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장] 돌도끼와 인터넷

[대한광장] 돌도끼와 인터넷

김규항 기자 기자
입력 2000-04-29 00:00
수정 2000-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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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지하철로 한강을 건널 때 내 왼편에 앉은 중년아주머니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세상 정말 좋아졌어요.한강을 이렇게 쉽게 건너다니”.뭔가대꾸를 해야 겠지만 딱히 할 말도 없고 해서 잠자코 있는데,내 오른편에 앉은 중년아저씨가 아주머니를 향해 말했다.“죽은 사람들만 불쌍하지요.이렇게 좋은 세상 못 보고”.두 사람의 대화는 점차 고조되어 나름의 문명예찬으로 발전하고 있었다.하릴없이 지하철에 몸을 맞기고 한강을 건너던 사람들은 심심풀이를 찾은 듯 두사람을 주목하고 말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두사람을 보았다.그러나 내 눈에 비친 두사람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대개의 한국인들이 그렇듯 여유없고 고단한 일상에 찌든 그들의 모습과 행복에 겨워 하는 그들의 대사는 영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두사람은 행복에 대한 가치기준을 좀 희한하게 갖고 있는 듯 싶었다.

물론 행복에 대한 그 희한한 가치기준은 박정희가 심어준 것이다.

이른바 박정희의 경제개발(정확하게 말하면,박정희 재임기간에 한국 노동자들의 비참한 희생으로 이루어진 경제개발)의 핵심은 물질적 재화를 늘리기위해 정신적 재화를 생략하는 것이었다.그 기간동안 물질부문의 성장은 분명한 데가 있지만(구제금융 사태의 원인을 그 기간동안의 성장논리에서 찾기도 하지만) 그 물질적 성장을 위해 치러진 우리사회 성원 전체의 정신적 지체가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사회를 괴롭힐 것인가를 생각할 때 그 경제성장의의미를 막연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얼마전 NHK에서 만든 박노해의 다큐멘터리를 봤다.나는 오늘 박노해가 전혀 새롭지 않은 얘기들을 얼기설기 엮어 우리사회의 미래비전인 양 강변하는일을 측은하게 생각하는 편이지만 일본인들이 보는 박노해는 어떤가 싶어 채널을 고정시켰다.박노해는 클로즈업된 얼굴로 말했다.“내가 알고 싶은 건이 지구 대변화의 시대에 정말 인간답게 사는 법이 무언가 하는 것입니다.저는 정말 그걸 알고 싶습니다”.반짝이는 눈동자로 정말 궁금해 죽겠다는 듯말하는 박노해를 보며 나는 속으로 되내였다.“바보군”.

유명 전직 혁명가 박노해는 알고 보니 내가 지하철에서 만난두 사람(사실기성세대의 대다수가 이렇다)이 그렇듯 박정희가 만든 정신 지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이었다.생각해 보라.인간답게 사는 법이 변하는가.세상에는 늘 변하는 게 있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게 있다.

인간답게 사는 법은 우리가 돌도끼를 들고 공룡과 싸우던 시절이나 지하철로 한강을 건너는 시절이나 인터넷으로 세계를 누비는 시절이나 다르지 않다.인간답게 사는 법은 그저 양심을 지키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회 속에서 파악하는 단순한 일인 것이다.문제는 그 단순한 일이 물질문명의 발전에아랑곳없이 무척 어렵다는 점일 게다.

온 나라가 인터넷 세상을 외치고 인터넷이 우리에게 낙원을 가져다 줄 것처럼 얘기한다.물론 인터넷은 우리에게 분명한 편리를 준다(내가 프랑스 파리에 있는 홍세화 선배와 아무때나 편지를 주고 받을수 있는 것도 다 인터넷덕분이니까).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낙원을 가져다줄 거라는 얘기엔 박정희의 환영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물질문명의 발전은 단지 도구의 변화일 뿐이며 그런 도구의 변화가 가치의변화를 낳는 건 아니다.이를테면 고향의 노부모에게 종이로 편지를 쓸 때 효심이 없던 사람이 이메일로 편지를 쓴다고 해서 없던 효심이 저절로 생겨나는가.

인터넷이 우리에게 낙원을 줄 거라는 이야기는 실은 인터넷을 통해 돈을 벌려는 장사치들의 선전일 뿐이다.박정희의 성장논리와 그에 대한 온 국민의동의와 희생이 결국 몇몇 장사치들을 배불리는 일로 귀결되었 듯 말이다.

◆金 圭 恒 아웃사이더 편집.
2000-04-29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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