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오늘 창립 30돌… 그 발자취와 현주소

KIST/오늘 창립 30돌… 그 발자취와 현주소

신연숙 기자 기자
입력 1996-02-10 00:00
수정 1996-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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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과기 산업화 경제도약 뒷받침/연구수행 6,184건… 아라미드섬유 개발 등 개가/5공땐 KIST에 통폐합·연구기능 박탈 위기도/모방·개량 탈피… 원천기술 연구로 재도약 모색

국내 최초의 정부출연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원장 김은영)이 10일로 창립 30주년을 맞았다.한국과학기술연구원은 이날 상오 10시 연구원내 존슨강당에서 기념식등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갖는 한편 2000년대를 바라본 웅비계획인 「KIST 장기비전」을 통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세계 초일류 종합연구기관으로서 도약을 다짐하고 있다.

KIST는 1966년 2월10일 과학기술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산업계에 필요한 산업기술개발과 기술지원이라는 사명을 갖고 설립됐다.당시 국민소득 1백25달러,국민총생산 2억5천만달러이던 시대에 정부는 1천만달러라는 거금을 연구소에 서슴없이 투자할 만큼 전폭적인 지원을 보냈다.

KIST의 과학자들은 국민적인 기대에 부응해 밤잠을 자지 않고 선진기술을 국내에 전수시켰으며 6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개발의 연대」에 산업기술개발을통한 공업현대화를 뒷받침하고 과학기술기반을 확충하는데 기여함으로써 경제성장과 과학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다.

또 경제발전이 궤도에 오른 80년대부터는 차세대 첨단기술 개발에 나서 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뒷받침하고 있다.

30년동안 KIST가 개발에 성공한 기술은 인체에 무해한 최적의 석면대체 섬유로 97년부터 4억달러 규모의 세계시장에 도전할 아라미드섬유를 비롯,오존층 파괴물질인 CFC의 대체물질,다이아몬드 카본코팅 VCR헤드드럼,니켈·크롬·텅스텐을 주원료로 한 초내열 합금,공업용 다이아몬드 합성,항생제 네틸마이신 합성,인공신장용 막형 혈액투석기,인공수정체 개발등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다.

그동안 연구수행과제 건수만 6천1백84건,기업화된 기술이 6백95건에 이르며 산업재산권 출원 1천7백83건,발표논문 4천2백39편등의 성과를 올렸다고 KIST는 집계하고 있다.

KIST는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으면서도 연구원처우와 연구소운영은 자율적으로 시행한 새로운 개념의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첫 모델로서 국내 산업계의 수요에 따라 해당분야 전문연구기관을 분화시켜 나감으로써 많은 연구소 설립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KIST가 영광의 세월만을 보낸 것은 아니다.국방기술등 한국의 기술자립의지를 희생하고 미국에 접근한 5공정권 아래서 KIST는 한국과학원과 통폐합돼 이름이 없어지는 비운을 겪기도 했으며(81년∼89년),6공시절인 92년 재차 시도된 정부출연연구소 통폐합과정에서는 연구기능이 없어질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다.5·6공시절의 10년은 KIST발전이 발목을 잡힌 시련의 시기였으며 이는 곧 정부출연연구소를 비롯한 국내 과학기술계 전체의 위상이 곤두박질친 시기로 평가된다.

KIST가 탄생 30돌을 즈음해 채택한 장기비전은 이같은 과거의 손실을 복구하고 나아가 21세기 첨단산업사회를 대비하기 위한 도약의 다짐으로 볼수 있다.KIST 장기비전은 기존의 모방개량기술에서 탈피,원천기술 개발을 지향함으로써 2000년대까지 세계 초일류 기관인 일본의 이화학연구소,미국의 아르곤연구소,독일의 막스 프랑크연구소와 같은 국가를 대표하는 연구소로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개혁은 연구소 의지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다.여기서 정부와 고위 정책결정자들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변수중의 하나가 된다.

KIST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김은영원장은 『연구원들은 연구소내에서 저녁식사가 일상화됐을 정도로 연구분위기가 성숙돼 가고 있다』면서 『KIST육성특별법 제정등에 국가차원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털어 놓았다.<신연숙기자>

◎「한국두뇌의 요람」 어떤 인물 거쳐갔나/전문인력 3천6백명 산·학·연 맹활약

KIST는 한국의 꿈과 희망을 양어깨에 걸머졌던 국가 종합연구기관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지난 30년동안 내로라하는 「한국의 두뇌」들이 모여들었던 곳이다.

KIST 설립작업을 맡았던 최형섭박사(전과기처장관,산업과학기술연구소고문)는 국내는 물론 미국 등지로 날아가 우수한 과학자들을 끌어모았다.

그동안 KIST가 국내 산업계·학계·연구소에 배출한 고급 과학기술인력은 3천6백명에 이른다.국방과학연구소에서 미사일개발을 맡았던 이경서박사(국제화재 해상보험 부회장),국내 반도체기술의씨앗을 뿌렸던 정만영박사(금호그룹 고문),콩박사로 유명한 권태완박사(인제대 교수),한국기계연구소장을 지냈던 김훈철박사(한국기계연구원 연구위원) 등은 대표적인 유치과학자로 꼽힌다.

초창기 유치과학자들은 대학교수의 3배가 넘는 급여,구내아파트 제공 등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이들 중에서도 이용태박사(삼보컴퓨터 회장),성기수박사(동명정보기술대 총장),경상현박사(전 정통부장관)등 당시 컴퓨터센터 「삼총사」는 국내 전자통신 기술의 선구자로 지금도 학계와 업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밖에도 KIST출신 인사들로는 산업계에 여종기LG중앙연구소소장,이주형삼성전자전무,허수웅대륙정밀사장,안영옥OLIN사장,황규복한국부가통신회장 등 5백여명이 있다.

학계에는 전무식한국과학기술원석좌교수,유성재 중앙대교수,이동영서울대교수,김재관인천대교수,김춘수단국대교수,배무이대교수 등 9백명이 있고 연구계에 채영복한국과학기술한림원사무총장,한문희·민태익전생명과학연구소장 등 1천8백명이나 포진돼 있다.<신연숙기자>

◎KAIST와 어떻게 다른가/KIST<한국과기연구원> 연구개발이 주목적·서울 소재/KIAIST<한국과학기술원> 석­박사 교육기관·대덕 소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구별할 줄 알면 그 사람은 과학기술계에 정통하다고 자부해도 좋다.그만큼 두 기관을 놓고 어느게 어느 것인지 헷갈리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KIST는 66년 「KIST」육성법에 의해 산업기술연구기관으로 설립됐다.5년뒤인 71년에는 과학기술 인력양성의 필요성이 제기돼 석·박사 교육기관으로서 한국과학원(KAIS,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이 설립됐다.

두 기관은 81년 5공정권에 의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란 이름으로 강제 통폐합된다.이때 「한국과학기술원법」은 남고 「KIST육성법」은 자연스레 소멸됐다.

하지만 첨단 산업기술이 일본등을 통해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첨단 원천기술을 개발하는 종합연구소 설립의 필요성이 재인식되기 시작했다.KAIST안에 「연구본부」를 차려 싹을 키우던 연구조직은 마침내 87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란 이름을 찾아 독립하게 된다.

그러나 「KIST 육성법」은 복원되지 않았다.이것이 KIST가 KAIST에 대해 피해의식을 갖게되는 한 대목이다.

두 기관은 이름이 비슷할 뿐 아니라 경쟁하는 측면도 많다.KAIST는 교육기관이면서도 여느 대학과 마찬가지로 연구개발도 활발히 하며,KIST는 연구기관이긴 하지만 4백여명의 석·박사 학위과정 연구생을 받아들여 「서로 비슷해지고」 있다.

더욱이 KIST가 새로 바뀐 교육법에 따라 단설대학원을 설립하게 되면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KAIST에 비해 서울이라는 유리한 입지조건으로 우수한 학생들을 확보할수 있게 돼 요즘 두 기관의 신경전이 한창이다.

어쨌든 같은 정부출연기관으로서 「경쟁과 협조」관계에 있는 두 기관이 가장 싫어 하는 것은 상대방의 이름으로 잘못 불리는 일이다.영문으로 넉자인 KIST는 한글로는 아홉자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영문으로 다섯자인 KAIST는 한글로는 일곱자인 한국과학기술원이어서 『영문으로는 짧은게 한글 이름으로는 길더라』는 한 언론계 인사의 구별법이 참고가 될수 있을 것 같다.<신연숙기자>
1996-02-1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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