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7)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7)

입력 1993-02-09 00:00
수정 1993-0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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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쟁의식 고취/고정란 두고 의병활동 집중 보도/일제탄압속 「의병형세」 「처처의병」 상설/13도창의군 서울진격땐 격문도 게재/군대해산조치 항쟁에 “일정책 잘못” 통렬 비난

국채보상운동이 한창 진행될 무렵인 1907년 4월,양기탁을 총감독으로한 민족지도자들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가 결성되었다.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는 당시 축멸왜이(축멸위이)의 기치 아래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의병활동을 낱낱이 보도하고 지원하는 새로운 사명을 스스로 짊어졌다.

○「축멸왜이」 앞세워

일찍이 날카로운 논조와 고발기사등을 통해 일제 통감정치의 감시자 역할을 톡톡히 해오던 신보는 신민회와 깊은 연관을 맺는다.총무 양기탁을 비롯,주필 박은식,기자 장도빈 옥관빈,영업국장 임치정등 대부분의 사원들이 신민회에 가입한 것이다.이에따라 자연스레 신민회 대변지로서 의병운동·신교육구국운동·계몽강연운동·민족산업운동등 사회 각분야에서 태동되기 시작한 애국계몽운동의 선봉에 서게 된다.

그 저항은 1907년 8월1일을 기점으로 강하게 표출되었다.신보는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에 돌입하자 전국각지에서 궐기한 의병의 활동상을 상세히 보도,국민들의 애국심에 불을 댕겼다.이른바 제3차 의병전쟁(제1차는 1895년 민비시해이후,제2차는 1905년 을사조약이후)으로 분류되는 군대해산 이후의 의병활동은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펼쳐졌다.이무렵 신보의 적극적 보도는 이같은 의병활동이 한일합방후 독립군에 의한 독립전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신보가 역사적 변화를 가져온 징검다리로써의 소임을 다했다고 평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군대해산에 반대한 최초의 항일봉기인 구한국군의 항쟁은 해산 당일 서울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의 죽음이 도화선 구실을 했다.『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번 죽어도 아까울것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자 대한제국 군대의 의분이 폭발했던것이다.

신보는 이날 일본군과 한국군 사이에 수십명의 사상자를 낸 서소문과 정동 일대의 전투의 처참상을 2일자에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한국내에서 우리 한인의 살육당함은 일본정책에 기인한 것으로 논책함이 옳도다.서소문에 있는 병영에서 무장해제 칙령을 들은 박승환대장이 곧 자살한지라 그날 상오8시반에 소요가 시작되어 거의 정오에 이르도록 계속되었다.…격심한 전투가 끝난후에 병영내가 시체로 즐비하였으며 은밀한 구석에도 시체와 무기가 흩어져 있었으니 추측컨대 무기가 다하도록 싸우다가 일본 기관포의 잔인한 발포에 혼비백산하여 숨을곳을 찾다가 일인의 탄환과 총칼에 죽음을 당하니 땅위에 피냇가를 이룬 것이라』

그리고 「한병해산」이라는 8월4일자 논설에서 일제 군대해산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한인들의 분연한 의거를 칭송하고 나섰다.『이와같이 커다란 인명손실의 직접동기가 된 한병해산의 권고를 강경 논책하며 겸하여 이 모든 사태를 한탄하거니와 동시에 믿음직한 것은 한인의 합당하고 옳은 의거로 세계신문들이 왜곡했던 한인의 게으름이란 것이 도리에 어긋났음을 일인과 세계안목에 드러내 보이도다』

의병활동이 국민적 공감대를 불러 일으키고 전국적으로 확산돼 나가자 신보는 산발적인 보도가 아니라 「의병형세」「처처의병」「지방소식」등 고정난을 서둘러 만들었다.의병의 활약상을 상시 보도하면서 국민들의 적극적 지원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이같은 신보의 열성적 의병활동 지원보도는 대한제국정부의 친일내각이나 일제 통감부에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다.

이는 이완용내각의 내부경무국장 송정무가 통감부 외무부장 와도계차낭에게 보낸 1908년 6월4일자 보고문서 「대한매일신보와 폭도」(「주한일본공사관기록」경비발 제786호)에 잘 나타난다.이 사무보고 문서는 신보가 의병활동을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그 실례로 1907년 12월,13도창의군이 서울을 진격했을때 그들의 격문을 신보가 보도함으로써 그로인해 의병대의 지원자가 크게 증가했음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다음해인 1909년 말의 사무보고에 따르면 한햇동안 「폭도 선동」(의병운동 관련)등 치안방해를 이유로 압수된 신문 1백41건 2만9백47부 가운데 대한매일신보가 14건 1만6천3백14부를 차지했다.압수된 신문의 대부분이 신보임을 고려하면 이신문이 일제에 얼마 만큼 저항했는가를 알수 있다.

이같은 신보의 적극적인 의병활동 보도는 1909년 5월 사장 배설이 죽은 후에도 지속되었다.이듬해 5월 통감부에 의해 사실상 회사가 접수되기 직전까지도 필봉을 늦추지 않았다.신보의 일관된 태도는 1909년 10월26일 당시 의병참모중장의 신분으로 통감 이등박문을 암살,이듬해 3월 여순감옥에서 처형된 안중근의사의 거사및 체포·재판과정등의 보도에서도 나타났다.그가 거사후 일제검찰에 제시한 이등박문을 살해한 이유 15가지를 신보는 11월21일자에 상세히 보도,국민들에게 안중근의사의 큰뜻을 널리 알렸다.

○14차례 압수당해

신보는 안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순국직전에 국민들에게 보내는 유언까지 게재함으로써 한국민족의 국권수호열망을 만방에 과시했다.『▦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간 해외에서 풍손로숙하다가 그 목적을 도달하지 못하고 타지에서 사하노니 유아2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분발하야 학문을 면려하고 실업을 진흥하며 아의 유지를 계하여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사자무감이라』(3월25일자).

대한매일신보의 저항은 외길이 아니었다.보이지 않는 무형의 저항으로도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 교육구국이었다.민족의 각성과 지도자의 양성을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함을 깨달은 신보의 편집진은 민족교육기관의 설립을 찬양하면서 부추기는 논조로 일관했다.<나윤도기자>

「대일민주선언」(홍이섭,일우문고 1972)「한국신문사론고」(최준,일조각 1976)「한국신문사연구」(이해창,성문각 1983)
1993-02-09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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