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사후 50주년’ 마르셀 뒤샹展
기성예술에 대한 ‘전복적 상상’ 즐긴 뒤샹희소성·손재주 배제… 아이디어 자체를 작품화
제작·보관·유통 모두 파격… 여성 자아 만들기도
작품을 미니어처로 제작한 ‘여행가방 속 상자’
20년 공들인 ‘에탕 도네’ 디지털 영상 등 전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마르셀 뒤샹전 전시 작품들. 뒤샹을 유명하게 만든 작품 ‘샘’(1950).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지난달 22일부터 열리고 있는 마르셀 뒤샹전 리뷰 기사에 대한 ‘베스트 댓글’이다. 골치 아프게 인식할지언정, 미술을 모르는 사람도 뒤샹의 변기는 안다. 남자용 소변기를 갖다 놓고 ‘작품’이라 했던 파격은 미술사의 거대한 변곡점이 됐다.
그 유명한 변기가 서울에 왔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전 세계에서 뒤샹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과 공동으로 회화, 드로잉, 레디메이드 등 작품 150여점과 아카이브를 선보인다. 박위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직무대리가 “사후 50년(2018)을 맞아 열리는 전시로 아태지역 역대 최대 규모”라고 밝혔던 것처럼 뒤샹의 인생 전체를 톺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마르셀 뒤샹전 전시 작품들. 뒤샹의 주요 작품을 미니어처로 구성해 만든 ‘여행가방 속 상자’(1966).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총 4부로 구성된 전시는 뒤샹의 생애 주기를 따라간다. 여섯 형제 중 뒤샹을 포함한 총 4명이 직업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는 예술혼이 흐르는 가계. 그 속에서 청소년 뒤샹은 인상주의, 상징주의, 야수파 등 당시 프랑스를 휩쓴 화풍을 공부하며 자랐다. 실제 이 시기 그의 그림에서는 ‘인상주의의 대가’ 폴 세잔의 느낌도 난다. 사람 주위로 비자연적인 핑크빛 후광이 넘실대는 ‘의사 뒤무셸의 초상’(1910), 흡사 로봇의 움직임을 초고속 카메라로 찍은 듯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1912)에서는 그만의 특색을 느낄 수 있다. 평론가로부터 ‘대상의 성별이 무엇이냐’는 지적을 들었다는 작품. 뒤샹은 1912년 파리에서 열린 ‘살롱 데 쟁데팡당’에 이 작품을 출품했지만, 수정 요청에 결국은 스스로 거둬들였다. 이어지는 전시회 퇴짜의 서막이었다.
●철강회사의 쇼룸서 구입한 소변기 ‘샘’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2부 섹션을 보기 위해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 갑자기 천장이 높아지며 시야가 확 트인다. 그리고 전시장 한가운데 그 고고한 변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날의 뒤샹을 있게 한 작품 ‘샘’(1950)이다.
‘샘’은 뒤샹이 1917년 미국 뉴욕의 독립예술가협회가 연 첫 전시에 출품한 작품이다. 뒤샹은 철강 회사의 맨해튼 쇼룸에서 구입한 소변기를 ‘R. Mutt’라는 필명으로 출품했다. 협회 이사회의 일원으로서 자기가 속한 단체의 민주주의, 포용력을 시험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갑론을박 끝에 벌인 투표에서 근소한 차이로 ‘샘’은 전시 대상에서 제외됐다. 훗날 그의 의견이 개입된 것으로 알려진 글에서
그는 말한다. “‘샘’이 비도덕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배관공의 쇼윈도에서 매일 보는 소변기 역시 비도덕적인 것이다. (중략) 그가 그것을 ‘선택’했다. 그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을 가져와 새로운 제목과 관점 아래 그 쓰임새가 사라지도록 배치했다.” 이에 대해 이지회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예술가의 감정이나 손재주는 철저히 배제하고, 아이디어 자체를 전면에 내세워 예술의 지적인 가치를 높였다”고 말했다.
기성 예술에 대한 전복적 상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번에 전시되는 ‘샘’은 1950년산. 뒤샹이 전시에 출품했다 퇴짜 맞은 그 작품이라면 1917년산이어야 하는데 어찌된 일일까. 이 연구사는 “원래 ‘샘’은 1919년에 이르러 버려지거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며 “전시장의 ‘샘’은 실물 크기 재제작품 중 가장 초기 작품이며, 뒤샹이 파리의 벼룩시장에서 구매해 직접 서명했다”고 말했다. 작품의 희소성에 전혀 가치를 두지 않으며, 그것을 재제작하는 것이야말로 ‘레디메이드’라는 자신의 개념을 더 향상시킨다는 게 뒤샹의 생각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사인’만 하면 작품이 되는 셈이었다.
뒤샹의 여성 자아를 표현한 ‘에로즈 셀라비로 분한 뒤샹’(1921).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966년 당시 뒤샹의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920년대 들어 뒤샹은 ‘에로즈 셀라비’ 등의 여성 자아를 만들어 활동했다. 짙은 아이라인에 진주 목걸이를 한 뒤샹, 아니 ‘에로즈 셀라비’는 이 시기 착시와 언어 게임에 대한 탐구를 지속했다.
전쟁 중 훼손을 걱정해 주요 작품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가지고 다녔다는 ‘여행가방 속 상자’ 연작에서는 작가의 못말리는 작품에 대한 애착이 느껴진다. 무려 300여개의 상자가 제작됐는데 전시장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약 6억여원에 사들인 1941년작과 필라델피아미술관이 소장한 1966년작을 볼 수 있다. 그의 예술적 상상력의 원천인 에로틱한 오브제들, 사후에 공개할 것을 신신당부했다는 20여년 공들인 역작 ‘에탕 도네’(1968)의 디지털 영상이 전시 말미를 장식한다.
“예술가라면 진정한 대중이 나타날 때까지 50년이고 100년이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 대중만이 제 관심사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인정받지 못해도 자신을 알아볼 진정한 대중이 나타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불세출의 천재. 작품 제작과 보관, 유통 그리고 예술에 대한 정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걸 제 손끝에서 탄생시켰던 의지의 인간을, 마르셀 뒤샹전에서 만날 수 있다. 오는 4월 7일까지. 관람료 4000원.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2019-01-07 2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