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위로다] <1>이상국 시인·한국작가회의 이사장
현실 문제 앞에서 시는 공허한 울림일까요. 힘들고 외로울 때 시집을 열어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위로가 되는 시의 본령을 알고 있는 겁니다. 오늘부터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시는 위로다’에서 그 본질을 전합니다. 코로나19로 지치고 힘든 독자 여러분께 이 시대의 시인들이 재능 기부로 위로를 건넵니다.일러스트 길종만 기자 kjman@seoul.co.kr
약국 앞에 줄을 설 줄이야
그래도 고맙다 신통한 부적처럼
우환을 막아 줘서 고맙고
속이 다 내비치는 안면을 가려 줘서 고맙고
세수를 안 해도 사람들이 모르니까 더 고맙다
병자호란 임진왜란
육이오 동란까지 겪고 또 겪고
살다 살다 마스크 대란이 올 줄이야
저들은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없는 벌레군단
국경도 인종도 가리지 않는 인류 침공에
어벤저스 슈퍼 히어로들도 속수무책인데
귓바퀴가 없으면 걸 데도 없는 저
손바닥만 한 천 조각들이 지구를 구할 줄이야
모든 화는 입으로 들어온다기에
쓸데없는 말 안 하고
나를 아끼고 남을 존중하며
마스크와 한철 보내고 나니까
아무래도 내가 좀 커진 것 같다
나라도 이전의 나라는 아닌 것 같다
이상국 시인·한국작가회의 이사장
1946년 강원 양양. 1976년 ‘겨울추상화’로 등단. 시집 ‘달은 아직 그 달이다’, ‘뿔을 적시며’ 등. 정지용문학상, 백석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2020-04-27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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