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서울 종로구 평창동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와 용산구 이태원로 6·25전쟁 아카이브센터는 한두 해 사이 문을 연 아카이브다. 예술과 전쟁은 상반된 단어지만 그것을 기록하는 여정은 한결같다. 인류의 보편적인 자유와 평화를 지향하는 바도. 더불어 흥미로운 건 약속이나 한 듯 도서관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책으로 가볍게 말을 걸고, 조금 더 깊은 관심을 보인 이들은 아카이브로 이끈다. 그래서 아카이브 도서관만의 도서 분류법은 꽤나 흥미롭다. 물론 공간을 구성하고 전개하는 방식만으로도 충분히 탐스럽다.레퍼런스 라이브러리는 자연광이 좋아 인근 지역 주민들이 즐겨 찾는다. 오전 시간이 한가한 편이다.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로비는 특별하다. ‘레퍼런스 라이브러리’ 즉 도서관이다. ‘책을 매개로 미술에 대한 생각과 마음을 넓히는 공간’이다. 전시실에서 안내 부스와 레퍼런스 라이브러리를 지나 안쪽 전시실까지, 그리고 측면 계단을 이용해 2층 라운지로 물 흐르듯 이어진다.
레퍼런스 라이브러리 열람석은 2층까지 열린 복층 구조다. 창은 전체가 유리로 돼 있어 채광이 좋고 시원스럽다. 벽과 난간과 계단은 미술관 특유의 정제된 직선들이 화이트 큐브의 공간을 가르는데, 비율과 균형이 딱딱 맞아떨어진다.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게 되는 건 어찌할 수 없다. 튀지 않지만 그만큼 매력 있다.
레퍼런스 라이브러리의 장서는 5500권 정도로 국내외 미술 분야 단행본과 연속간행물, 전시도록 등을 비치한다. 압도적 수량은 아니다. 그나마 개관 시점에 비해 1000권이 늘었다. 이쯤에서 서가를 쓰윽 훑고 소셜미디어에 담길 사진 몇 장 담았으니 떠난다면? 어찌하나, 레퍼런스 라이브러리가 가진 톡 쏘는 매력은 정작 만나지도 못한 채 이별일 텐데.
서울 평창동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의 그림책이 담긴 작은 이동식 서가. 아이들을 위한 코너로, 장서가 많지는 않아도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전문가들의 선택은 믿을 만하다.
아카이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책만 한 자료는 없다. 그렇다고 레퍼런스 라이브러리가 일반 도서관의 문법을 따르는 건 아니다. 서가의 장서는 미술관으로서 이용자의 편의를 따랐다. 총류, 예술, 전시자료, 철학, 문화·사회·과학 등으로 직관적이다. 그 가운데 국내 전시자료는 다시 국공립과 사립, 그리고 소규모 전시공간과 프로젝트, 레지던시로 구분한다.
특히 소규모 전시공간 주제는 레퍼런스 라이브러리를 담당하는 학예연구사의 전문성이 빛을 발한다. 책과 자료 등은 무척이나 ‘게릴라’스럽다. 전시가 끝나면 사라지는 소위 ‘찌라시’ 전단에서 국제표준도서번호(ISBN)가 없는 독립출판물, 소량의 전시도록이나 무가지, 예를 들면 을지로의 ‘신도시’ 같은 공간의 프로젝트성 발간물 등을 포함한다. 희소성 높은 자료들이다. 해외 중고 서점에서 어렵게 구한 책들도 있다. 받아 들고 보니 어느 도서관에서 소장하던 책이었다. 책 뒷면에 종이 도서 대출 카드를 넣어 두던 흔적이 고스란했다. 이를 그대로 서가에 비치했다. 서가를 뒤적여 찾아내는 이런 소소한 재미가 레퍼런스 아카이브의 장점이다.
‘책 생각들’은 레퍼런스 라이브러리가 자랑하는 큐레이션이다. 추천인의 철학적 기반이 되는 추천 책들은 다른 말로 하면 레퍼런스일 수 있겠다.
이형구 현대미술 작가는 ‘아니마투스의 기원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몇 권의 책을 건넨다. 인체 해부학 그림이 실린 ‘A Colour Atlas of Human Anatomy’(인체 해부학 지도) 등의 원서와 작가의 도록을 같이 보면, 창작은 막연한 상상의 표출을 포함해 명확한 탐구의 결과라는 걸 알 수 있다.
‘언어의 세계에서 인간으로 살면서 기록하고, 상상하고, 대화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라고 말을 거는 이는 작가이자 뮤지션 이랑이다. 그는 ‘사이보그가 되다’(김초엽·김원영, 사계절)와 ‘슬픔의 방문’(장일호, 낮은산) 등을 소개했다. 홍콩 창작그룹인 ‘디스플레이 디스 트리뷰트’는 뜻밖에도 만화 ‘고독한 미식가’(구스미 마사유키·다니구치 지로, 이숲) 1, 2권을 추천했는데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인기도서로 등극했다.
서가에 비치한 강홍구 작가의 이전 전시도록들. 전시 감상 후 작가의 지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레퍼런스 라이브러리만의 특징은 또 있다. 기획 전시 중인 작품들은 전시장 밖을 나와 로비의 도서관까지 기분 좋게 잠식한다. 한자리에서 책과 미술 여행을 같이 할 수 있는 영역 없음이 좋다. 전시도 개성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아카이브에 기반을 둔다. 현재는 강홍구 작가가 기증한 불광동 작업 시리즈 5800여점, 20년간 작업한 은평뉴타운 시리즈 1만 5600여점 등의 자료를 학예연구사들이 분석하고 기획한 전시가 한창이다.
아카이브란, 레퍼런스란 무엇인가? 이 말들이 귀에 쏙쏙 들어오지 않는다면 전시 연계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할 일이다. 김영민 교수, 정지돈 소설가, 조한 건축가 등 7명의 전문가가 강연하고 전시를 기획한 주은정 학예연구사와 강 작가가 ‘잡담’하는 행사 등도 열린다. 마치 ‘사람 책’(휴먼 라이브러리, 책 대신 특정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사람책’을 대여해 주는 신개념 도서관 서비스)을 읽고 나누는 독서 모임 같기도 하다.
전시는 1층의 두 전시실 외에 2층 라운지까지 유연하게 활용한다. 그리고 2층에서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 리서치랩으로 이동할 수 있다. 리서치랩은 아카이브 활용의 고급 수준이다. 폐가식으로 운영해 원하는 자료를 사전 신청해 열람해 보고 반납하는 구조다. 열람석 한쪽에는 ‘최민 컬렉션: 저공비행, 활강, 그리고 놀이’가 전시 중이다. 그는 평생에 걸쳐 수집한 161점의 작품과 2만 4924건의 자료를 기증했다. 그의 아카이브를 사유해 기획한 개관 전시가 ‘명랑 학문, 유쾌한 지식, 즐거운 앎’이다. 아카이브의 진수를 보여 준 바 있다.
3층 리서치랩에서는 바깥 공중정원으로 나갈 수 있다.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전체와 평창동 마을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장소이자 쉼터다. 현재는 직접 만져 볼 수 있도록 제작한 김채린 작가의 ‘기억하는 조각’ 등이 ‘SeMA-프로젝트 A: 촉감의 공간, 촉각의 리듬’을 채운다.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의 옥상정원 모습. 맞은편 도로 건너에 나눔동이, 우측 도로 건너편에 배움동이 있다.
옥상정원에서는 작품 외에 마을 풍경도 만져진다. 평창동은 드라마를 자주 보는 이들에게는 서울의 부촌이고, 미술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유서 깊은 서울의 미술관 거리다. 5층을 넘는 건물을 만나는 게 쉽지 않은 마을로,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건물 역시 동네에 녹아든다.
모음동 전시실 모습.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의 정체성인 ‘아카이브’에 기반한 전시가 주를 이룬다.
옥상정원에서는 곧장 동네 골목으로 길이 나 있다. 고 이어령 교수의 영인문학관을 지나 가나아트센터와 토탈미술관까지 평창동을 산책하며 북한산 산세와 조용한 동네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이른 여름 볕이 막아서는 날, 아쉬움을 삼키며 1층 레퍼런스 라이브러리로 내려온다. 적당히 볕 드는 자리를 찾아서는 그림책 비평가 그룹 CONPB가 추천한 ‘책 생각들’의 목록을 들여다본다. 얼마 전 ‘에디토리얼 씽킹’(터틀넥북스)을 인상 깊게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최혜진 작가가 추천한, ‘화성 탐사 로봇 오퍼튜니티입니다’(이현·최경식, 만만한책방)를 읽는다.
오퍼튜니티는 화성을 탐사했던 로봇이다. 태양열 에너지로 움직이는, 3m를 가는 데 1분이 걸리는 로봇은 15년 동안 약 45㎞를 탐사했다. 기대 수명을 60배나 넘는 시간이었다. ‘가까이 밀착했다가 돌연 아득히 바라보는 낙차 덕분에 외로움, 실망, 다짐 같은 인간적 감정이 피어난다’는 추천의 말에 공감하며, 글자보다 짙은 그림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그래도 괜찮다. 조금씩, 천천히,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림책 속 오퍼튜니티의 말이다. 비록 이야기가 더해진 그림책 속 대사지만 아카이브의 선언처럼 다가온다. 조금씩 천천히,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진일보를 이끄는 발자취. 그것이 우리 각자의 삶을 가꾸고 대하는 태도여도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를 나선다.
자유·평화 전파하는 공간… 층층이 기억을 쌓다
용산 6·25전쟁 아카이브센터
6·25전쟁 아카이브센터 도서자료실은 책을 쉽게 고르고 읽을 수 있도록 서가마다 받침대와 조명을 설치했다.
6월은 호국의 달이다. 6월 6일은 현충일이고 6·25전쟁은 약 74년 전 6월 25일에 있었다. 6·25전쟁 아카이브센터는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와 더불어 주목할 만한 서울의 아카이브다. 크게 도서자료실(Library)과 전문자료실(Archive Lab)로 나뉘는데, 책 중심의 도서자료실은 도서관 성격, 6·25전쟁 관련 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 전문자료실은 아카이브의 비중이 높다.
6·25전쟁 당시의 탱크와 비행기 그리고 도서관이 어우러진 장면은 이곳이 어디인지를 말해 준다.
서가를 뒤로한 채 창가로 먼저 걸음을 옮겨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다. 소파에 기대 잠시 창밖을 품고서 머문다. 유월의 이른 봄 하늘은 푸르고 뜨겁다. 전쟁 같은 서울의 소음도 사라진다. 이 고요한 평화야말로 전쟁을 잊지 않아야 하는 이유일 테다. 톨스토이의 소설 제목을 빌리면 ‘전쟁과 평화’다.
●6·25전쟁 아카이브를 세계문화유산으로
6·25전쟁 아카이브센터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의미 있는 장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기능적으로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6·25전쟁 관련 자료를 종합적으로 아카이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아카이브센터가 생겨나며 그간 비공개였던 자료부터 기증받은 자료까지 국내외를 아우른다. 최종 목표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다.
서울 용산 6·25전쟁 아카이브센터의 상징과도 같은 6·25전쟁 서가. 타워형으로 형태부터 두드러진다.
민간의 기억은 도서자료실을 찾는 많은 이들이 민간인이라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 인문학자의 기록에서 어머니, 여고 동창생, 종군신부까지 다양하다. 공산권의 기억은 ‘조선인민군 우편함 4604호’(이흥환, 삼인) 같은 책이 눈에 띈다. 북한 조선인민군의 전해지지 않은 편지를 수록한 책이다. ‘아이들 죽이지 말고 잘 길러주시우’, ‘고향에 돌아올 때는 이 편지를 꼭 품 안에 넣고’ 등 그 목차만으로 절절하다. 이 모든 편지가 결국 전해지지 않았다.
류영봉(미 제7사단17연대 의무중대)씨의 6·25전쟁 당시 기록. 개인의 기록이 역사의 기록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전문자료실은 도서자료실보다 규모는 작지만 한층 생생하고 입체적이다. 6·25 당시 사진, 문서, 영상, 기록화 등의 자료를 꼼꼼하고 촘촘하게 정리해 개방한다. 가운데 연구테이블에는 6·25전쟁 당시 조직된 종군문인단인 ‘문총구국대’의 기록을 전시했다. 시인 유치환, 화가 우신출, 사진가 김재문 등이 각자의 영역에서 기록한 한국전쟁의 자료다. 6·25전쟁 자료서가는 서랍을 열어 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 특히 1950년 8월 16일 입대해서 1954년 7월 3일 전역한 류영봉(미 제7사단17연대 의무중대)씨의 기록이 눈길을 끈다. 한반도 지도 위에 빼곡하게 적은 손 글씨는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전쟁을 이끈 장군이나 유명한 문인과는 달리, 평범한 한 개인의 기록은 한층 깊은 울림을 전한다. 안쪽 미디어 부스에서는 그의 인터뷰 영상을 볼 수도 있다. 소설가나 영화와 드라마 미술팀이 고증을 위해 찾을 만큼 방대하고 세세한 자료를 갖췄다.
기획전시실에 전시 중인 ‘어제의 기록, 내일의 기적’ 모습. 이후로도 6·25전쟁 아카이브센터와 연계한 전시를 계획 중이다.
‘기록은 기억을 남긴다.’
전쟁을 겪은 이에게 전쟁은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지만 그 기록은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에게 평화의 격언처럼 다가온다. 당연한 이 말은 유월의 6·25전쟁 아카이브라 다시 한번 그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한다.
[여행수첩]
●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오전 10시~오후 8시(화~금요일), 오전 10시~오후 7시(주말, 공휴일 3~10월), 오전 10시~오후 9시(매월 첫째, 셋째 금요일)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매주 월요일 휴관, 누리집 semaaa.seoul.go.kr (02)2124-7400.
● 6·25전쟁 아카이브센터
-오전 9시 30분~오후 6시,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매주 월요일 휴관, 누리집 www.warmemo.or.kr (02)709-3224~5.
2024-06-07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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