK그룹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CJ그룹 이재현 회장, 태광그룹 이호진 전 회장, LIG그룹 구자원 회장 등이 현재 구속됐거나 구속집행 정지 상태에 처했다. 동양그룹 현재현 회장도 검찰 수사를 앞두고 있다.
대한전선 오너인 설윤석(32) 사장은 최근 58년 동안 3대에 걸쳐 지켜온 경영권을 내놓게 됐다.
그밖에 경영위기나 개인비리가 불거지지 않은 총수들도 노화·건강 문제 등으로 경영권 승계에 대해 고심하고 있다.
◇ 경영권 승계는 이미 진행 중
삼성그룹은 경영권 승계 작업에 들어갔다.
삼성에버랜드가 제일모직의 패션사업을 인수하기로 하고, 삼성SDS가 삼성SNS를 합병하기로 한 것도 ‘경영권 승계’라는 큰 그림의 일환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의 승계 작업이 다른 그룹에 비해 더 가시화되고 있는 것은 이건희 회장의 건강이 좋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 회장은 10여년전 폐와 관련된 질환으로 수술을 받은 적이 있고 추위·과로는 피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성의 경영권은 이 회장의 외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이어지고 딸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에게도 일부 계열사들의 지분과 경영권이 넘어갈 여지가 있다.
현재 유력한 시나리오는 이재용 부회장이 전자-금융계열을, 이부진 사장이 서비스·화학계열을, 이서진 부사장이 패션·광고계열을 각각 맡는 것이다.
대림그룹은 이준용 명예회장의 장남 이해욱 부회장이 후계 구도를 굳혔다.
CEO스코어에 따르면 대림그룹의 자산 승계율은 지난 8월 말 기준으로 41.05%을 기록한 가운데 이해욱 부회장의 자산승계율이 38.48%로 다른 자녀들보다 높다.
특히 이 부회장은 대림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대림코퍼레이션의 지분을 32.12%를 소유해 이 명예회장(60.96%)에 이어 2대 주주에 올랐다.
지난 8월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한진그룹도 경영권 승계를 위한 사전 작업을 서서히 진행 중이다.
조양호 회장은 5월 주력 계열사인 대한항공 주식 704만주 가운데 211만주를 세 자녀에게 똑같이 분배해 조현아·조원태 대한항공 부사장과 조현민 상무가 1.08%씩 주식을 가졌지만 대한항공은 조원태 부사장이 이끌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조현아 부사장과 조현민 상무는 각각 호텔 사업과 진에어를 맡고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박삼구 회장의 장남인 박세창 금호타이어 영업총괄 부사장이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 지분을 6.96%와 2.75% 보유하고 있다.
◇ 후계 구도, 갈 길 멀다
현대자동차그룹의 후계자로 꼽히는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그룹 경영권을 틀어쥘 지배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정 부회장은 10대 그룹 후계자 가운데 가장 먼저 부회장 직함을 달고 일찌감치 경영 일선에 참여했지만 자산승계율은 33.6%(3조856억원)에 불과하다.
더 핵심적인 것은 현대차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을 이루는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고리에 대한 지배력이 약하다는 점이다.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가 현대차 주식 20.78%를 가진 최대주주이고, 현대차는 기아차의 주식 33.88%를 가진 최대주주이며, 기아차는 다시 현대모비스 주식 16.88%를 보유한 최대주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정 부회장은 이 가운데 기아차 주식 706만1천331주(1.74%)와 현대차 주식 6천445주(0.0001%)를 갖고 있을 뿐이다.
LG그룹의 승계 작업도 상대적으로 더딘 편이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양아들인 구광모(35) LG전자 부장은 아직 직급이 낮고 구 회장이 다른 총수들에 비해 젊고 건강해 승계를 논하기는 이르다는 것이다.
구 회장의 동생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친아들인 구 부장은 2004년 딸만 둘인 구본무 회장의 양자로 입적됐다.
구 부장은 구본무 회장, 구본준 부회장, 구본능 회장에 이어 그룹 지주사인 ㈜LG의 4번째 대주주로 지난달 보유 지분을 4.78%로 0.05%포인트 늘렸다.
부영그룹은 창업자 이중근 회장이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이 회장의 장남 성훈씨는 부영주택 부사장, 차남 성욱씨는 부영주택 전무, 3남 성한씨는 부영엔터테인먼트 사장을 각각 맡았고 외동딸 서정씨는 부영애시앙 스포츠센터 등의 경영에 참여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지분은 이 회장이 갖고 있다.
◇ 전문 경영인 역할 커지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총수가 경영 일선을 떠나있는 대기업에서는 전문 경영인이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SK의 한 관계자는 “(총수 자녀들이) 나이가 어리고 공부도 마치지 않아 경영권 승계에 대해 말하기는 적절치 않다”면서 “법정에서 결론이 날 때까지 SK수펙스추구협의회를 중심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태원 SK 회장의 세 자녀는 아직 학업을 마치지 않았다.
한화는 최대 주주인 김승연 회장에게 약 22%의 지분이 있고 장남 김동관 한화큐셀 전력마케팅실장이 4%, 차남 김동원씨와 삼남 김동선씨가 각각 1.6%를 가졌다.
현재 회사일에 참여하는 2세는 김 실장이 유일하지만 경영 수업을 받는 단계고 한화큐셀 본사가 있는 독일에 거주해 당분간 주요 의사 결정은 비상경영위원회에서 전담할 전망이다.
기업들의 고민은 단순히 비상경영 체제에 그치지 않는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함께 재계 총수에 대한 보다 엄격해진 사법집행, 정부 당국의 전방위에 걸친 조사 등 압박이 이뤄지자 각 대기업들은 대주주 오너가 경영전권을 갖고 책임을 지는 경영방식을 그대로 유지해야 하는지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특히 경영권 승계의 중요한 고리가 되는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규제가 본격 시행되는 시점이어서 기업들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각 그룹 총수들이 나이가 들면 경영권을 승계해야 하는데 국내 법규상으로 정상적인 승계가 어려워 편법·불법을 통한 우회 승계를 모색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기업 현실을 인정하고 경영권 승계를 양성화하려는 고민을 해야 한다”고 전했다.
또 다른 대기업 간부는 “기왕 경영권을 승계한다면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처럼 철저한 경영수업과 함께 복수 후보들이 경쟁토록 하거나 경영능력을 입증하도록 하는 식의 검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