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퇴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2)

고종 퇴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2)

김재영 기자 기자
입력 1998-10-30 00:00
수정 1998-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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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승계 강제성 통렬히 고발/황제대리조칙 반박/수차례 논설로 따져/고종 도쿄친행 거부/헤이그밀사 자결 등 호외로 대내외 알려

1907년 7월19일 고종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황태자에게 양위하는 형식이었지만 실제는 일제와 이에 빌붙은 친일파 내각에 의해 축출당한 것이었다.창간 때부터 고종 황제와 각별한 관계였던 대한매일신보는 고종 퇴위의 강제성을 정면으로 지적하며 이의 부당함을 거세게 따졌다.

을사늑약(勒約)후 2년도 안돼 이뤄진 고종 퇴위는 고종의 헤이그(海牙) 밀사 파견과 관련이 깊다.고종은 일제의 한국 침탈 실상과 조약의 무효함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자 李相卨 李儁 李瑋鍾 등 3인의 밀사를 네덜란드 헤이그의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보냈다.고종의 친서를 휴대한 밀사들은 6월25일 헤이그에 도착했으나 일본,영국 등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으며 밀사 이준은 울분 끝에 현지에서 분사(憤死)했다.

고종은 대한제국 제위에 오르면서 강한 배일주의 성향을 보여왔다.일본은 밀사 파견을 고종 퇴위의 호기로 보고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 대신들을 앞세워 고종을 핍박했다.7월18일 고종은 내각의 섭정추천 요청을 거부했으나 19일 황태자 대리 조칙을 내린 뒤 20일 양위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한일신협약(7월24일),군대해산(8월1일)으로 이어지는 1907년 7월의 급박한 정세 속에서 대한매일은 그간 높이 쳐들어온 반일의 기치에 한 가닥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 매섭게 필봉을 휘둘렀다.

7월4일 논설을 통해 “해아 평화회담에서 일본인의 잔학을 호소하려는 한국의 제의가 배척됐지만 한국인은 실망하지 말고 자주독립의 대목적을 이루기 위해 한층 힘써야 한다”고 격려했고 7월9일에는 “한국이 자국의 명운을 국제 중재에 위탁하기에는 열강의 태도로 보아 시기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면서 “이번에 한국 파견인이 거절된 것을 길조로 여길 수 있다”고 국민들을 위무했다.

이완용의 잦은 통감부 방문을 주시하면서도 일제의 고종 퇴위 속내를 알아채지 못했던 대한매일은 16일 일본報知신문 기사를 전재해 처음으로 이에 대한 경각심을 높인다.이 일본 신문은 “한일협약을근저에서 짓밟은 한국 황제를 폐하든지,일본으로 불러 사죄케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이에 대한매일은 18일 ‘일본 신문의 무례를 반박한다’라는 장문의 논설로 강경하게 맞섰다.

“일본 신문이 논하는 구절구절이 해괴하고 통탄스럽기 짝이 없다”면서 “한국에 대해 일본 사회와 언론의 마음 속에는 병탄 외에는 어떤 생각도 없다”고 갈파했다.그런데 이같은 논설을 내보낸 대한매일은 같은 날 몇시간 후 “황제가 대신들의 섭정추천,동경친행 사과 요구를 거절했으며”“해아밀사 이준이 忠憤을 이기지 못해 자결,만국 사신들 앞에 뜨거운 피를 뿌렸다”는 내용의 호외를 뿌리게 된다.

만 하루가 지난 19일 낮 대한매일은 다시 호외를 냈는데 ‘황제께서 황태자에게 대리를 명하는 조칙을 내렸다’는 소식이었다.황제가 하룻만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이 호외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대한매일이 조칙에 바로 잇대어 “이 조칙 반포가 황제의 뜻에 따른 것인지 아닌지 일반의 주목거리이나 이 사건이 외인의 강핍과 대신들의 위협으로 된 것은 세상 사람이다 알 바”라고 쓴 점이다.

조금도 곁눈질하지 않고 즉각 고종 퇴위의 강제성을 적시한 것이다.대한매일은 20일 ‘이등후’,21일 ‘대리역사’,25일 ‘禪位’,28일 ‘선위속론’등의 논설을 잇따라 써내면서 퇴위가 외부의 강박에 의해 이뤄졌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이 와중에서도 대한매일은 만국회의 기자회견에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연설로 큰 갈채를 받은 밀사 이위종을 한국에 희망을 주는 청년으로 극찬했다(19일).또 한일신협약으로 “한국의 독립이 흔적도 없어졌다”고 한탄하면서도 “한국인이 한국의 이익을 위해 자치하는 일이 생겨날 수도 있다”는 희망 또한 피력해 마지 않았다.(27일).<金在暎 기자 kjykjy@seoul.co.kr>

◎사설 ‘선위속록’/“왕실의 대리와 선위… 핍박과 위협으로…”

대한매일은 고종 퇴위에 관해 여러 차례 사설을 썼다.이 중 7월28일자 ‘선위속론’의 주요 부분을 발췌한다.

무릇 황위의 전해짐과 물려줌은 천하대사라 동서고금 역사가 이에 관해서는 한층 근엄한 필법으로 사실에 준거해 곧게 쓰는 것을 공리로 하고 있고 이것이 역사가의 정당한 의무로다.

한국 황실의 대리와 선위라는 큰 사건이 일주일도 안되는 사이에 이뤄졌다.외인의 강한 핍박과 내각 제대신의 위협적인 요청에 의한 것은 일반 세상 사람들이 다 잘 알고 있는 바이다.특히 선위에 있어 내각 대신의 한층 괴이하고 해괴한 행동에 관한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으니 모든 세계 인사와 대한 신민은 이로부터 눈을 돌리지 말고 가슴에 새겨 잊지 말지어다.

선위가 논해질 무렵 아직 조칙이 내려지지 않아 실시할 수 없다고 어느 원로 대신이 지적하자 농공상대신 송병준은 이렇게 하면 어떻고 저렇게 하면 어떻단 말이냐며 벌컥 화를 내면서 그 원로를 포박하려 하니 그 사람이 황겁공포하여 신도 신지 못하고 도망쳤다고 한다.

또 박영효가 이완용 총리를 면전에서 격렬하게 반박하자 다음날 그를 포박했으며 내관 이병정이 이총리에게 30년 동안 임금을 섬긴 대감은 군신의 의리가 있고 부자와 같은 은공을 입었는데 오늘 이같은 짓이 대감의 성공이라 할 수 있겠느냐고 꾸짖자 그 역시 경무청으로 끌고가 가두었다더라.

이런 사실은 모두 너무 잘 드러나서 숨길 수도 없어 세계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되고 붓을 든 사가가 대서특필하지 않을 수 없다.<金在暎 기자>
1998-10-30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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