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언내언] 丹齋 63주기

[외언내언] 丹齋 63주기

김삼웅 기자 기자
입력 1999-02-22 00:00
수정 1999-0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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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齋 申采浩선생 63주기 추도식이 일요일인 21일 서울 종로 선학원에서 유족과 독립운동가,단재 연구가 등 50여명이 모여 조촐하게 거행되었다.선학원은 한때 萬海 韓龍雲선생이 기거하던 곳으로 단재와는 연이 닿는 장소이기에이날 추도 모임은 더욱 새로운 의미를 주었다. 단재 선생은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에서 8년을 복역하다가 56세인 1936년 뇌일혈로 눈을 감았다.8년째 옥고를 치르다 건강이 악화되자 악독한 일제도 적당한 보호자만 있으면 병보석해주겠다고 했으나 친일파의 신세를 지기싫다며 단연 이 제의를 거절했다.청사에 빛나는 민족적 절개요,의지라 하겠다. 일화 중 세수하는 모습은 일품이다. 그가 추운 겨울에도 세수를 할 때에는꼿꼿이 앉아서 손으로 물을 낯에 바르기 때문에 소매로 물이 흘러들어가 저고리 소매를 적시면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고 한다.까닭을 물으면“동서남북 왜놈 천지인데 어느 쪽으로 머리를 숙이겠느냐”란 대답이었다.

베이징(北京)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단재는 생계비를 위해 ‘중화보’(中華報)에 쓰던 논설을 신문사에서 조사에 불과한‘의(矣)’자 한자를 고쳤다고해서 연재를 거부하여 사장이 찾아와 사과했지만 끝내 뜻을 바꾸지 않았다.

글쓰기에 이처럼 철저했던 분이기에‘조선상고사’ ‘독사신론’ ‘조선사연구초’등 민족사학의 금자탑과 같은 저술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단재는 1908년‘대한매일’의 전신‘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재직하면서‘일본의 3대 충노(忠奴)’란 논설에서 宋秉畯 趙重應 申箕善 등 당대의 세도가 3인을 일본의 충노라고 정면에서 비판했다.그가 아니면 쓰기 어려운 글이었다. 추도식장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李圭昌옹은 단재의 베이징 망명생활을회상하면서 목이 메었다.삼순구식(三旬九食)의 기한에도 굽히지 않고 독립을 위해 애쓰던 단재를 기억하는 노(老)애국지사의 오열에서 선생의 기개를 거듭 살피게 된다.

단재는 베이징 망명 시절‘텬고(天鼓)’란 한문잡지를 발간했다.어렵사리 1·2권을 입수하여 틈틈이 번역하면서 그의 역사관과 애국정신 앞에 가슴 설렌다.6권까지 발행된 이 잡지는 현재 중국 베이징대학도서관에 보관돼 있다.식민사관으로 오염된 우리 역사가 최근 단재사학이 중심이 되는 민족사관으로 바뀌고 있는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다행한 일이다. 추도식장에서 누군가 일제시대 3인의 ‘고집쟁이’로 단재와 한용운,心山金昌淑선생을 들면서 그들이 있었기에 식민지시대 백성이 그나마 위안을 얻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김삼웅 주필

1999-02-22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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