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3)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3)

나윤도 기자 기자
입력 1993-03-30 00:00
수정 1993-03-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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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신과 한국문학/신춘문예 첫 도입… 민족문학 일궈/민간지발간속 유일한 작품발표 무대로/일 소설번안 「장한몽」,장안의 화제 4개월/한글보급 위해 소설 연재… 이광수 등 숱한 문재 배출

1904년 7월18일 창간된 대한매일신보가 항일구국언론 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대로다.그 뒤를 이은 매일신보는 부정적 측면이 강하긴 했지만 우리나라 신문학 발전에 기여한 업적은 긍정적으로 평가될수 있다.

○문학전문기자 채용

특히 매신이 유일한 우리말 신문으로 존재한 시기는 주목되는 대목이다.1910년대의 일제 무단통치 10년간과 1940년부터 해방직전 5년간 우리문화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우리문학의 최종 수호자 역할을 다 해냈던 것이다.

이는 총독부기관지였던 매신이 정치기사등으로는 독자의 관심을 끌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비롯되긴 했다.학예기사에 중점을 두는 편집방침은 자연히 문학쪽에 비중을 둘수 밖에 없었다.그래서 신춘문예제도를 최초로 시도하는 한편 문학전문기자를 채용했다.그리고 독자문예란을 만들어 일반독자들의 글쓰기를 적극 장려하는등 문학발전을 위해 매신이 기울인 노력은 대단한 것이었다.더욱이 일제가 모든 민간지들을 강제 폐간시키고 한민족의 문화와 언어를 말살시키기 위한 정책을 펴는 시기의 매신은 유일한 한글신문이기도 했다.

당시 매신은 우리작가들에게 작품발표의 기회를 제공한 유일한 신문이었다.이인직 조중환 이해조 이상협 이광수 민태원 윤백남등 1920년대 이전부터 소설을 발표해온 작가들이 자주 등장했다.20년대 이후에 나온 이서구 이효석 염상섭 김동인 최서해 최정희 방인근 이상 박태원 전영택 박종화 박영준 장덕조 박계주 채만식 정비석 김내성등 초창기 우리문학의 대가들도 매신을 통해 작품활동을 해왔다.이러한 일련의 사실은 매신이 우리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가늠케 해주고 있다.

한말에서 일제시대에 걸치는 동안 대부분의 언론인들은 문인으로도 활약했다.또 문인치고 언론계에 몸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언론인과 문인은 동일시 되었다.최준교수(전중앙대)는 그의 「한국신문사」에서 구한말에 창간된 민간신문들이 한글보급 차원에서 신문연재소설을 다투어 싣게됨에 따라 신문과 신문학이 뗄래야 뗄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연재후 단행본 펴내

우리 국문학사에서 최초의 신소설로 알려진 이인직의 「혈의 누」도 저자가 만세보 주필로 있으면서 1906년 7월22일부터 10월10일까지 이 신문에 연재했던 작품이다.구한말 민간신문들의 신소설연재는 신문학운동이라는 목적의식에서 보다는 신문제작의 한 방편이었다고 볼수 있다.따라서 기자들이 쓰기 시작한 신소설은 처음에는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무기명이거나 이름을 밝히더라도 본명이 아니고 필명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최초의 소설형태 글은 1905년 11월17일자에 실린 3면5단의 「소경과 앉은뱅이 문답」이다.이글은 12월13일까지 실렸으며 그 다음날부터는 「이태리국 아마치전」이 시작돼 21일까지 계속되었다.그러나 정식으로 소설이라는 이름이 붙은 글은 이듬해인 1906년 2월6일자 3면4단의 「청루의녀전」이었다.이 소설은 12차례 연재된뒤 2월18일자에서 끝났다.20일부터는 3면2단에 「차부오해」가 시작돼 3월7일 완결되었다.이들은 모두 필자를 밝히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1910년대 들어서는 필자의 이름을 밝혔다.이해조는 합방이후 매신에 많은 소설을 썼는데 1910년의 작품 「화세계」를 비롯,「월하개인」「소양정」「춘외춘」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그는 문학전문기자로 연재소설을 쓰고 그것이 끝나면 단행본으로 내는 일을 맡았었다.매신 경파(사건담당)주임이었던 조중환은 1912년부터 「쌍옥루」「장한몽」「국의 향」「단장록」「비봉담」「관음상」등 번안소설을 활발히 발표했다.특히 일본소설을 번안,주인공을 이수일과 심순애로 바꾸어 만든 소설 장한몽은 신파극으로도 오랜 인기를 끌었다.이인직은 「혈의 누」속편인 「모단봉」을 1913년 2월부터 6월까지 매신에 연재하기도 했다.

○조풍연씨가 대표적

이광수는 매신에 근무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처녀작인 「무정」(1917년1월1∼6월14일)에 이어 「개척자」를 연재,명성을 드높였다.그는 후에 언론계에 투신,동아·조선에서 요직을 거친후 1942년에는 원숙한 경지에 이른 역사소설 「원효대사」를 매신에 다시 연재했다.윤백남 역시 매신을 통해 문명을 얻었다.1913년부터 매신에 근무한 그는 「기연」「시주」「몽사」「사변전후」등을 발표했다.동아·조선 창간전에 매신기자로 출발했던 「청춘예찬」으로 유명한 오보 민태원은 「애사」「세번째의 신호」「새생명」등을 연재했다.

매신은 1919년 8월 소설작품 현상모집을 최초로 실시했다.후에 민간신문들이 채택한 신춘문예의 효시가 된 이 현상작품모집의 현상금은 1등 1백50원,2등 1백원,3등 50원등이었다.여기에 입상한 것을 계기로 언론인으로 입사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조풍연씨가 대표적인 케이스라 할 것이다.

1920년대 들어서는 일제의 문화정치 표방으로 민간신문들이 탄생하고 여러 잡지들이 발간되기 시작하자 작품발표의 무대가 넓어지게 되었다.이에따라 종전과는 달리 전문적인 문인들이 나오게 되었다.그들의 대부분은 역시 언론인들이었지만 과거 신문제작의 한 방편으로 소설을 쓰던 초기와는 달리 작가의식을 갖고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이 시기 매신의 지면을 통해 명성을 날렸던 주요 작가및 작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김동인=순정­부부애편·해는 지평선에·수평선을 넘어서·거목이 넘어질때·백마강 ▲김내성=태풍 ▲박계주=순애보·죽음보다 강한것 ▲박영준=교수성장기·사위 ▲박종화=금삼의 피·대춘부·다정불심·여명 ▲박태원=낙조·여인성장·원관 ▲방인근=방랑의 가인·홍운백운·새벽길·젊은 안해·동방춘 ▲염상섭=이심·무화과·모란꽃 필때·불연속선·향가 ▲이서구=고독에 우는 모녀·눈물에 젖는 사람들·사랑의 지옥 ▲이효석=황야·나는 말 못했다·마음의 의장·창공 ▲이태준=사상의 월야·왕자호동 ▲장덕조=귀여운 여자·은하수·여인도·새로운 군상 ▲전영택=곰·청춘곡·재출발 ▲정비석=화풍 ▲채만식=금의 정열·아름다운 새벽·여인전기 ▲최금동=해빙기·향수 ▲최상덕=가을의 봄 ▲최서해=호외시대 ▲최인욱=시드른 마을·산신령 ▲최정희=다란보

매신은 또 독자문예란을 설치해 독자들로부터의 문예작품 투고를 받아 신문에 게재하는 한편 우수한 작품에는 시상도 하였다.이 난을 통해 작가로 데뷔한 대표적인 인물은 석송 김형원과 춘성 노자영씨등이 있다.

매신은 문학사적 업적 외에도 신문에 최초로 스냅사진을 게재(1913),신문사진이 정적인 뉴스사진에서 동적인 뉴스사진으로 전환하는 획기적 계기를 마련했다.또한 종로통 화신백화점 옥상에 전광속보대를 설치(1937),시민들에게 빠르게 뉴스를 전달할수 있도록 하는등 미디어발달사적 측면에서도 선도적인 역할을 다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한국언론사」(정진섞61990) 「한말의 신문소설」(이재선·1975) 「한국언론인물사화」상·하(대한언론인회·1992) 「언론비화50편」(한국신문연구소·1978) 「한국신문사진사」(최인진·1992)<나윤도기자>
1993-03-30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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