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해지는 직권남용죄… 양승태·조국 ‘무죄’로 이어질까

엄격해지는 직권남용죄… 양승태·조국 ‘무죄’로 이어질까

김헌주 기자
입력 2020-02-10 00:04
수정 2020-02-10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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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훈 판결 등 유독 직권남용 무죄 많아

“위법 인지 하급자는 피해자 아냐”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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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전 대법원장. 연합뉴스
양승태 전 대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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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전 법무부 장관. 연합뉴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연합뉴스
최근 직권남용죄를 보는 사법부의 잣대가 깐깐해지고 있다. 앞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엄격한 기준을 내세운 대법원 판결이 원세훈(69) 전 국가정보원장 재판에도 영향을 미쳤다. 불법 정치공작을 벌인 혐의로 1심 재판을 받은 원 전 원장은 대부분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지만 유독 직권남용죄는 무죄 판단이 많았다.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 중인 양승태(72) 전 대법원장을 비롯해 청와대 감찰 무마 의혹과 관련해 같은 혐의로 기소된 조국(55) 전 법무부 장관 등 현 정권 인사 관련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부장 이순형)는 지난 7일 민간인 댓글 부대 운영에 국정원 예산을 쓴 혐의(국고손실) 등을 받는 원 전 원장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다만 국정원법상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돼 있는 직권남용 혐의는 일부만 유죄로 인정했다. 지난달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공무원이 법령에 따른 업무를 했을 때는 의무 없는 일이라고 볼 수 없다”며 직권남용죄를 좁게 해석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앞서 검찰이 원 전 원장에게 적용한 직권남용(미수)에 따른 국정원법 위반 혐의는 13개에 이른다. 이 중 11개 혐의가 무죄로 판단됐다. 우선 정권에 비판적 성향을 지닌 방송인 김미화씨나 배우 김여진씨가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최승호(현 MBC 사장) PD를 시사프로그램 제작에서 배제하는 인사 조치를 하도록 요구한 행위는 “직무에 속하는 권한 행사로 볼 수 없다”는 게 재판부의 설명이다.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의 직권남용에 더해 상대방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해야 성립된다. 그런데 국정원의 정보수집·작성 행위와 무관한 이러한 행위는 직권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직권을 남용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국정원 직원에게 야권 출신 지방자치단체장 등에 대한 동향 파악을 하도록 한 것도 이들 직원이 위법한 지시라는 인식이 있었다면 직권남용의 ‘피해자’가 될 수 없다고 재판부는 설명했다. 상급자의 위법한 요구에 대해서는 복종할 의무가 없는데도 이를 거부하지 않은 것은 지휘부의 각종 불법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반면 권양숙 여사와 박원순 서울시장이 각각 해외를 방문했을 때 미행·감시를 지시한 행위는 위험 인물을 만나는지 확인하는 차원으로 국정원 직원들이 위법하다는 인식을 못 했기 때문에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직권남용과 관련한 대법원 기준이 새롭게 제시되면서 일선 법원도 재검토에 들어간 분위기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정보를 불법 조회한 혐의로 기소된 남재준(76) 전 국정원장의 항소심은 “대법 판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며 지난 4일 예정된 선고 기일을 연기했다. 허윤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은 상급자가 지시한 행위가 하급자가 원래 해왔던 일인지를 세밀하게 따져 보자는 취지”라면서 “사법농단 등 앞으로 직권남용 사건 재판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진선민 기자 jsm@seoul.co.kr
2020-02-1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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