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주는 술 빚는 방법이 대략적으로나마 전해오는 것이 600여가지다.이 가운데 3분의 2가 넘는 420여가지를 직접 재현한 이가 있다.
박록담(朴碌潭·본명 德焄·45)한국전통주연구소장은 우리 술 재현에 18년째 빠져 있다.서울 은평구 지하철 녹번역 근처의 전통주연구소는 입구부터 술익는 구수한 냄새로 코끝이 간질간질하다.
●우리술 420여가지 재현
그의 ‘술방’엔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술독과 500여개의 보관용 작은 술병들,소줏고리(증류기)·용수(술거르는 대바구니)·주합(나들이용 술과 안주통) 등 양조 도구들이 빼곡하다.
우리 술은 이름만 들어도 감흥이 인다.눈꽃이 핀 듯한 백화주(白花酒),연꽃 향기가 은근한 하향주(荷香酒),매실 향에 톡쏘는 맛의 호산춘(壺山春)….지난 1986년 이후 그가 재현한 술이다.“제대로 빚어졌는지는 우리 술의 이름으로 대개 알 수 있지요.”그가 지금까지 빚은 술을 쌀로 환산하면 6t이 넘는다.
이렇듯 그가 우리 술에 빠진 데는 순전히 효심 때문이다.“84년 취직한 이후 술 욕심이 많았던 아버지께 술을 자주 사다드렸지요.하지만 과음한 다음날 숙취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건강을 해치지 않는 술을 찾다가 그만 전통주에 빠졌지요.”
그는 주량이 양주 한병에 이르는 부친(65)을 위해 건강에 좋은 술을 찾아나섰다.당시 실낱같이 이어지던 밀주를 사드렸더니 “술이 참 좋다.어디서 난 것이냐.”며 관심을 보였다.이에 신이 난 그는 우리 술을 찾아 전국을 헤매는 탐주여행을 시작했다.
시골의 할머니들에게 ‘술을 빚어달라.’고 쌀을 미리 보내기도 했고,누룩을 빚고 고두밥을 찌면서 할머니들과 며칠씩 보냈다.그래서 ‘미친놈’이란 소리도 들었고 오해도 많이 받았다.“‘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면서 빚는 술인데 내가 죽고 나면 이 아까운 것을 누가 이을까.’하는 것이 당시 할머니들의 공통된 푸념이었습니다.”
“사라지는 우리 술을 보존하기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술 빚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대학 졸업 이후 2년째 다니던 서울청소년지도육성회도 그만뒀다.
●좋은 전통주는 상품화해야
그가 술을 빚는 데는 타고난 구석이 좀 있었던듯 보였다.무안 박씨 해남파 37대 종손인 그의 집 가양주(家釀酒)는 좁쌀소주.어려서부터 할머니와 어머니가 술빚는 것을 봐왔기 때문이다.
그가 혼자서 빚은 최초 술은 석탄주(惜呑酒).떡을 만들어 술 빚는 방법을 적은 ‘주방문(酒方文)’은 전해 오지만 술은 이미 실전됐다.발효와 숙성이 제대로 되지 않아 6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7번째 성공했다.사과 향기가 감도는 향은 이름 그대로 ‘삼키기가 아까웠다.’당시 촬영차 왔던 모방송 스태프진이 술을 더 달라고 간청해왔다.
이어 동정춘(洞廷春)을 빚었다.개떡으로 밑술을 만드는 동정춘은 물을 전혀 쓰지 않는 것이 특징.물이 없는 탓에 고두밥이 바짝 말라버리는 바람에 서너번 허탕 끝에 ‘조청 빛깔에 자두꽃 향이 나는’ 술을 완성했다.“쌀 1말을 쓰면 청주가 1되 반(2.7ℓ) 정도 나오는 귀한 술이지요.”
하지만 맛과 향이 좋은 전통주가 제대로 대중화되지 못하고 있다.포도주 감별사(소믈리에)에다 일본술 사케 감별사까지 활개치면서 우리 술이 서양에서 들어온 위스키나 포도주보다 저급한 술로 치부되는 게 현실이다.
또 주세법의 규정과 제약도 전통주의 대중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집에서 우리 술을 빚어 마시는 것은 되지만 시장이나 음식점에서 파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지요.좋은 전통주의 상품화를 허용해야 합니다.”그리고 완성된 술의 품질에 대해 검사를 하고,세금을 부과하면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과거,우리 술은 차례와 제사를 위해 집집마다 빚던 가양주가 대부분이었다.하지만 1907년 조선통감부의 주세령에 의해 가양주가 금지됐고,밀주 단속이 거셌다.때문에 당시엔 이웃간에 ‘술있느냐.’는 말 대신 ‘호랭이(호랑이) 있느냐’,‘벽 있느냐’는 등의 은어가 쓰였다고 한다.
이후 쌀의 재고량이 넘쳐난 1987년에서야 비로소 양곡관리법의 규제가 풀렸고,자가양조가 가능하게 됐다.80년 동안 계속된 규제 탓에 전통주의 맥이 서서히 끊어졌고,공장에서 획일적으로 만든 막걸리나 동동주처럼 우리 술은 맛과 향이 좋지 않고 숙취가 남는 술로 인식됐다.그러나 경주 교동법주,안동소주,서울 삼해주처럼 당국의 단속을 피해 제조된 밀주들은 그런 편견을 이겨냈다.
●전통주 전문학교 세우는게 꿈
시중에 나오는 우리 술은 150여가지에 이른다.그도 한때 우리 술의 상업화를 시도했다.하지만 양조법을 전수받고는 사라져버리는 사기와 배신을 몇차례 당했다.“결혼 이후 외식 한번 못한” 그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운영되는 연구소와 탐주 탓에 가정 불화도 잦았다.술에 넌더리를 칠법도 하지만 그의 우리 술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지금도 술빚는 도구들이 보이는 대로 사 모으고 있다.“전통 도구들이 사라지는 게 아깝잖아요.다음에 술 박물관이라도 생기면 기증할 생각에….”
술독에 빠져 사는 인생이지만 그는 정작 술을 못한다.주량은 소주 서너잔.“맛 본 술을 모두 뱉어버립니다.좋은 술만 맛보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술을 맛보는 경우도 많지요.”그의 코끝은 늘 조금 빨갛다.지난 2000년 3월 설립된 전통주연구소의 수강생들이 붙여준 별명은 ‘빨강코’다.
전통주 전문학교를 세우는 것이 그의 꿈이란다.“술빚는 이론과 실습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전문가를 육성하자는 것이지요.정부가 우리 술에 신경을 써야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명주(銘酒)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기철기자 chuli@
사진 손원천기자 angler@
박록담(朴碌潭·본명 德焄·45)한국전통주연구소장은 우리 술 재현에 18년째 빠져 있다.서울 은평구 지하철 녹번역 근처의 전통주연구소는 입구부터 술익는 구수한 냄새로 코끝이 간질간질하다.
●우리술 420여가지 재현
그의 ‘술방’엔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술독과 500여개의 보관용 작은 술병들,소줏고리(증류기)·용수(술거르는 대바구니)·주합(나들이용 술과 안주통) 등 양조 도구들이 빼곡하다.
우리 술은 이름만 들어도 감흥이 인다.눈꽃이 핀 듯한 백화주(白花酒),연꽃 향기가 은근한 하향주(荷香酒),매실 향에 톡쏘는 맛의 호산춘(壺山春)….지난 1986년 이후 그가 재현한 술이다.“제대로 빚어졌는지는 우리 술의 이름으로 대개 알 수 있지요.”그가 지금까지 빚은 술을 쌀로 환산하면 6t이 넘는다.
이렇듯 그가 우리 술에 빠진 데는 순전히 효심 때문이다.“84년 취직한 이후 술 욕심이 많았던 아버지께 술을 자주 사다드렸지요.하지만 과음한 다음날 숙취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건강을 해치지 않는 술을 찾다가 그만 전통주에 빠졌지요.”
그는 주량이 양주 한병에 이르는 부친(65)을 위해 건강에 좋은 술을 찾아나섰다.당시 실낱같이 이어지던 밀주를 사드렸더니 “술이 참 좋다.어디서 난 것이냐.”며 관심을 보였다.이에 신이 난 그는 우리 술을 찾아 전국을 헤매는 탐주여행을 시작했다.
시골의 할머니들에게 ‘술을 빚어달라.’고 쌀을 미리 보내기도 했고,누룩을 빚고 고두밥을 찌면서 할머니들과 며칠씩 보냈다.그래서 ‘미친놈’이란 소리도 들었고 오해도 많이 받았다.“‘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면서 빚는 술인데 내가 죽고 나면 이 아까운 것을 누가 이을까.’하는 것이 당시 할머니들의 공통된 푸념이었습니다.”
“사라지는 우리 술을 보존하기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술 빚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대학 졸업 이후 2년째 다니던 서울청소년지도육성회도 그만뒀다.
●좋은 전통주는 상품화해야
그가 술을 빚는 데는 타고난 구석이 좀 있었던듯 보였다.무안 박씨 해남파 37대 종손인 그의 집 가양주(家釀酒)는 좁쌀소주.어려서부터 할머니와 어머니가 술빚는 것을 봐왔기 때문이다.
그가 혼자서 빚은 최초 술은 석탄주(惜呑酒).떡을 만들어 술 빚는 방법을 적은 ‘주방문(酒方文)’은 전해 오지만 술은 이미 실전됐다.발효와 숙성이 제대로 되지 않아 6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7번째 성공했다.사과 향기가 감도는 향은 이름 그대로 ‘삼키기가 아까웠다.’당시 촬영차 왔던 모방송 스태프진이 술을 더 달라고 간청해왔다.
이어 동정춘(洞廷春)을 빚었다.개떡으로 밑술을 만드는 동정춘은 물을 전혀 쓰지 않는 것이 특징.물이 없는 탓에 고두밥이 바짝 말라버리는 바람에 서너번 허탕 끝에 ‘조청 빛깔에 자두꽃 향이 나는’ 술을 완성했다.“쌀 1말을 쓰면 청주가 1되 반(2.7ℓ) 정도 나오는 귀한 술이지요.”
하지만 맛과 향이 좋은 전통주가 제대로 대중화되지 못하고 있다.포도주 감별사(소믈리에)에다 일본술 사케 감별사까지 활개치면서 우리 술이 서양에서 들어온 위스키나 포도주보다 저급한 술로 치부되는 게 현실이다.
또 주세법의 규정과 제약도 전통주의 대중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집에서 우리 술을 빚어 마시는 것은 되지만 시장이나 음식점에서 파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지요.좋은 전통주의 상품화를 허용해야 합니다.”그리고 완성된 술의 품질에 대해 검사를 하고,세금을 부과하면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과거,우리 술은 차례와 제사를 위해 집집마다 빚던 가양주가 대부분이었다.하지만 1907년 조선통감부의 주세령에 의해 가양주가 금지됐고,밀주 단속이 거셌다.때문에 당시엔 이웃간에 ‘술있느냐.’는 말 대신 ‘호랭이(호랑이) 있느냐’,‘벽 있느냐’는 등의 은어가 쓰였다고 한다.
이후 쌀의 재고량이 넘쳐난 1987년에서야 비로소 양곡관리법의 규제가 풀렸고,자가양조가 가능하게 됐다.80년 동안 계속된 규제 탓에 전통주의 맥이 서서히 끊어졌고,공장에서 획일적으로 만든 막걸리나 동동주처럼 우리 술은 맛과 향이 좋지 않고 숙취가 남는 술로 인식됐다.그러나 경주 교동법주,안동소주,서울 삼해주처럼 당국의 단속을 피해 제조된 밀주들은 그런 편견을 이겨냈다.
●전통주 전문학교 세우는게 꿈
시중에 나오는 우리 술은 150여가지에 이른다.그도 한때 우리 술의 상업화를 시도했다.하지만 양조법을 전수받고는 사라져버리는 사기와 배신을 몇차례 당했다.“결혼 이후 외식 한번 못한” 그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운영되는 연구소와 탐주 탓에 가정 불화도 잦았다.술에 넌더리를 칠법도 하지만 그의 우리 술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지금도 술빚는 도구들이 보이는 대로 사 모으고 있다.“전통 도구들이 사라지는 게 아깝잖아요.다음에 술 박물관이라도 생기면 기증할 생각에….”
술독에 빠져 사는 인생이지만 그는 정작 술을 못한다.주량은 소주 서너잔.“맛 본 술을 모두 뱉어버립니다.좋은 술만 맛보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술을 맛보는 경우도 많지요.”그의 코끝은 늘 조금 빨갛다.지난 2000년 3월 설립된 전통주연구소의 수강생들이 붙여준 별명은 ‘빨강코’다.
전통주 전문학교를 세우는 것이 그의 꿈이란다.“술빚는 이론과 실습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전문가를 육성하자는 것이지요.정부가 우리 술에 신경을 써야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명주(銘酒)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기철기자 chuli@
사진 손원천기자 angler@
2003-11-10 1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