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1세대 추상화가 유영국展
“산은 내 앞이 아닌 내 속에 있는 것”변화무쌍한 자연 균형감으로 채워
유화 작품 34점 중 21점 최초 공개
서울 종로구 PKM갤러리에 전시된 유영국 화백의 작품 워크(Work·1975). 유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은 “산의 모습이 꼭 ‘아이스크림콘’ 같다”고 말했다.
PKM갤러리 제공
PKM갤러리 제공
“유영국의 그림은 감동에 바탕을 두지만 극단적인 정열의 발산도, 흑백 회화의 무감동 상태도 아닌 독특한 기쁨의 명상에 관객을 잠기게 만든다.”(미술사학자 정병관)
산을 표현한 곧은 선도 끝에 곡선을 품었고 꽉 채운 색의 향연 속에 남겨 둔 흰 캔버스의 맨얼굴에서는 바람이 느껴진다. 시대적 격변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단단한 내면과 품위로 발현된 유영국(1916~2002) 화백의 ‘중용의 미학’을 느낄 수 있다.
서울 종로구 PKM갤러리에서 21일부터 열리는 ‘유영국의 자연: 내면의 시선으로’ 전시를 통해서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 1세대 추상화가인 유 화백의 1950~1980년대 유화 작품 34점 중 21점이 최초 공개되는데 24.5x33.3㎝ 크기의 소품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유 화백의 딸인 유자야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는 “과거 약수동 적산가옥에 살 때 아버지가 길고 좁은 마루에서 주로 그리던 작품”이라며 “소품이니까 주변에서 싸게 사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가격을 매기는 것은 아니라며 안 팔고 보관해 오던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유영국 화백의 1967년작 워크(Work).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제공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제공
‘산의 화가’라는 별명답게 변화무쌍한 산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그려 낸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생전에 유 화백은 “바라볼 때마다 변하는 것이 산이다. 결국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산속에 들어서면 산을 그릴 수 없다. 산에서 내려와서야 비로소 원거리의 산이 보이듯이, 멀리서 바라봐야만 산을 그릴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묘석에도 쓰여 있는 말이다.
그의 내면을 담은 산은 때로는 우직하게 때로는 온화하게 느껴진다. 화백의 아들인 유진 재단 이사장은 “과묵했던 아버지는 어릴 적 그림에 대해 여쭈면 ‘네가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는 그만이셨다”고 회상했다.
이번 전시 영문명에는 ‘중용’(Golden mean)이란 말이 붙었다. 끊임없는 훈련과 절제로 양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이룬 중용의 미덕을 그의 작품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산의 형상은 웅장한 동시에 평온하며, 정적이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바다의 모습은 인생의 유동성과 불변함을 함께 보여 준다. 중용의 미학은 유 화백의 형태와 기법, 색상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철저하게 계산된 기하학적 구조에 자연을 견고히 담았지만 유기적인 형태와 표현주의적인 붓 터치로 생동감 넘치는 자연을 표현하기도 했다. 캔버스 위 화려한 색들은 경쟁하지 않고 어우러진다.
유 화백은 이미 국내에서 유명한 작가지만 최근 해외에도 이름이 알려졌다. 지난해 미국 뉴욕 페이스갤러리에서 해외 첫 개인전이 열렸으며 올해 베니스비엔날레의 공식 병행전시로 퀘리니스탐팔리아재단에서 유럽 첫 개인전이 진행 중이다. PKM갤러리는 또 다음달 초 열리는 국제아트페어 ‘프리즈 서울’에서 유 화백의 100호 크기의 1973년 작품을 소개할 예정이다. 전시는 오는 10월 10일까지.
2024-08-21 2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