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만나면 꽉 안아주고 싶어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알고 싶은데. 이것조차 욕심이라면 살아 계시는지 그것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어요.”3년째 위암 투병 중인 노르웨이 입양 한인 김 토마스 리셍(46·한국명 김민수)씨가 생모를 애타게 찾고 있다.
노르웨이 입양 한인 김 토마스 리셍(46·한국명 김민수)
김씨는 최근 연합뉴스와 화상통화에서 “삶이 곧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평생 모르고 살았던 내 삶의 시작점이 그렇게 간절해지더라”고 밝혔다.
1981년 4월 24일 오후 5시쯤 대전역 대합실서 발견
“항암 치료하며 더욱 절절해진 그리움…가족 찾고 싶어”
![노르웨이 입양 한인 김 토마스 리셍(46·한국명 김민수)씨가 1981년 4월 24일 대전역 대합실에서 발견됐을 당시 모습. 김민수 씨 제공/연합뉴스](https://img.seoul.co.kr/img/upload/2023/09/28/SSC_20230928162159_O2.jpg)
![노르웨이 입양 한인 김 토마스 리셍(46·한국명 김민수)씨가 1981년 4월 24일 대전역 대합실에서 발견됐을 당시 모습. 김민수 씨 제공/연합뉴스](https://img.seoul.co.kr//img/upload/2023/09/28/SSC_20230928162159.jpg)
노르웨이 입양 한인 김 토마스 리셍(46·한국명 김민수)씨가 1981년 4월 24일 대전역 대합실에서 발견됐을 당시 모습. 김민수 씨 제공/연합뉴스
발견 당시 그의 옷가지 등에서 정확한 인적 사항이 적힌 쪽지나 편지는 따로 없었다. 아동신상카드 기록상 그의 생년월일은 1977년 4월 25일이지만, 확실치는 않다. 영아원 관계자 등이 4∼5살로 보이는 남자아이라 입소 날짜에 맞춰 생년월일을 정하고 김민수라는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
얼마 후 노르웨이로 입양, 남부 도시 퇸스베르그와 플레케피오르에서 성장한 그는 트롬쇠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금융기관 취업을 거쳐 현재는 회계사로 일하고 있다. 2011년 페루에서 만난 아내와 결혼 후 오슬로에 정착했고 8살 아들이 있다.
행복한 가정을 꾸렸지만 그는 학창 시절이 녹록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금발과 푸른 눈의 백인들 틈바구니에서 차별과 괴롭힘의 대상이었던 그에게 ‘아시아 입양인’이라는 꼬리표는 언제나 숨기기 급급한 흉터였다.
![노르웨이 입양 한인 김 토마스 리셍(46·한국명 김민수)씨의 학창시절 모습. 김민수 씨 제공/연합뉴스](https://img.seoul.co.kr/img/upload/2023/09/28/SSC_20230928162203_O2.jpg)
![노르웨이 입양 한인 김 토마스 리셍(46·한국명 김민수)씨의 학창시절 모습. 김민수 씨 제공/연합뉴스](https://img.seoul.co.kr//img/upload/2023/09/28/SSC_20230928162203.jpg)
노르웨이 입양 한인 김 토마스 리셍(46·한국명 김민수)씨의 학창시절 모습. 김민수 씨 제공/연합뉴스
양부모도 김씨 출생의 비밀과 한국을 살갑게 설명한 적이 없다. 그저 ‘네 친부모는 널 버렸어’라고 했다.
그렇게 묻어뒀던 입양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성인이 되고부터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일으켰다.
특히 본인과 똑 닮은 아들이 커나가는 모습을 보며 가족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것 또한 가슴 한쪽에 멍에로 남았다.
더 늦기 전에 친부모를 찾아야 한다고 마음 먹었지만, 2021년 6월 불현듯 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김씨는 ‘뿌리 찾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노르웨이 입양 한인 김 토마스 리셍(46·한국명 김민수)씨 가족. 김민수씨 제공/연합뉴스](https://img.seoul.co.kr/img/upload/2023/09/28/SSC_20230928162204_O2.jpg)
![노르웨이 입양 한인 김 토마스 리셍(46·한국명 김민수)씨 가족. 김민수씨 제공/연합뉴스](https://img.seoul.co.kr//img/upload/2023/09/28/SSC_20230928162204.jpg)
노르웨이 입양 한인 김 토마스 리셍(46·한국명 김민수)씨 가족. 김민수씨 제공/연합뉴스
노르웨이 현지에서 유전자 검사를 앞둔 그는 오슬로에 있는 한국대사관을 통해 DNA 샘플을 경찰청 실종아동 데이터에 등록하고 내년에는 직접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다.
한국에서 친부모를 찾고 나서야 부모가 본인을 버린 게 아니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다른 입양인들의 사연은 그에게 또 다른 동기부여가 됐다.
그는 “양부모님은 내가 ‘1979년생이고 서울역에서 버려졌다’고 말했지만, 직접 조사해보니 나는 1977년생에 대전역에서 발견됐다”며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어쩌면 친부모님이 날 버린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친부모님이 절 버린 게 사실이라고 해도 원망하지 않는다”며 “그동안 부모님은 어떻게 살았는지, 저는 어떤 아이였는지, 형제자매는 있는지, 궁금한 게 너무 많다”고 말했다.
포기하지 않고 항암치료와 가족 찾기를 이어가겠다고 다짐한 그는 작은 단서도 소중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씨는 “제가 대전역에서 발견될 당시 제 옆에 보따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보따리도 저와 함께 노르웨이로 왔다는 기록은 찾을 수가 없었다”며 “42년 전 보따리의 행방을 쫓는 게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에 가서 찾아보려고 한다. 암 치료도 가족 찾기도 모두 기적이 벌어질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권윤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