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에 보는 베델의 한국사랑

3·1절에 보는 베델의 한국사랑

허남주 기자 기자
입력 1999-02-27 00:00
수정 1999-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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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창간된 순수 민족정론지 대한매일신보의 사장 베델(裵說)과 신채호등 항일언론인들이 펼친 구국운동이 TV영상을 통해 조명된다.3·1절 80주년을 맞아 KBS 1TV ‘역사스페셜’(토 오후 8시10분)은 ‘3일간의 재판-영국인 베델을 추방하라’를 특집으로 내보낸다.재판은 AP통신에서 특파원을 보낼정도로 국제적 화제를 모았다.이 프로는 90여년 전 서울 정동 주한 영국총영사관에서 3일동안 계속된 공판장면을 재현함으로써 시작된다.‘국내 최초의국제재판’이었던 당시 재판의 피고는 베델이었고 죄목은 ‘한국민 선동죄’였다.

이에 앞서 대한매일신보는 1905년 11월20일 을사보호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된 직후 황성신문에 장지연의 명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이 실리자 같은달 27일 이를 영문으로 번역,호외를 발행하는 등 민족의 소리를 대변했다.당시 1만 3,256부로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했고 영문판까지 있어 국내는 물론 국제여론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베델은 영국인이라는 점을 최대한 활용,신문의 치외법권적 지위를 확보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베델이 한국에 온 것은 1904년 2월.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특별통신원자격이었다.‘경운궁의 화재’를 특종보도했던 그는 양기탁 신채호 박은식등 지사적 언론인들과 자주 접촉하다 스스로도 항일 정신을 갖게 됐다.

이런 사실은 일본과 영국의 외교문서에 기록된 베델의 흔적을 추적한 결과확인됐다.자료들은 베델의 ‘처리’를 놓고 영·일 간에 빚어진 외교적 마찰과 베델의 한국 밖 추방결정 과정 등을 알려준다.

담당연출자 김형석PD는 취재과정에서 베델의 한국사랑과 선각자들의 활동에 “감탄했다”면서 “프로그램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프로제작 때 가장 신경을 기울인 부분은 법정의 재현 장면.법정에서 시작해 법정에서 끝나기 때문에 자칫 ‘재미’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였다.

이를 위해 버츄얼 스튜디오(가상공간)에서 진행자가 3자적 관점으로 재판을지켜보는 연극적 방식을 채택,시청자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했다.피고석의베델은 사실감을 더하기 위해 연기자 대신 확대한 사진을 활용했다.

베델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도 공개된다.1909년 베델이 서울에서 숨지자 한국인들이 보낸 조문편지 묶음 등이 그 것.편지에는 유림과 농부,동경유학생 등 각계각층의 애통해 하는 마음이 절절이 배어있다.

취재 뒷이야기도 많다.베델의 며느리 도로시여사(82)는 시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도로시여사는 당초 ‘촬영 절대불가’를 조건으로 취재에응했다.

이에 따라 김PD는 카메라 뚜껑도 열지 못했으나 이튿날 도로시여사의 자녀들이 찾아와 “할아버지를 많이 알지 못해 안타깝다”면서 도로시여사를 설득해 비로소 촬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PD는 “베델은 ‘한국의 쉰들러’라는 표현외에 달리 형언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許南周yukyung@
1999-02-27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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