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민 ‘나는 왜 기재부를 그만두었는가’…청와대 게시판에 글 올려

신재민 ‘나는 왜 기재부를 그만두었는가’…청와대 게시판에 글 올려

신진호 기자
신진호 기자
입력 2019-01-03 11:51
수정 2019-01-03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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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글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글
청와대의 KT&G 사장 교체 압력 의혹 등을 폭로한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이 2일 오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정치개혁)에 ‘나는 왜 기획재정부를 그만두었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4편으로 구성된 이 글에서 신재민 전 사무관은 공무원 생활에 대한 회의, 정권 교체 후에도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의사 결정 과정 등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특히 자신이 KT&G 사장 교체 압력에 대해 알게 된 경위와 자신의 제보 이후 사안이 유야무야 묻혀지는 과정, 청와대의 부당한 국채 발행 압력과 그에 따른 기재부 내부 상황 등에 대한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다음은 신재민 전 사무관의 해당 글 전문

●1편

서문 : 글쓰기에 앞서

글을 쓰는 것을 많이 고민했다.

​첫 이유는 글이 엉망일까 봐. 대학교 졸업 이후 일기조차 쓴 적 없고 공무원으로 일한 기간 동안은 짧은 보고서 작성만을 훈련받은 나에게 긴 글을 쓴다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글을 쓰다 보면 필연적으로 드러날 빈곤한 단어와 조악한 문장이 눈에 선하였고 누군가 내 사고의 얕음을 알아차릴까 부끄러웠다.

​내 글로 누군가가 불이익을 받을까 우려되었던 것도 글 쓰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 이유였다. 기획재정부에서 내가 경험한 일들을 가감 없이 쓰게 된다면 그곳에서 근무하는 선배와 동료에게 누가 될 것 같았다. 아니라면 혹여라도 정치적으로 현 정권을 비판하는 소재로 악용되거나.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겪었던 경험들을 기록하고는 싶었지만, 내가 쓴 글로 피해를 보는 누군가가 혹시 나온다면 그 죄책감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사실 천성이 소심하고 게으른 나로는 논쟁거리가 되는 일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기재부를 나온 것으로 내 공무원 생활은 끝난 일인 것이고 무엇인가 더 기록한다는 것도 부질없어 보였다. 기재부에서 있었던 일을 정리한다면 어쩔 수 없이 조금이나마 논쟁거리가 된다. 가명을 쓰더라도 내가 누군가인지는 알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내부고발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흘러나갈 것도 싫었다.

​다른 사람들 입에 내가 오르내릴 것이 썩 좋지 않았다. 살아온 순간순간이 충실하지 못해서였나. 살면서 후회되는 일들을 너무 많이 한 내가 다른 무엇인가를 비판하는 듯한 글을 써도 되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런데도 결국 글을 쓰려고 한다.

이국종 교수님의 <골든 아워>를 읽었다.

​중증외상센터와 관련하여 작성된 연구용역 보고서를 가져갔을 때 아무런 관심 없이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사무실 한구석에 놓으라고 건성으로 말하고 돌려보냈다던 사무관. 오만에서 에어 엠뷰런스를 빌리려 할 때 묘사된, 보고서를 쓰는 데만 하루가 넘게 걸릴 거라는 공무원 조직의 일 처리 방식. 8년 동안 제공되지 않았다던 무전기. <골든 아워> 책에 나와 있는 공무원들의 모습은 내 모습이기도 했고 내가 견디지 못한 공무원 조직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싫어서 나왔다.

​공무원을 그만둔 것으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공무원을 그만두었다는 것은 참 싫었다.

​공무원을 준비할 때나 일하는 순간순간 사회와 국가를 조금 더 좋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보내왔다. 국민의 세금을 받고 일하니만큼 세금 받은 것 이상으로는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공무원으로 일하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내가 일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세금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딱히 사회를 더 좋게 바꿨던 것은 없었다. 이렇게 공무원을 끝내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퇴직금을 받았다. 이 퇴직금도 국민 세금으로 주는 것일 터인데 세금 받은 값어치는 하여야 하지 않을까. 그 핑계로 글을 써보려 마음먹었다. 조악한 문장이지만 공무원 조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린다면 퇴직금에 들어간 세금 값어치는 되지 않을까 싶다.

​사회를 바꾸려면 공무원 조직이 바뀌어야 한다.

​국가와 사회의 작동 방식에 의문을 품고 더 좋게 바꾸려 한다면 현재 공무원의 일 처리 방식을 이해하고 변경해나가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행정부를 차지하고 있는 공무원들은 그대로니까. 그 안의 일처리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사회가 바뀌는 것도 딱히 없을 것이다. 내가 경험하기로 정권이 바뀌어도 공무원 사회는 딱히 바뀌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어도 공무원 사회가 바뀌지 않은 것. 그건 공무원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공무원 조직 밖에서는 제대로 볼 수 없어서가 아닐까. 어차피 공무원을 그만둔 김에 내가 경험한 일들, 내가 공무원을 나오게 한 일들을 기록해 둔다면 사람들이 조금 더 공무원 사회를 이해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공무원으로 일한 경험을 가감 없이 날 것 그대로 쓴 글을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런 글이 있다면, 그래서 공무원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조금 더 정확히 알 수 있게 한다면 내가 공무원을 준비하고 일했던 것에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으로 글을 쓰려 마음먹었다.

​어쩌면 공무원을 그만둔 내 미련일지도 모른다.

날것 그대로 쓴 내 글로 인하여 혹여나 기획재정부나 정부에 비판이 가해질까 걱정된다.

​기획재정부는 우리나라 최고의 조직 중 하나이고 그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열정적인 공무원들이 많다. 한때나마 그곳에 속해서 일했던 것은 두고두고 나의 자랑일 것이다. 내 글로 기획재정부를 무턱대고 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이 못 쓴 단편적인 글들로 기획재정부와 그 안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을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글에 나오지 않지만, 기획재정부에서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들은 훨씬 많고 존경할만한 분들도 여럿이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이 글로 기재부가 그리고 우리 공직사회가 더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 나갔으면 하는 것이지 조직이나 누군가를 단순히 비판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글을 쓰게 되면 기획재정부에서 나를 믿어주고 아껴줬던 사람들을 배신하는 것 아닐까 싶어 마음이 아프다. 본문에서 후술하겠지만 사실 이미 언론 기사를 내기도 했기에 더더욱.

​핑계가 무엇이건 믿어준 사람들을 배신한 상태로 나만 행복하게 평소처럼 지낼 수는 없을 거다. 공무원을 그만둔 이유도 그래서였다. 나를 믿어준 사람에게 멍이 들게 하려면 그것보다는 내가 더 아파야 하지 않을까.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지금도 공무원을 그만둔 그때의 마음이다. 적어도 내 이득을 위해 하는 행동은 그때도 지금도 아니다.

​부족한 글솜씨다.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았으면 좋겠다.

​조악한 글솜씨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 퇴고하면 글을 내지 못할 것 같아 제대로 된 퇴고조차 없이 글을 펴낸다.

​10년 전 신림동에서 고시를 공부했었는데 10년 후 다시 이곳에서 책을 쓰고 공무원 학원 강의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공무원으로의 경험을 정리하지 않는다면,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것 같아서 글을 먼저 써보려 한다.

​학원 강사로 성공하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공무원으로 일하는 누군가가 나의 모습을 보고 부당한 업무처리가 있을 때 또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강의 준비를 한다고 해두고 이렇게 다른 일을 키웠다. 학원에 죄송할 뿐이다. 글만 마무리하고 다시 연락 드리겠다.

2018.10.31. 신림동에서

●2편

공무원의 역할

​공무원의 역할은 무엇일까.

​공무원은 시험에 합격하는 것만으로 그 신분이 형성된다.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았다 할 수 없다. 그렇기에 공무원의 의사결정은 국민의 의사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적인 결정을 내릴 때 그 정당성을 보유하지 못한다. 공무원의 역할은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정치적 정당성을 가진 대통령 및 정치 권력의 지시를 잘 수행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생각했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적 선호를 초월하여 어느 누가 국민의 투표로 대통령이 되더라도 선거공약에 따라 국정 운영을 잘해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그게 공무원의 역할이자 정치적 중립성이라 생각했다.

​물론 법적으로 명확히 불법이고 도덕적으로 부당하다면 거부할 수도 있고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조직 내에서 상부의 지시를 거부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부당한 지시는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지만 짧게나마 공무원 생활을 했던 2016년 말에도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상사가 지시하면 난 아무 생각 없이 해오지 않았었나.

​혼란한 와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언론을 통해 거듭 드러나는 최순실게이트의 실체를 보면서 함께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는 것이었다. 투표로 뽑힌 대통령이었으나 국민의 뜻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은 분명했으니까.

​2016년 겨울 광화문에서는 나도 촛불을 들고 서 있었다.

​촛불시위를 나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퇴진을 외쳤을 때 마음은 편했다. 공무원 조직이 행한 부당한 업무행태까지 정치 권력의 잘못으로 모두 치환시켜 버릴 수 있으니까. ‘공무원의 잘못은 없다. 모두가 박근혜, 최순실의 잘못이다. 정권이 바뀌면 국가는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공무원은 원래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정권이 바뀌면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의문이 남았다.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정권이 바뀌었을 때 한창 회자 되었던 말처럼 공무원은 정말 그냥 영혼이 없는 존재인가? 국정농단이라는 대형사건이 진행되고 있어도 공무원은 정말 그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집단인가?

​나는 어떤 공무원이 되려 오랜 기간 공부를 하면서 시험을 준비했던 것인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었던 2017년 초. 최순실게이트 당시에 출자관리과를 담당한 과장님과 술자리를 할 기회가 있었다. 술이 한 순배 돌고 최순실 이야기 K스포츠재단 이야기가 이어지는 와중이었다. 과장님이 말했다.

인마. 당시에 위에서 KT&G에 몇십억 정도 K스포츠재단에 내게 하라 압력 넣으라 했었어. 그거 내가 막았어. 절대 못 그런다고.

​국장이 그때 왜 안 되는 거냐고, KT&G로 하여금 돈 내게 만들라고 나한테 엄청 뭐라 그랬었다. 근데 난 절대 못 그런다 그랬거든? 그거 아마 돈 내게 했으면 큰일 났을 거야. 나중에 국장이 그때 판단 잘했다고 그러더라.

​너도 나중에 때 되면 그냥 그렇게 하면 되지 넌 뭐가 그리 고민이 많냐?

아.

​최순실게이트가 있었던 와중에도 내 주위의 공무원 중 누군가는 자기 자리에서 소신을 지키고 있었다. 공무원에게도 영혼은 있을 것이다.

​위법하거나 부당한 지시가 있으면 그에 따르지 않고 잘못되었다 하는 것. 그것 또한 분명 공무원의 역할이다. 책에서만 나오는 이야기지만 주변 누군가는 그렇게 일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이었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잘못된 것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 법과 도덕에 비추어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

​너무도 당연한 행동이었다. 실제 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하고 있었다.

​정권이 바뀌었다. 지난 정권에서 벌어진 부당한 업무지시는 다시 생기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만약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최순실게이트와 같은 사태가 다시 벌어지고 나에게 부당한 지시가 떨어지면 그때는 나도 과장님처럼 거부해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똑같은 일의 반복

​다시 2018년 2월. 그 사이 정권은 바뀌었다. 바뀐 정권은 적폐 청산을 강조했다. 기대는 컸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처음 맞는 정권교체기도 하였고 지난 정권이 워낙 좋지 않게 퇴진하였기에 바뀐 정권은 무언가 다를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바뀐 정권도 똑같았다. KT&G 사장을 바꾸라 지시가 내려왔고 기재부는 또 그에 맞추어 시행계획을 만들었다. 민간 기업 사장을 정부가 나서 교체하는 이 일은 부당한 일이었다.

​차관보고를 기다리던 도중 컴퓨터 화면으로 보았던 동향보고라는 제목의 그 문건은 내가 알고 있던 KT&G 사장교체 계획을 문서로 정리한 것이었다. 기업은행을 통하여 사장해임을 추진하고 외국인 주주가 동의하도록 설득하겠다는 계획.

​실망스러웠다.

​적폐를 청산한다는 정권에서 왜 같은 일이 반복될까.

​후술하겠지만 이번 정권 들어 부적절한 업무처리라 생각한 일이 이번 일이 처음도 아니었다. 작년에 비슷한 일을 몇 번 겪고 공무원이라는 업에 대한 회의감은 이미 팽배했었다.

​우리 기재부는 최순실의 K스포츠재단에 돈을 내라는 것도 막았다던데 왜 이번에는 BH에서 시키는 데로 그대로 다하고 있는 것일까. 더 민주적이라는 정권으로 바뀌었다는데.

​같은 일이 왜 반복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있을 것도 없을 것도 같았다. 문서를 닫았다. 지우지는 않았다. 차관님께 보고를 드린 후 다시 세종으로 내려갔다.

며칠 뒤 우연하게도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L 회계사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도대체 왜 기재부에서 KT&G 사장을 바꾸려 하냐는 것이었다. 이미 언론에서는 정부에서 KT&G 사장을 바꾸려 하는 것 같다고 추측성 기사를 몇 번 내보냈다. 나는 L에게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냥 모른다 말하기 민망하여 ‘민영화된 기존 공기업들의 사회적 역할이 여전히 상당함에도 불구, 관리 감독 기재는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사장선임 등에 어쩔 수 없이 관여하는 게 아니겠냐. 그게 공익 증진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에둘러 대답해 보았다. 친구는 그렇게 하려면 다시 공기업화를 해야지 민영화를 시켜놓고 사장 인사에 개입하려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되물었다. 맞다.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친구에게 BH에서 KT&G 사장을 바꾸는 것을 원하고 있는 것 같다고, 내정된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가 흐른다고 답할 수는 없었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나는 여전히 부끄러웠다.

제보

​3월 초 차관님 보고를 위해 서울에 다시 올라갔다. 나는 예전에 앉았던 공용컴퓨터에 앉았다.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KT&G 관련 문건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상태로 컴퓨터 속에 남아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 없었다.

​내 업무가 아니었기에 조직 내에서 KT&G의 사장 인사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주장할 수도 없었다. 공익신고 대상인지도 모호했다. 더욱이 공무원 조직의 생리상 만약 내부에서 권익위에 공익신고를 한다면 누가 신고했는지 드러날 것이 분명했다. 사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BH에서 지시한 사항인데 정부 내부에서의 이의제기가 가당하기나 하랴.

그렇다고 그냥 가만히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보지 않았으면 모를까.

​자료까지 이렇게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 넘어가는 것은 과거 다짐을 저버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하나둘 눈 닫고 귀를 막은 상태로 공무원 생활을 하다 보면 나 역시 앞으로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데로 소신을 변경하면서 하루하루 업무를 처리하게 될 것 같았다.

​공무원 한명 한명이 부당한 업무처리를 보고 어쩔 수 없다고 넘어가는 것에서 지난 정권의 최순실게이트가 일어나게 만든 원인이었던 것 아닌가.

​나는 문건을 평소 알고 지내던 M사 기자에게 전달했다.

​그 사이 KT&G 사장 교체 건은 계획대로 추진되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교체에 실패했다. 외국인 주주들이 동의하지 않았다 하였다. 한편으로 기재부 내에서 알음알음 들어보니 연임된 KT&G의 백사장은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설사 문제가 많은 CEO라 하더라도 정당한 절차를 따르지 않고 민간 기업의 인사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건 당연하였다.

​문건을 받은 L 기자가 나에게 정말 기사로 내도 되는지 물었다. 나는 그러라 했다.

사직

​L 기자에게 문건을 넘기고 기사가 준비되는 도중 온갖 생각이 들었다. 기사로 나온 뒤 문건을 유출한 것이 나라는 것을 동료 누군가가 알게 될까 하는 걱정, 어차피 기사화가 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데 괜한 일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 기사가 나오면 주변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으로 추정되는 피해 등등.

​난 심성이 강하지 못한 편이다. 비난받는 것을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그런 나에게 혹여나 기사가 나온 후에 내가 문건을 넘겼다는 것이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당시에는 조직이나 주변 사람에 대한 애착도 컸다. 공무원 조직의 특성상 기획재정부도 한 번 입직하면 주변 사람들과 퇴직할 때까지 함께 지내야 한다. 조직 내부의 결속도 강했다. 조직 내 사람은 단순한 직장동료나 상사 이상이었다. 내가 넘긴 문건이 방송에 나오게 된다면 주변 분들이 곤란을 겪을 것은 자명했다. 그 모든 것들은 나에게 큰 압박이었다.

​3월부터 5월까지 일하는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다. 그렇다고 기사화되기로 한 일을 되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그럴 수 없는 단계가 되기도 했었고.

​5월 중순. 기사가 나왔다. 실제로 사장을 교체하는 데에는 실패한 사건이라서 그런지 큰 논쟁거리 없이 넘어갔다. 우리 부는 해명자료를 내어 해당 문건은 실무자가 스스로 참고하기 위해 만든 자료라 하였다. 상부에 일체 보고 없이 실무자가 보고 바로 파기한 것이라 설명하였다.

보고자료의 질을 보면 당장 알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해명이었지만 내가 인터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사실 여부를 증명할 수는 없었다. 차마 인터뷰할 용기는 없었기에 해당 문건은 보고된 적 없던 괴문서였던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보도 내용은 조금 아쉬웠다. 자료를 주면서 기대했던 취재의 초점은 기재부가 아닌 BH였다. 바뀐 정권에서도 부당한 지시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내용이 알려져 조금이라도 정권에 경각심이 생기기 바랐다. 시민들의 촛불로, ‘이게 나라냐’를 외치면서 바뀐 정권인데 이전과 똑같다면 너무 안타까운 일이지 않은가.

​그러나 사건은 후속 보도 없이 마무리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후 문건유출 경로를 파악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내려와서 해당 과를 조사하고 갔다고 들었다. 국무총리실 공직기강실에서는 기재부에 대해서만 비공개자료 관리실태를 별도로 감찰하고 갔다. 나로 인하여 기재부 전체가 피해를 본 것 같았다.

​문건 내용의 사실 여부, 그리고 그게 바람직한 결정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애당초 청와대 지시사항이었으니 문건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고초를 겪은 분은 국장님이셨다. 서울청사에 국장님과 함께 차관님 보고를 기다리던 중 어딘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알음알음 들리는 말로 유추해 보건대, 자료가 어떻게 유출된 것인지 경위를 파악하라는 지시였던 것 같았다. 전화를 받은 국장님은 기업은행에 전화하여 기업은행에서 유출된 것 같으니 전수조사를 해보라고 다시 지시하였다. 기업은행에도 괜히 미안하였다. 모두 내 잘못인 것 같았다.

​다행히 내가 유출했다는 것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모르는 일이다. 혹 누군가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른 척 해 주셨는지도. L 기자를 통해서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무관이 자료를 넘긴 거란 말이 우리 부에 돌고 있다고 했다. 문건유출이 걸린 것이라면 그만두면 된다고 마음 편하게 생각했다.

​며칠 뒤 국장님과 승강기를 단둘이 같이 탔다. 국장님이 마음고생 심한 얼굴로 말했다.

믿을 사람 없는 것 같아. 신재민 사무관 같은 사람만 믿어야지.

세상에나. 내가 그 믿지 못할 사람인데. 나 같은 사람만 믿어야 한다니. 국장님께서는 근무하는 동안 나를 상당히 아껴주셨다. 사직할 때까지도 말이다. 너무도 죄송했다. 깜냥도 되지 않는 주제에 소신을 지키겠다고 나를 아껴주는 분의 발목을 잡은 것 같았다. 소신이 중요하다 했더라도 나를 믿어주고 아껴주는 사람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었다면 적어도 나 스스로는 그것보다 더 다칠 각오를 해야 했던 일 아닐까.

​며칠 뒤 서울 출장 도중 심의관님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문건유출 이야기가 또 나왔다. 누가 유출한 것이겠냐, 우리 부에서 유출된 것은 아닐 것이다, 과거 비슷한 일이 있었을 때도 한 번도 누가 유출한 것인지 밝혀진 적이 없다 등등. 듣고 있기가 죄송스럽고 힘이 들었다.

​죄책감을 가지면서 일해나가는 것은 너무 힘이 들었다.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내가 자료를 유출한 사람인데 웃으면서 맞장구를 친다는 것은 곤욕이었다.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르게 일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유출한 사람이라고 손들고 나서는 것도 웃겼다. 공무원을 그만두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나를 믿어주셨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소신을 주장하는 것, 그것도 뒤에서 몰래 행동한 것은 비겁한 일인 것 같았다.

​공무원을 그만둔다면 그래도 죄송한 마음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행정고시 합격으로 공직을 시작했고 그동안 조직에서 쌓은 평도 나쁘지 않았었기에 계속 있었다면 적어도 남이 하는 만큼은 승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직함으로 포기하는 것이 작지 않아 보였기에 죄책감은 무뎌졌다.

​그만두고 나서는 후회를 많이 했지만, 적어도 그만둘 당시 아쉬움은 없었다. 사실 그럴 생각으로 3월부터 주변에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흘려두기도 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사건 하나가 흐지부지 지나가는 것.

​정권이 바뀌어도 부당한 업무처리가 이어지는 것.

​정치 권력의 본질이나 공무원 조직의 행태는 지난 정권이나 이번 정권이나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다.

​정부의 업무처리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내 천성도 어디 가지는 않을 터이니, 계속 공무원을 했었다면 나중에 높이 승진한 이후에 양심고백이라면서 더 큰 사고를 쳤을 것이다. 일찍 공무원을 그만둔 것은 잘한 행동인 것 같았다. 이렇게 글을 쓰는 지금도 말이다.

​그만둔 이유가 오직 이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사건이 결정적 이유였던 것은 분명 맞지만 비슷한 사건들은 여럿 있었다.

​조직 안의 한두 사람의 의지로는 관료제의 행태를 바꿀 수가 없다.

​글을 읽는 당신이 바꿔 줬으면 좋겠다.

●3편

내가 기획재정부를 그만둔 두 번째 이유

​국채 조기상환(바이백) 취소

​2017년 11월 14일. 다음날(15일)로 예정된 국채조기상환이 입찰 하루 전 전격 취소되었다. 입찰계획을 하루 앞두고 취소하는 일은 국채시장이 개설 된 이후 처음이었다. 규모는 1조 원.

​전례 없었던 사건에 시장금리는 상승했고, 언론에서는 기사가 쏟아졌다. 스왑시장에서도 금리스와프(IRS)와 이종통화스와프(CRS) 금리가 올라갔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혼란을 겪어 국채를 매도하고 있다고 보도되기까지 했다.

민간 누구도 이유를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 정부가 밝히지 않았으니. 국고채 입찰을 대행하는 한국은행에도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었고, 한동안 채권시장의 혼란은 말할 수 없었다. 추측성 기사들이 나왔다. 감사하게도 11월 말로 예정된 금통위의 금리상승에 대비하여 금리조정 수단을 보유하려 행한 판단이라는 정부에 유리한 분석도 그중 있었지만, 대부분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들이었다.

​국채시장은 기관이나 중앙은행이 주로 투자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억 원 단위 이상의 돈이 오고 가는 것은 이상하지 않지만, 그 국채시장에서도 1조 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더군다나 상환계획은 이미 10월 말에 정부 보도자료로 공고된 건이었다.

​1조원의 채권 상환이라는 정부 발표를 믿고 국고채 PD(Primary Dealer)들은 일정에 맞추어 채권을 준비하였을 거다. 국고채 브로커들은 정부에게 매각할 채권을 구해 놓았을 것이다. 1조원 규모로 말이다. 그게 하루 전날 취소된 것이다. 국가의 정책을 믿은 누군가는 큰 손해를 보았던 날이다.

​조기상환 취소가 발표된 이 후 세종시에 있는 국채과 사무실로 기자들이 들어와 따졌다. 로이터통신의 L 기자 등이 들어와 지금 국채시장 뒤집힌 것 알고 있지 않냐면서, 왜 바이백을 취소했는지 당연히 설명해야 한다고 캐물었다고 한다. 사무실에서는 당연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담당 사무관 선배가 홀로 고초를 겪으셨다.

​바이백 취소 발표 다음날. 부총리님은 기자들로부터 기재부의 바이백 취소로 외국인 투자자 등의 혼란을 초래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자 “그럴 만한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외국인들과 기관이 투자하는 국고채 입찰 시장을 하루 전날 흔들고 별일이 아니라고????? 나라 운영이 우습나?

부총리의 발언을 보도한 기사의 리플이었다.

​혼란스러웠다. 일이 왜 이렇게 진행되는지 몰랐다.

​공무원으로 일한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바이백 취소가 결정되는 장소에 함께 있었다.

​보름여간 서울에 있으면서 차관보님과 국장님, 그리고 과장님과 함께 부총리님께 관련 보고를 드렸었다.

​이미 그때부터 나는 공무원을 그만두고 싶었다.

​내 직업의 의미

​2017년.

​나는 국고국 국고과에서 국고금 관리 총괄이라는 업무분장을 받았다.

​일반회계와 특별회계를 합쳐 약 330조원 규모의 국가자금 지출의 스케쥴을 관리하는 업무였다. 매월 들어올 수입을 예상하고 부처에서 요청한 지출 규모, 전년도 실제 지출 규모 등을 고려하여 자금이 남을 경우 시중 금융사를 통해 운용하고 모자라는 자금은 국고채나 재정증권, 한국은행 차입 등을 통해 조달하는 게 주된 일이었다. 민간에서 근무한 적은 없지만 CFO 아래에서 수행하는 업무가 유사하다고 들었다. 회계연도가 끝난 후 세계잉여금이 얼마일지를 예측하고 관리하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거창하고 중요해 보이는 일일 것 같지만 세수여건이 좋으면 딱히 큰 역할은 없는 자리였다. 세수여건이 좋아 자금이 많으면 개별부처에서 요청하는 지출요구를 그냥 수용하면 되었으니까.

​2017년은 예산상 세수보다 실제 들어온 세수가 훨씬 많은 해였다. 2013년 세입예산 보다 실제 수납된 세입규모가 적어 결손이 발생한 이후부터 세제실에서는 조세예산 규모를 최대한 보수적으로 전망하려 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 외에도 내가 알 수 없는 소위 정무적 이유로- 세입예산은 실제 연도말 전망보다 상당히 적은 편이었다. 2016년부터 국고금 관리업무는 예산보다 더 들어오는 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따라서 2017년 한 해 내 개인적 업무목표는 자금조달규모를 줄이는 것이었다.

​재정증권(단기 자금 수급 차 해소를 위해 발행하는 국채)을 63일동안 1조원만 발행하더라도 이자비용은 거의 30억원이다. 재정증권 발행을 한 번만 줄여도 내 평생 연봉이 절감되는 거였다.

​국채는 말할 것도 없었다.

​매년 세입예산 이상으로 세출예산을 편성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국채 순상환이란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채무를 줄이는 데 예산을 사용했다는 말은 당초 계획보다 국채발행을 줄였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다른 한편에서는 국채를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하고 있으니.

​언론 등에서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채무상환으로 사용했다는 돈은 실제 채무의 순상환이 아니다. 기존에 빚진 돈이 10억 원이고 올해 5억 원을 새로이 빚지는 가계가 있다 하자. 기존 빚을 1억 원 갚았다 하더라도 새로이 빚지는 5억 원이 있다면 연도 말 그 가계의 빚은 줄어 들지 않고 오히려 4억원 늘어날 것이다. 그저 새로 빚질 채무의 규모를 줄인 것에 불과하다. 현대국가 대부분은 적자재정을 편성하고 있고 순채무상환이라는 것은 허상이다.

​실질적으로 채무의 총규모는 감소하지 않는 점을 고려한다면 결국 적자 국채 발행이 한번 결정되면 그 이자는 국가가 존속하는 한 거의 영구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적자성 국채는 애초에 발행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았다. 1조 원을 추가 발행한다면 이자율을 2% 라고만 가정해도 연간 발생하는 비용은 200억원이다.

​2017년 업무를 처음 담당했을 때부터, 적자성 국채발행을 조금이나마 줄이는 것이 내 역할이라 생각했다.

​얼마나 명확한가.

​5조원 발행을 줄이면 연간 1,000억 원이었다.

​조금만 노력하면 평생 국가 세금을 받고 살아도 떳떳할 수 있을 업무였다. 채무를 줄이고 싶었다.

​부총리 보고

​2017년 정부가 국회로부터 승인받은 적자성 국채의 최대 발행 한도액은 28.7조 원 이었다. 그리고 상반기가 끝난 6월 말 내가 예상해 본 2017년 초과세수는 20조 원이 넘었다.

​3월달 업무를 인계받았던 당시에 이미 발행한 적자성 국채는 15조 원. 추경 및 세수 변수 등을 고려해서 5조원의 추가 발행이 결정되었다. 총 발행액 20조원. 남은 적자성 국채 미발행 분은 8.7조원이었다. 당연히 이 돈은 발행할 필요도 없고 발행하면 안 되는 자금이라 생각했다.

​추경에서 세입예산을 다소 상향 조정 했음에도 불구하고 6월말 전망한 초과 세입 규모는 15조원. 사실 8.7조 원 미발행도 초과 세입 규모를 고려했을 때 너무나도 적은 돈이었다. 10조원 정도는 미발행 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국채과에서는 적자성 국채 미발행 분을 활용하여 기존 국가채무를 차환하여 국채 만기를 평탄화하려 했다.

​기존 국가채무의 차환이란 국채는 발행하되 조달된 자금을 재정지출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2018, 2019년 만기 도래 국채를 조기에 상환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국채 만기가 연장되어 해당연도의 국채 관리 부담이 감소하게 된다. 가계로 따지면 5년 뒤에 갚으면 되는 대출을 신규로 받아 내년에 갚아야 할 빚을 미리 상환하는 방식이라 할까. 이때 기존 채무의 조기상환(바이백)이 이루어진다.

​만기 평탄화용 차환을 진행할 때도 국채 발행이 필요하기에 차환 규모를 늘리게 되면 적자성 국채 발행 가능 규모는 줄어든다.

​당시 국고국장님은 관련 내용을 7월경 하반기 국채발행계획으로 정리하여 부총리께 보고드렸다.

​부총리님은 당시에 뭘 이런 것까지 자신에게 보고하냐며, 국고국 선에서 결정해서 처리하라 했었다. 비서실에서 보고받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국장님이 꾸역꾸역 찾아가서 보고한 건이었다.

​그리고 10월. 세수가 잘 들어오는 것이 너무나도 명확하였을 당시, 우리국은 적자성 국채발행을 8.7조 원 줄이는 중이며 이 경우 연도말 세계잉여금 규모는 얼마가 되는지 부총리님께 보고드리려 준비하고 있었다.

​2차관님 보고까지는 큰 문제 없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그 후 부총리 보고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내가 작성한 보고서는 초과 세입을 추경 예산 대비 15조 원 규모로 전망했었는데, 막상 조세 규모 예측을 담당하는 세제실에서는 10조 원 규모로 부총리께 보고드렸던 상황이었다.

​당시 초과세수의 규모와 그 처리문제는 국감 때부터 국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쟁점이었기에 규모 차이는 생각보다 민감했다.

​세제실은 1차관에 속해 있었기에 2차관님이나 재정차관보님의 업무 범위가 아니었다. 주 업무가 조세 규모의 예측이기에 다양한 세수예측 모델과 미시적 기초를 토대로 규모를 전망하는 세제실 조세분석과와 달리 기껏해야 국고과는 세입총량을 기반으로 한 선형 회귀분석 결과 정도로 세입규모를 전망할 수 밖에 없었다. 국고과 보고에서는 15조 원이라는 초과 세수 규모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부총리님은 어려운 분이다.

​그리고 높은 분이시다 보니 사무관보다 과장이 과장보다 국장이 국장보다 차관보가 부총리를 더 어려워 했다.

​부총리 보고에서 세제실과 다른 초과 세입 규모를 제시하면서 근거를 댈 수 없다는 것은 윗분들께는 큰 부담으로 여겨졌던 것 같았다.

​세제실은 15조 원이라는 초과 세입 규모에 동의하면서도 아직 세제실장님 보고도 마치지 않았다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렇게 보고는 늦춰줬다.

​10월 보고가 11월로 넘어갔고 11월 13일까지도 보고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국채과에서는 국채발행 축소 규모를 빨리 확정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보고하는 것이 무서워 적시에 상급자에게 관련 내용을 보고하지 못하는 조직은 죽은 조직이다.

​부총리님이 무서워서 보고를 늦추었다는 것은 민간에서 보기 얼마나 우스울까.

​문제 될 것 같은 내용은 보고 하지 않는다. 설사 보고를 하더라도 지적될 것 같은 내용은 보고서에 쓰지 않는다. 보고서를 작성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쉽게 쓰는 것이었다. 상사가 이해하기 어려울 내용은 가급적 보고서에 포함시키지 않고 최대한 쉽게 쓰는 것. 누락되는 내용이 그 속에 많았다.

​뭐 이것은 민간 대기업들도 다 똑같다고는 하더라.

​그러나 분명 옳지 않은 방식이다. 그리고 늦어진 보고 속에서 결국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11월 13일. 바이백 취소발표 하루 전

​퇴근 무렵 차관보님께 전화가 왔다.

내일 아침에 부총리에게 보고해야 한다면서 적자성 국채 발행계획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라는 지시였다.

​차관보님이 지시한 보고서의 톤은 이전 차관님께 까지 보고된 내용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부총리로부터 이미 지시받은 내용이 있었는지 남은 국채 8.7조원을 발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추가 발행을 진행하는 것으로 보고서를 쓰라 하셨다.

​물량 일부는 조기상환용으로 사용되었거나 사용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최대 발행 가능 규모는 4조 원에서 수준이었다. 차관보님은 그중 2조 원 정도는 발행하는 것으로 보고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을 하셨다.

​연간 400억 원의 재정부담이 국가에 추가로 주어지는 셈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대통령 정례보고에 해당 내용도 보고할 것이라 하시면서 대통령 보고자료도 준비하라 하셨다.

​보고서를 마무리 한 후 차관보님이 물으셨다.

신 사무관은 어떻게 생각해? 이거 발행하는 게 맞는거야?

기회였다. 나는 당연히 발행하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다. 세수가 좋은 지금 발행할 실익이 없다고. 국회 등 외부에서도 지적이 들어올 것이라고. 연간 발생하는 재정부담도 말씀드렸다.

​당연한 이야기었다. 일반 가계를 생각해도 자명했다. 월 100만 원의 수입을 거두는 사람이 300만 원을 지출하기 위해 200만 원의 대출계획을 잡았다고 하자. 당연하게도 만약 보너스가 들어와서 수입이 200만원으로 늘었다면 대출을 줄일 것이다. 200만 원의 대출을 유지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이번 정권들어 처음 시도하는 정책도 아니었다. 정권과 관계없이 수십년간 반복되었던 국채발행 관리 방식이었다. 세수가 많으면 예정된 국채발행을 줄이는 것은 당연한 판단이었고 지난 정권 때도 지지난 정권 때도 그리고 그 이전 정권에도 그렇게 해왔었다.

​당연하게도 차관보님께서 다 아시는 내용이었다. 차관보님은 확신이 필요하신 것 같았다.

​차관보님이 지시하셨다.

보고서 결론 바꿔라. 적자성 국채 추가발행 안 하는 걸로 다시 써.

차관보님은 존경할만한 분이셨다.

​11월 14일. 바이백 취소 날

​차관보는 국회 옆에 위치한 수출입은행에서 부총리께 아침 일찍 보고한다 했다. 나는 보고자료를 준비하여 세종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첫차를 탔다.

​당시 국고과장은 고위공무원 교육이 진행 중이었기에 국채과장과 함께 차관보님께 갔고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차관보님은 부총리님 보고를 위해 들어갔다.

​국회에서 기재위가 예정되어 있었다. 국회로 이동하여 관련 내용을 국장님께 보고드렸다. 기다리는 동안 이상한 이야기가 흘렀다. 다른 1급들이 다 있는 앞에서 우리 재정차관보가 부총리로부터 말도 못할 정도로 심한 말을 들으면서 혼이 났다 했다.

​차관보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국채과장과 수출입은행으로 오라 하셨다.

​차관보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1년차 사무관이 과장님이나 국장님으로부터 페이퍼나 업무로 심하게 혼났을 때나 볼 수 있는 표정. 얼이 나가 있는 표정이셨다.

​죄송스러웠다. 괜히 어제 마지막에 차관보님께 국채 추가 발행을 중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드렸나 싶었다.

​차관보님께서는 그래도 침착하셨다. 공직 생활 중 제일 심하게 야단맞은 것 같다고 하시면서, 정무적 고려가 부족했던 것 같다고 하셨다.​

그놈의 정무적 고려.​

나는 정무적 고려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차관보는 발행하는 것으로 보고서를 고쳐야 하겠다고 지시하면서 최대 발행규모가 왜 8.7조원이 아니라 4조원인지에 대하여 부총리가 화를 내셨다고 말하셨다. 오후에 발행하는 것으로 다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보여드리자고 하셨다.​

점심시간 동안 국회에서 적자성 국채를 발행할 수 있는 최대 한도로 추가 발행하는 것을 내용으로 보고서를 만들었다. 보고서에는 결론만 있으면 안되었기에 추가 발행이 가지는 장점도 제시하여야 했다. 나는 추가 발행이 가지는 장점을 알지 못했다. 발행할 이유는 아무리 곱씹어봐도 없었다.​

부총리님을 제외하고는 차관님 이하 간부님들도 모두 추가 적자성 국채발행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어찌저찌 보고서는 공간이 채워졌다. 최대 발행이 가능한 국채규모는 기존 4조원에서 5조원으로 1조원 늘려 보고하기로 했다. 국채시장에 큰 무리가 가겠지만 어찌어찌 발행하면 될 것도 같았다. 지금 국채시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셨다.​

보고서와 내용을 바꾸고 차관보님 뿐 아니라 국장님과 국채과장님, 그리고 나까지 함께 들어갔다. 김동연 부총리께 대면보고를 하는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애초에 부총리 보고에는 사무관이 잘 들어가지 않으니까.​

부총리님은 아직 화가 완전히 누그러 들지 않아 보였다. 보고하러 들어가자마자 차관보님을 다시 질타하셨다.

그 자리까지 올라갔으면 정무적 판단을 해야 하는 것 아니야?

국장이나 과장 입장에서는 국채 발행 안한다고 할 수 있어. 당연한 판단일 수 있단 말야.

그런데 당신은 그러면 안되는 것 아니야? 1급까지 올라갔으면 역할을 해야지!

1급까지 올라가 놓고도 뭐가 중요한지 판단을 못해?

손에 잡히는게 있었다면 집어 던질 듯한 기세였다. 부총리의 질타는 계속 되었다.

그리고 왜 추가로 발행할 수 있는 적자성 국채가 8.7조원이 안되는 거야? 설명해봐.

그리고 발행가능 한도가 또 늘었네? 이건 왜 그런 거야? 늘어날 수 있구만!

발행할 수 있는 물량 최대로 확보해!

국채 만기평탄화를 위한 조기상환으로 일부 사용되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부총리는 보고를 들으면서 어찌되었건 최대로 발행할 수 있는 물량을 확보하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부총리님은 왜 적자성 국채 발행 중단을 멈추면 안되는지 설명하셨다.​

정무적 고려!​

드디어 그 말로만 듣던 정무적 고려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정무적 고려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정권말로 이어지면 재정의 역할이 갈수록 더 커질 것이기에 그 때를 위해 자금을 최대한 비축해 두어야 한다는 것. 국채 발행 후 세계잉여금으로 비축하여 다음 다음연도 예산편성에 사용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두 번째는 금년 국채 발행을 줄이게 된다면 GDP 대비 채무비율이 줄어든다는 것. 정권이 교체된 2017년도에 GDP대비 채무비율이 줄어둔다면 향후 정권이 지속되는 내내 부담이 가기에 국채발행을 줄일 수 없다는 이야기 였다.​

두 내용 모두 납득이 가지 않았다. 첫 번째 이야기는 국가재정법 상 불가능한 예산편성 방법이었고 두 번째 이야기는 국민을 기만하는 내용 같았다.​

GDP 대비 채무비율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에 국채 발행을 중단하면 안된다니. 부총리님께서는 앞으로 GDP대비 채무비율이 증가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계셨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경제여건은 그다지 좋지 못했고 정부의 정책 수단은 제한적이었다. 정부내도 그랬고 국회에서도 재정의 역할은 갈수록 강조되고 있었다.​

그렇게 될 때 비교 대상이 될 기준점이 박근혜 정권의 교체기인 2017년이 될 것이다. 미래를 고려해 본다면 2017년의 GDP대비 채무비율을 낮추어서는 안된다는 말이었다. 이시기의 GDP대비 채무비율을 낮추면 향후 정권의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부총리가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8.7조원의 국채를 발행하면 1년 이자 부담만 2,000억원 돈이다. 이자도 국민 세금으로 내는 것이다. 아무리 부총리는 정무직이라 하나 재정당국의 수장으로 오히려 청와대나 정치권에서 같은 이야기가 나올 때 부총리가 막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실망스러웠다.​

고위 공무원이 가져야 한다는 정무적 고려, 정무적 판단이라는 것은 이런 것인가? 정권이 유지되도록 기여 해야 한다는 것이 정무적 고려인 것인가? 공무원은 해당 정권의 정권 재창출을 사명으로 일을 해야 하는 것인가?​

내가 열심히 일해 승진하여 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1급 차관보가 되면 해야 하는 정무적 판단이란 것은 이런 것인가?​

승진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다지 들지 않았다.

​첫 번째 이야기도 말이 되지 않았다. 국가재정법 제90조에 따를 때 세계잉여금은 발생 다음연도에 법에 따라 처리된 후 잔액은 세입에 강제 이입처리 되도록 하고 있었다. 돈을 남겨둔다고 하여도 추가경정예산 편성에만 일부 활용할 수 있을 뿐, 다음 다음연도 예산편성에 사용할 수는 없다.

​부총리님께 세계잉여금은 다음 다음연도 예산에 사용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다. 부총리는 과거에 활용했던 기억이 있다고 예산실을 통해 확인해보라 하셨다. 연도초에 비공식적으로나마 법률자문도 받았던 건이었고 얼마 전까지도 자료로 확인해본 사안이었다. 적어도 최근 10년 내로는 없었던 것으로 확인했었고 부총리님께도 그렇다고 이야기 드렸다.

​국가의 회계연도는 단년도이다. 국회로부터 승인받은 국채 발행 역시 당해 연도 예산지출에 있어 예상되는 세입부족을 해소하기 위함이다. 다음 연도에 예산을 편성함에 있어 자금이 부족하다면 다음 연도 예산안을 통과시키면서 국채 발행을 포함시키고 국회의 승인을 받으면 된다.

​세계잉여금으로 예산을 편성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추가경정예산이 그것이다.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는데 있어 야당의 주된 공격이 ‘재원을 어디서 구할 것이냐’라고 할 때 세계잉여금이 있을 경우 ‘국민에게 추가적인 부담을 지우지 않고, 국가의 남은 돈으로 예산을 편성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건 편법에 불과하다. 국가 회계연도가 단 년도인 이상, 예산을 편성할 회계연도에 국채 발행이 필요하다면 그 회계연도에 승인을 받아야 할 것이다. 추경예산편성이 필요하고 그때 국채 발행이 필요하다면 그 당시 국회를 설득하면 될 것이다. 물론 국회를 통과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야당 의원을 설득하는 과정에 있어서 말도 되지 않는 반대급부를 줘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비용이 연간 2,000억 원이나 발생하는 것인가.

​더욱이 부총리님은 국채 발행 후 남은 자금을 추가경정예산으로 편성하려 하는 것도 아니라 2년 뒤 본 예산에 활용하겠다는 취지셨다.

​어찌되건 간에 부총리님께서는 GDP대비 채무비율 등을 고려했을 때 국채발행을 중단하여 이번 정권에 부담을 주는 것은 잘못되었다 하셨다. 현 시점에서 최대로 발행할 수 있는 규모를 확인하고 보고하라 지시가 내려졌다. 정무적 고려가 포함된 정책 판단이었다.

​보고는 끝났지만 숙제는 남았다. 적자성 국채의 발행 가능 규모를 늘려야 했다. 일단 가능한 재원을 다 끌어올 필요가 있었다. 다음날로 예정된 1조원의 국채 조기상환을 취소하기로 했다. 이미 공지된 일이었기에 국채시장에 무리가 갈 수 있었지만, 지금 국채시장을 고려할 때가 아니라 하였다.

​한국은행에 다음날로 예정된 국채 조기상환을 취소한다 통보하였다. 그렇게 2주전 이미 공지되었던 1조 원의 조기상환은 시행을 하루 앞두고 국채시장 마감 전 취소되었다.

​국채금리는 현물 선물 모두 올라갔다. 국가에 매각하기 위해 채권을 준비해두었던 브로커와 딜러들은 앉은 자리에서 손해를 보였다.

​그런 경우가 없었기를 바라지만 선물시장 등에서 금리 하락 포지션에 큰 돈을 투자했던 투자자는 손실규모가 컸을 것이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어쩌면 누군가는 포지션을 잘못 설정했다 직장을 옮겼었을 수도 있다.

​언론 보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국장님과 과장님은 언론사에 열심히 연락하여 기사 톤을 낮춰달라고 사정했다.

기자님 이거 제목 뭡니까. 국가가 사기쳤다? 사기는 아니죠. 어떻게 국가가 사기를 칩니까. 이렇게 기사 나가면 국민들이 정부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어디까지나 계획을 변경한 겁니다. 제목 워딩만 좀 부드럽게 해 주십시오.

시장을 안정화 시켜야 할 정부가 시장을 흔들었다.

​그것도 국채 이자율 시장을.

​사실 약속을 어긴 것이니 사기라 볼 수 있는 것도 아닌가?

​국채시장에서 근무하는 분들을 뵐 면목이 없었다.

​적자성 국채를 추가 발행하면 국채시장은 더 망가질 터였다. 당시 국채시장 누구도 국가가 적자성 국채를 추가 발행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이미 십 년이 넘게 반복된 일이었다. 정권과 관계 없이 재정여건이 좋을경우 적자성 국채 발행 규모는 예산상 한도 보다 줄여 왔었다.

​바이백 취소 이후

​부총리님의 지시가 있기는 했지만 적자성 국채 8.7조원을 전액 발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국채시장도 버티지 못할 것이었고 현실적으로 조기상환에 일부 재원을 사용했었기도 했다. 국채시장 여건 등을 고려했을 때 최대 발행 규모는 5~6조원이 한계로 보였다. 발행 규모를 확정하여 다시 보고를 드려야 했다. 1주일가량 서울에서 묵었다.

​국채 추가 발행 규모에 따른 GDP대비 채무비율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모수인 GDP변화에 따라 GDP 대비 채무비율은 요동쳤다. 경제정책국으로부터 GDP규모를 받아 계산하라 지시받았다. GDP대비 채무비율은 나중에 확정 GDP에 따라 또 그 수치가 크게 달라질 것이었다. 이 분석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며칠 뒤. 4조원 후반을 발행하기로 결론 내고 다시 부총리 보고에 들어갔다. 부총리 역시 기자들로부터 바이백 취소 이유를 설명하라는 요청을 많이 받는 등 홍역을 치른 후였다. 부총리가 말했다.

난 분명히 조기상환 취소하라고 한적 없다? 내가 시장 흔드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데.

시장에 공표한 거 알았으면 난 절대 못하게 했을 거다.

내가 그날 좀 세게 말해서 알아서들 조정했던 것 같은데 앞으로 그럴 필요 없어요.

그게 끝이었다. 국채시장과 금리를 흔들었던 국채 조기상환 취소건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도 잘못했다 하지 않은 상태로.

​갑자기 예전 행정법에 나오는 학설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국가 무오류설. 국가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우리는 분명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나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국채과에서 국채시장 국고채 우선 거래 딜러(PD) 등을 만나면서 사과하였다고 들었다. 그러나 국채시장에 어디 PD만 있으랴.

​부끄러웠다.

●4편

보고

부총리님께 보고가 이어졌다.

​부총리님께서 적자성 국채 4조원의 추가 발행 보고를 받으시고 예상되는 GDP대비 채무비율을 몇 번 계산해 보셨다. 이게 한계냐고 되물으시더니 아쉽긴 하고 부담되긴 하지만 이 정도 수준으로 발행하자고 하셨다. 추가 발행이 발표되면 국채시장은 또 한바탕 홍역을 치를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12월 발행량이 기존 계획에서 4조 원이 추가되는 것이니.

​국장님께서 나서셨다. 부총리님께 4조원을 발행하겠다는 보고를 드린 이후에 국채시장의 부담 등의 사유를 들면서 아무래도 국채 추가 발행은 부담이라 말씀하셨다. 부총리님이 말씀하셨다.

​나중에 누군가가 추가로 국채를 발행하기로 한 의사 결정의 책임 물을까 부담되는거야?

나중에 실무진들이 다칠까봐?

그러면 경제관계장관회의에 안건으로 올려. 거기서 장관들이 결정한 걸로 할게.

그러면 나중에라도 실무진 다칠 일은 없을 것 아니야.

중요한 건 누가 다치느냐 다치지 않느냐가 아니었다. 그건 훨씬 미래의 일이었다. 그보다 이자가 발생하는 것. 적자 국채를 발행하는 순간 불필요한 이자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에 손해를 끼치는 일이다. 이대로 가면 거꾸로 평생 무보수로 공무원 일을 해도 국가에 끼친 손해를 갚지 못하게 생겼다. 국채시장이 망가지고 금리가 오를 것도 뻔했다. 연도말에 그렇지 않아도 미국 금리인상이 가시화 된 상황에서 금리상승 충격을 가하면 좋을 일이 없었다. 그 피해는 고스라니 국가경제 전반으로 파급되는 것이다.

​하지만 부총리님께 보고하는 와중에 사실관계에 대한 대답 외에는 내가 말할 수 있는 발언권은 없었다.

​경제관계장관회의 안건을 만들기로 했다. 발행 이유를 써야 하는데 나는 도대체 왜 세수가 넘쳐 흐르는 지금 이 11월 말에 적자성 국채를 추가 발행하는 것인지 여전히 쓸 말이 없었다.

​결정된 내용을 2차관님께 보고드렸다. 마침 예결위 예산 심의 도중 국회 기재부 집무실에 혼자 계셨다. 나는 국회 기재부 사무실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고 과장님께서는 이런 일은 빠른 보고가 중요하다 하시면서 차관님께 보고하라 전화로 지시하셨다. 털레털레 자료를 들고 보고드렸다. 2차관님께 혼자 보고 드렸던 것은 처음이었다.

​2차관님께서는 가만히 듣고 계셨다. 2차관님께서 되물으셨다.

괜찮겠어?

나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뭐라고 답했는지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고 했던가.

​공무원을 그만두고 싶었다.

​정상대로

​부총리님께 편지를 준비했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적자성 국채가 추가 발행되는 것을 바라볼 수 없었다. 국채시장에 충격이 가해질 것이 눈에 보였다. 국채과에 있는 후배 사무관에게 내용을 보여주고 고쳐달라고 했었다. 같이 쓰자고 운을 띄었다. 부담스럽다면 나 혼자라도 좋았다. 뭐라도 하지 않는다면 분명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다.

​그렇게 편지를 준비하고 있을 때 즈음.

​당시 박성동 국장님이 나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정말 아니다.

발행하면 연간 이자비용만 천억 원이 넘어가는데 이거 누가 책임질 거냐고.

내가 지금까지 상부에서 시키면 어지간하면 시키는 데로 다 수용하고

하라면 하라는 데로 다 했는데 이건 아니야.

필요도 없는 국채를 12월에 발행해서 이자 물게 생겼다. 이게 말이 되는 거냐?

페이퍼를 다시 준비하라 하셨다.

​누군가가 부총리가 그렇게 강하게 주장한 건인데 결정을 다시 돌릴 수 있겠냐고 되물었다.

​국장님은 두 번 안되면 세 번 네 번이라도 보고해야겠다고 하시면서 광화문청사 부총리 집무실에 찾아갔다.

​신 사무관. 클립을 페이퍼 양쪽에 둘 다 끼워두라고.

지금 우리는 부총리 한테 반기를 드는 거니까

부총리가 보고서 보다가 집어 던질 수 있단 말야.

집어 던지면 낼름 다시 가서 가져다 드려야 되는데 그 때 페이퍼 빠져있으면 안 된다고.

튼튼하게 꽃아.

국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웃으셨다. 멋있으셨다. 국장님같은 역할을 하는 공무원이 있기에 그래도 국가 정책이 큰 오류 없이 돌아가는 것 같다고도 생각이 들었다.

​부총리 보고는 생각했던 것보다 부드럽게 끝났다. 의외였다.

​부총리님은 왜 추가 발행이 안되는지, 국채시장에 어떤 타격이 가해지는지 보고를 들으시더니 정말 발행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느냐 되물으셧다. 국장님께서 그렇다고 하니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그리고는 알겠다고,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국장님의 승리셨다.

​왜 심정이 바뀌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2차관님도 별도로 찾아 뵙고 설득했었기에 마음이 변하셨던 거라는 말도 있었고, 당시 과거 국채과장을 역임하셨던 K 정책실장님께서 직언했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바이백 취소로 국채시장이 뒤집혔었던 것도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어쨋건 결정적인 것은 국장님의 보고였다. 가만히 계셨다면 2017년 12월. 4조 원의 적자성 국채가 추가 발행되었을 것이니까.

​발행하지 않기로 결정되면서 모든 것은 잘 끝났다. 비록 바이백 취소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지만 말이다.

​국장님 이하 공무원들끼리 잘 끝났다고 애써 위로했다. 바이백 취소도 잘했던 것이라 재평가했다. 바이백 취소로 인한 언론 보도와 마찰이 없었다면 부총리가 절대 고집 꺽지 않았을 거라 하면서.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국채 시장을 한 번 망가뜨려 놓고 그 때 안 망가뜨렸다면 더 크게 망했을 것이라 위안하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난장판 : 청와대의 개입

​적자성 국채의 추가 발행은 없는 것으로 결정났다. 대통령 월례보고 자료도 그에 맞추어 다시 수정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추가 발행하지 않기로 결정된 것이기에 보고안건에서 빠질 수도 있다 하였다.

​그 때 즈음 청와대에서 국장님을 소환했다고 하였다. 왜 발행하기로 했던 적자성 국채 추가 발행이 취소된 것인지 소명하라는 요청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분위기를 보니 청와대 입장이 생각보다 강경한 것 같았다. 적자성 국채의 추가 발행을 강하게 요구해 왔다.

​어처구니없는 지시였다. 실상을 알고 보니 더 그랬다.

​대통령에게 보고하려 하는 경우 부처에서는 청와대에 보고안건을 먼저 제시해야 한다. 청와대는 안건을 보고 그 경중에 따라서 대통령 보고 일정을 잡는다.

​이번에도 부총리가 대통령 월례보고를 요청하자 청와대는 보고안건을 요구했다. 그리고 난 후 보고 안건에 따라 소관과에 개별 연락을 하여 안건 자료 내용을 취합 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수석보좌관회의를 열어서 안건 내용을 회의했고 부총리의 이번 보고건은 대통령님께 대면으로 보고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보고 안건들은 수석보좌관회의를 한번 더 거쳐 안건 마다 다시 결론을 내린 후 대통령에게 경제관련 보고라 하면서 이미 보고를 끝마쳤다고 들었다. 그 후 부총리에게는 이미 보고된 건이니 대통령 보고가 필요 없다고 말하였다 한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고 했다. 청와대에서는 부총리가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을 최소화하길 바란다고 들었다. 부총리가 직접 대통령께 보고하는 것은 최소화하고 청와대에서 안건을 자체적으로 검토하여 수석이나 정책실장 등이 대통령께 관련 내용을 보고한다 들었다.

​따라서 국장님의 직언으로 마지막에 결정이 바뀐 적자성 국채 추가발행계획은 이미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심도 깊은 논의를 거쳐 추가 발행을 하는 것으로 결정된 후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된 사안이었던 것이다.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는 무슨 자료로 논의를 하고 어떤 토의를 거친 것일까. 거기에도 내가 모를 또 다른 정무적 판단이 있는 것인가. 이럴거면 부처는 왜 있는 것일까. 나는 혼란스러웠다.

​청와대에서는 이미 결정되어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된 이 사안은 되돌릴 수 없으니 기존 계획대로 발행하라고 요구하였다. 나는 이 꼴이 우습고 어이가 없었다. 국민들은 이런 의사결정 방식을 알까 싶었다. 이런 일처리 방식도 공무원이 알게 된 직무상 비밀인 것인가. 외부로 알리면 안될 비밀은 비밀일 것 같았다. 외부로 알려지면 아무도 정부의 의사 결정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니. 4조 원 내외의 국채 추가 발행 여부는 청와대에서 이렇게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 역시 부총리님께 보고하여 컨펌을 받은 사안이었다.

​그리고 대통령께 보고했는지 여부를 떠나서 적자성 국채는 발행하지 않는 것이 맞았다. 돈이 많은데 빚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실무선에서는 청와대가 뭐라고 하건 신경쓰지 않았다. 국채과 사무관 선배는 부총리님께 보고한 내용에 따라 적자성 국채 추가 발행이 없는 것으로 12월 국고채 발행계획을 수립하였다. 기자들에게 보도 1시간 전 엠바고를 걸고 보도자료를 배포하였다. 보도자료만 나가면 이제 모든 것은 끝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보도자료를 배포한 이후 국회에 있는 간부님들 전화가 요동치며 울리기 시작했다. 청와대였다.

​당장 국채 추가 발행을 안 하기로 한 12월 발행계획 보도를 취소하라는 지시였다. 엠바고를 걸긴 했지만 이미 기자들에게 배포된 내용이다. 발행 계획 내용은 국채시장 구성원들 대부분이 거의 아는 상황이었다. 금융권은 어느 조직보다 소문이 빠른 곳이다. 청와대가 생각이 있는 것인가 싶었다. 만약 여기서 언론 보도를 취소한다는 것은 국채발행 정책에 대한 국가 신뢰를 정말 땅으로 처박는 것이었다. 금융시장은 이렇게 다루어서는 안 되는 곳이다.

​청와대의 기조는 매우 강경했다. 따르지 않으면 직접 나설 것 같은 분위기였다. 현장 분위기는 혼란스러웠다. 누군가는 국회 복도에서 언론사들에 연락을 돌리면서 보도를 취소할 수 없을지 사정했다.

​그 때 국채 과장님이 나섰다. 청와대가 뭐라 그래도 적자성 국채 추가 발행이 없는 것으로 보도한 12월 발행계획은 절대 취소할 수 없다고 하셨다. 위기 때 진면목이 드러나는 법이다. 부총리께 보고를 하고 발행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안이었기에 실무진 의지만 확고하면 아무리 청와대라고 하여도 결정을 뒤바꿀 수는 없었다.

​보도자료가 나오고 난 후에도 청와대의 요구는 멈추지 않았다. 국채 발행에 대한 재공고를 내서 발행을 추가하라 했다.

청와대 경제수석과 부총리가 전화로 싸웠다고 했다. 부총리가 ‘내가 대통령께 보고 하겠다고 할 때 시켜주지도 않더니 이제 와서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고 있다’고 화를 내었다고 하였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난 정권 때 당시 유일호 부총리에게 대통령 대면보고 한 적 있냐고 캐물었던 것이 지금 정권의 주축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제를 총괄한다고 말하는 경제부총리가 대통령 대면보고를 한다고 했을 때 청와대에서 스크린 한다는 것이 합리적인 일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정책의 합리성 여부를 떠나서 대통령에게 보고된 사안이라 하면서 이건 무조건 지켜져야 한다는 식의 청와대 조직은 정말 국민을 위한 정책을 펴고 있는 것인가? 더구나 나중에 들어보니 대통령 보고조차 서면보고였다 들었다.

​촛불시위에 나갔던 국민의 한 명으로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행태를 문제 삼아서 ‘이게 나라냐’라고 외치면서 정권을 바꾼 것이 아닌가? 바뀐 정권도 왜 정책 의사 결정 방식은 바뀐 것이 없을까? 국민을 위한 정부라고 했지 않은가.

공무원을 그만두고 이 현실을 알리고 싶었다. 이런 업무 처리방식은 잘못된 것이다. 바뀌어야 한다.

​이번 정권의 문제는 아니다. 매 정권 그랬다고 한다. 바꾼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바뀌는 것은 없는 것인가. 글을 읽는 당신이 바꾸어 줬으면 좋겠다.

​청와대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나,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나 청와대는 둘 다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때도 실제 경제 수장은 경제부총리가 아니라 청와대 경제수석인 안종범이었었고 그건 문재인 정부 때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기재부 공무원들은 중요 정책을 다룰 때 부총리 뿐만 아니라 청와대에도 보고한다. 청와대 보고는 부총리 보고와 같은 중요도로 여겨진다.

​청와대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특히 인사 결정에 그렇다. 주요 간부인사는 사실상 부총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청와대에서 진행하는 것이기에 간부로 가면 갈수록 부총리보다 청와대의 의중을 많이 신경 쓰는 것으로 보였다. 사실 청와대의 각 비서관은 차기 부처 차관으로 유력한 자리이기도 하다.

​왜 얼마전 KBS뉴스에서 보도된 적도 있지 아니한가. 기재부 국장들이 여러 경로를 통하여 안종범 당시 청와대 수석에게 인사와 관련한 부탁을 했던 것을. 이번 정권도 다르지 않다. 그건 청와대 조직과 일처리 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다.

​이럴 거면 부총리, 그리고 장관을 왜 두는지 모르겠다. 수석들이 대통령을 만나고, 부처 장관의 대통령 보고는 청와대에서 스크린해서 못오게 하고, 중요 결정들은 수석보좌관회의를 열어 처리한다면 말이다. 그렇게 내려진 결정이 꼭 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부총리, 장관은 무엇인가. 그저 국회 상임위를 상대하기 위한 방패인 것인가. 국민들은 부총리와 장관이 해당 분야의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라 믿고 있는데 말이다.

​대학시절에 대통령학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청와대 구조를 배우는 행정학과 전공과목이었다. 그때 교수님께서 미국의 경우 재무부장관은 언제건 원할 때 대통령에게 보고가 가능하다고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재무부 장관은 백악관 바로 옆에 위치한 재무부 건물로 와서 직원들에게 대통령의 지시를 설명하고 그 지시에 대해 논의하고 의사결정을 내린다.

​한국은 왜 이 당연한 것이 안 되는 것인가.

​청문회 때문일 수도 있다. 정말로 대통령이 함께 일하고 해당 분야의 정책 수립을 맡기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청문회를 통과하기는 쉽지 않으니까. 그러니 진짜 실권은 청문회 없이 대통령이 원하는 인물을 앉힐 수 있는 청와대 수석에게 주는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장관은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용으로 국회 통과가 쉬운 사람 위주로 물색해서 앉히는 것이다. 친구들로부터 몇몇 작은 부처의 경우 장관들조차도 실제 의사결정을 미루고 청와대만 바라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세종시 때문일 수도 있다.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과 행정부의 거리가 너무 멀기에 지근거리에 위치해 있는 청와대의 역할이 커지고 행정 각부의 장관보다는 청와대 수석들의 보고에 더 정책 영향력이 커지는 것일 수 있다.

​어쨋건 그로 인하여 세종에 있는 행정부는 지금 제대로 된 업무지시 및 보고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행정 집행은 청와대가 아닌 개별 부처에서 한다. 정보도 개별부처에 우선적으로 모이고 정책페이퍼도 이곳에서 작성된다.

​정책 페이퍼를 쓰고 나면 이걸 청와대에 보고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고민한다. 청와대에 보고를 하기로 결정 하더라도 청와대 지시와 부처 명령체계 내의 지시가 다르면 재차 고민한다. 누구말을 따라야 하는 것인가. 청와대도 수석들이 관장하는 업무범위가 중첩되어 있어서 복잡한 건은 여러 수석들마다 목소리가 다르기까지 한다.

​의사결정은 늦어진다. 무언가 정책 아이디어를 내고 추진해보고자 할 경우 부처 내부 뿐만 아니라 청와대에도 뛰어 다녀야 한다. 세종에서 청와대를 갔다 오면 하루가 걸린다. 업무협의에만도 하루가 지날 것이다. 그럴 바에는 그냥 새로운 일을 만들지 않고 청와대만 바라보는 것이 낫다.

​청와대는 청와대대로 공무원이 지시해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개별부처의 특정과에 특정업무를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은 공식적으로 청와대 조직에 없다. 그러니 지시를 받으면 비공식적으로 처리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다시 부처 내부의 보고 루트를 따라 처리해야 한다. 그 사이 수많은 반발점들이 다시금 발생한다. 정책은 어딘가로 표류하게 된다. 청와대의 지시가 비합리적인 사안이거나 현행 법령에 비추어 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 그걸 검토하고 다시 보고하는데 다시 한 세월이 걸린다.

​기형적인 구조가 아닌가. 행정부 내부에서 정책의사의 결정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미국 재무부와 비교해 보자. 사건 A가 터졌고 재무부 혹은 기획재정부에서 이를 인지했다면 미국은 재무부 장관이 그냥 바로 옆 건물인 백악관에 가서 대통령께 보고하고 지시 받고 다시 백악관 옆에 위치해 있는 재무부 건물로 가서 논의하고 업무처리를 하면 된다.

우리나라와 비교해 보자. 사건 A가 터졌다. 기획재정부에서 해당사건을 담당하는 과는 부총리께 까지 내부보고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러면서 청와대에도 보고 해야 할 사건인지부터 일차적으로 고민한다. 사실 내부보고부터가 어렵다. 기획재정부는 세종에 있지만 기획재정부 장관인 부총리는 항상 광화문 서울청사 집무실에서 근무하고 있기에 내부 보고를 위해서도 세종에서 서울까지 올라와야 한다. 사실 부총리님 이전에 국장님이나 차관님만 하더라도 세종에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서울에 분산되어 있는 집무실을 돌면서 보고를 해야 한다. 여기서 최소 하루. 꾸역꾸역 보고를 마치고 결정을 받았다면 이제는 부총리가 대통령 보고를 위해 청와대에 미리 안건을 통보해서 보고 일정을 받아야 한다. 통상 청와대는 부처 장관의 대통령 보고가 있기 전에 부처 국장이나 과장을 들어오게 하여 관련 내용을 설명하게 한다. 여기서 최소 이틀.

내가 경험한 것처럼 이 과정에서 청와대가 이미 내부 결정을 끝내고 보고한 건이라고 보고를 물려버릴 수도 있다. 아니면 그 과정에서 부총리 결정과는 다른 내용을 업무를 담당하는 과에다가 지시할 수도 있다. 그러면 정책 결정은 다시 산으로 간다. 여기에 정치권까지 개입하기 시작하면 그 사건이 어떻게 해결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되어 버린다. 합리성은 그때부터 없어진다.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합리적인 의사 결정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이상한 것 아닌가.

​당시 사건으로 돌아가면 어찌 되었건 간에 부총리는 대통령 보고를 꼭 하고자 하셨다. 며칠 뒤 혁신성장 전략회의가 있어 대통령과 부총리가 함께 행사에 참석하는 일정이 있었다. 대외적인 행사를 할 때는 부처 장관이 얼굴을 내밀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 기회를 활용해 대통령께 관련 내용을 보고하기로 했다 들었다. 쉬는 시간을 활용해서 대통령께 보고하기로. 청와대는 모르게 해야 하니 정보가 청와대로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각별하게 주의하라고 당부가 있기도 했었다. 코미디였다.

그리고 사건은 완전히 끝났다.

​나는 의문이었다. 국가는 과연 지난 정권보다 나아진 것인가. 공무원으로 계속 일해 나갈 때 나는 행복할까.

​이런 사건들이 반복되는 걸 계속 보면서 일을 하다 보면 나도 과장이 되고 국장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국가 일이란 원래 이런 거라며 합리화시킬 것 같았다. 그러려고 공부를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니 그런 것보다 이런 업무처리 구조는 옳지 않다. 극단적인 말로 세월호 사태도 업무처리 시스템이 부재한 데서 생긴 일 아닌가? 만약 유사한 일이 다시 발생한다고 하면 이번 정부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 이번 정부는 일선 공무원이 다르게 업무처리를 할 수 있도록 국가 행정시스템을 바꾸었는가?

​이국종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석해균 선장을 한국으로 이송하기 위한 에어 엠뷰런스 조달이 다시 필요해진다고 했을 때 이번에는 이국종 교수님이름이 아니라 국가 이름으로 적절한 시간에 에어 엠뷰런스 조달이 가능할까?

​나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있다. 여전히 똑같다. 바뀌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바꾸어야 한다. 정권이 아니라 시스템을 말이다.

-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

청와대의 KT&G 사장 교체 압력 의혹 등을 폭로한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이 2일 오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정치개혁)에 ‘나는 왜 기획재정부를 그만두었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4편으로 구성된 이 글에서 신재민 전 사무관은 공무원 생활에 대한 회의, 정권 교체 후에도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의사 결정 과정 등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특히 자신이 KT&G 사장 교체 압력에 대해 알게 된 경위와 자신의 제보 이후 사안이 유야무야 묻혀지는 과정, 청와대의 부당한 국채 발행 압력과 그에 따른 기재부 내부 상황 등에 대한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다음은 신재민 전 사무관의 해당 글 전문

●1편

서문 : 글쓰기에 앞서

글을 쓰는 것을 많이 고민했다.

​첫 이유는 글이 엉망일까 봐. 대학교 졸업 이후 일기조차 쓴 적 없고 공무원으로 일한 기간 동안은 짧은 보고서 작성만을 훈련받은 나에게 긴 글을 쓴다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글을 쓰다 보면 필연적으로 드러날 빈곤한 단어와 조악한 문장이 눈에 선하였고 누군가 내 사고의 얕음을 알아차릴까 부끄러웠다.

​내 글로 누군가가 불이익을 받을까 우려되었던 것도 글 쓰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 이유였다. 기획재정부에서 내가 경험한 일들을 가감 없이 쓰게 된다면 그곳에서 근무하는 선배와 동료에게 누가 될 것 같았다. 아니라면 혹여라도 정치적으로 현 정권을 비판하는 소재로 악용되거나.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겪었던 경험들을 기록하고는 싶었지만, 내가 쓴 글로 피해를 보는 누군가가 혹시 나온다면 그 죄책감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사실 천성이 소심하고 게으른 나로는 논쟁거리가 되는 일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기재부를 나온 것으로 내 공무원 생활은 끝난 일인 것이고 무엇인가 더 기록한다는 것도 부질없어 보였다. 기재부에서 있었던 일을 정리한다면 어쩔 수 없이 조금이나마 논쟁거리가 된다. 가명을 쓰더라도 내가 누군가인지는 알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내부고발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흘러나갈 것도 싫었다.

​다른 사람들 입에 내가 오르내릴 것이 썩 좋지 않았다. 살아온 순간순간이 충실하지 못해서였나. 살면서 후회되는 일들을 너무 많이 한 내가 다른 무엇인가를 비판하는 듯한 글을 써도 되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런데도 결국 글을 쓰려고 한다.

이국종 교수님의 <골든 아워>를 읽었다.

​중증외상센터와 관련하여 작성된 연구용역 보고서를 가져갔을 때 아무런 관심 없이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사무실 한구석에 놓으라고 건성으로 말하고 돌려보냈다던 사무관. 오만에서 에어 엠뷰런스를 빌리려 할 때 묘사된, 보고서를 쓰는 데만 하루가 넘게 걸릴 거라는 공무원 조직의 일 처리 방식. 8년 동안 제공되지 않았다던 무전기. <골든 아워> 책에 나와 있는 공무원들의 모습은 내 모습이기도 했고 내가 견디지 못한 공무원 조직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싫어서 나왔다.

​공무원을 그만둔 것으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공무원을 그만두었다는 것은 참 싫었다.

​공무원을 준비할 때나 일하는 순간순간 사회와 국가를 조금 더 좋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보내왔다. 국민의 세금을 받고 일하니만큼 세금 받은 것 이상으로는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공무원으로 일하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내가 일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세금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딱히 사회를 더 좋게 바꿨던 것은 없었다. 이렇게 공무원을 끝내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퇴직금을 받았다. 이 퇴직금도 국민 세금으로 주는 것일 터인데 세금 받은 값어치는 하여야 하지 않을까. 그 핑계로 글을 써보려 마음먹었다. 조악한 문장이지만 공무원 조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린다면 퇴직금에 들어간 세금 값어치는 되지 않을까 싶다.

​사회를 바꾸려면 공무원 조직이 바뀌어야 한다.

​국가와 사회의 작동 방식에 의문을 품고 더 좋게 바꾸려 한다면 현재 공무원의 일 처리 방식을 이해하고 변경해나가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행정부를 차지하고 있는 공무원들은 그대로니까. 그 안의 일처리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사회가 바뀌는 것도 딱히 없을 것이다. 내가 경험하기로 정권이 바뀌어도 공무원 사회는 딱히 바뀌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어도 공무원 사회가 바뀌지 않은 것. 그건 공무원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공무원 조직 밖에서는 제대로 볼 수 없어서가 아닐까. 어차피 공무원을 그만둔 김에 내가 경험한 일들, 내가 공무원을 나오게 한 일들을 기록해 둔다면 사람들이 조금 더 공무원 사회를 이해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공무원으로 일한 경험을 가감 없이 날 것 그대로 쓴 글을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런 글이 있다면, 그래서 공무원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조금 더 정확히 알 수 있게 한다면 내가 공무원을 준비하고 일했던 것에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으로 글을 쓰려 마음먹었다.

​어쩌면 공무원을 그만둔 내 미련일지도 모른다.

날것 그대로 쓴 내 글로 인하여 혹여나 기획재정부나 정부에 비판이 가해질까 걱정된다.

​기획재정부는 우리나라 최고의 조직 중 하나이고 그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열정적인 공무원들이 많다. 한때나마 그곳에 속해서 일했던 것은 두고두고 나의 자랑일 것이다. 내 글로 기획재정부를 무턱대고 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이 못 쓴 단편적인 글들로 기획재정부와 그 안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을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글에 나오지 않지만, 기획재정부에서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들은 훨씬 많고 존경할만한 분들도 여럿이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이 글로 기재부가 그리고 우리 공직사회가 더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 나갔으면 하는 것이지 조직이나 누군가를 단순히 비판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글을 쓰게 되면 기획재정부에서 나를 믿어주고 아껴줬던 사람들을 배신하는 것 아닐까 싶어 마음이 아프다. 본문에서 후술하겠지만 사실 이미 언론 기사를 내기도 했기에 더더욱.

​핑계가 무엇이건 믿어준 사람들을 배신한 상태로 나만 행복하게 평소처럼 지낼 수는 없을 거다. 공무원을 그만둔 이유도 그래서였다. 나를 믿어준 사람에게 멍이 들게 하려면 그것보다는 내가 더 아파야 하지 않을까.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지금도 공무원을 그만둔 그때의 마음이다. 적어도 내 이득을 위해 하는 행동은 그때도 지금도 아니다.

​부족한 글솜씨다.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았으면 좋겠다.

​조악한 글솜씨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 퇴고하면 글을 내지 못할 것 같아 제대로 된 퇴고조차 없이 글을 펴낸다.

​10년 전 신림동에서 고시를 공부했었는데 10년 후 다시 이곳에서 책을 쓰고 공무원 학원 강의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공무원으로의 경험을 정리하지 않는다면,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것 같아서 글을 먼저 써보려 한다.

​학원 강사로 성공하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공무원으로 일하는 누군가가 나의 모습을 보고 부당한 업무처리가 있을 때 또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강의 준비를 한다고 해두고 이렇게 다른 일을 키웠다. 학원에 죄송할 뿐이다. 글만 마무리하고 다시 연락 드리겠다.

2018.10.31. 신림동에서

●2편

공무원의 역할

​공무원의 역할은 무엇일까.

​공무원은 시험에 합격하는 것만으로 그 신분이 형성된다.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았다 할 수 없다. 그렇기에 공무원의 의사결정은 국민의 의사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적인 결정을 내릴 때 그 정당성을 보유하지 못한다. 공무원의 역할은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정치적 정당성을 가진 대통령 및 정치 권력의 지시를 잘 수행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생각했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적 선호를 초월하여 어느 누가 국민의 투표로 대통령이 되더라도 선거공약에 따라 국정 운영을 잘해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그게 공무원의 역할이자 정치적 중립성이라 생각했다.

​물론 법적으로 명확히 불법이고 도덕적으로 부당하다면 거부할 수도 있고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조직 내에서 상부의 지시를 거부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부당한 지시는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지만 짧게나마 공무원 생활을 했던 2016년 말에도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상사가 지시하면 난 아무 생각 없이 해오지 않았었나.

​혼란한 와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언론을 통해 거듭 드러나는 최순실게이트의 실체를 보면서 함께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는 것이었다. 투표로 뽑힌 대통령이었으나 국민의 뜻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은 분명했으니까.

​2016년 겨울 광화문에서는 나도 촛불을 들고 서 있었다.

​촛불시위를 나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퇴진을 외쳤을 때 마음은 편했다. 공무원 조직이 행한 부당한 업무행태까지 정치 권력의 잘못으로 모두 치환시켜 버릴 수 있으니까. ‘공무원의 잘못은 없다. 모두가 박근혜, 최순실의 잘못이다. 정권이 바뀌면 국가는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공무원은 원래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정권이 바뀌면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의문이 남았다.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정권이 바뀌었을 때 한창 회자 되었던 말처럼 공무원은 정말 그냥 영혼이 없는 존재인가? 국정농단이라는 대형사건이 진행되고 있어도 공무원은 정말 그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집단인가?

​나는 어떤 공무원이 되려 오랜 기간 공부를 하면서 시험을 준비했던 것인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었던 2017년 초. 최순실게이트 당시에 출자관리과를 담당한 과장님과 술자리를 할 기회가 있었다. 술이 한 순배 돌고 최순실 이야기 K스포츠재단 이야기가 이어지는 와중이었다. 과장님이 말했다.

인마. 당시에 위에서 KT&G에 몇십억 정도 K스포츠재단에 내게 하라 압력 넣으라 했었어. 그거 내가 막았어. 절대 못 그런다고.

​국장이 그때 왜 안 되는 거냐고, KT&G로 하여금 돈 내게 만들라고 나한테 엄청 뭐라 그랬었다. 근데 난 절대 못 그런다 그랬거든? 그거 아마 돈 내게 했으면 큰일 났을 거야. 나중에 국장이 그때 판단 잘했다고 그러더라.

​너도 나중에 때 되면 그냥 그렇게 하면 되지 넌 뭐가 그리 고민이 많냐?

아.

​최순실게이트가 있었던 와중에도 내 주위의 공무원 중 누군가는 자기 자리에서 소신을 지키고 있었다. 공무원에게도 영혼은 있을 것이다.

​위법하거나 부당한 지시가 있으면 그에 따르지 않고 잘못되었다 하는 것. 그것 또한 분명 공무원의 역할이다. 책에서만 나오는 이야기지만 주변 누군가는 그렇게 일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이었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잘못된 것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 법과 도덕에 비추어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

​너무도 당연한 행동이었다. 실제 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하고 있었다.

​정권이 바뀌었다. 지난 정권에서 벌어진 부당한 업무지시는 다시 생기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만약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최순실게이트와 같은 사태가 다시 벌어지고 나에게 부당한 지시가 떨어지면 그때는 나도 과장님처럼 거부해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똑같은 일의 반복

​다시 2018년 2월. 그 사이 정권은 바뀌었다. 바뀐 정권은 적폐 청산을 강조했다. 기대는 컸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처음 맞는 정권교체기도 하였고 지난 정권이 워낙 좋지 않게 퇴진하였기에 바뀐 정권은 무언가 다를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바뀐 정권도 똑같았다. KT&G 사장을 바꾸라 지시가 내려왔고 기재부는 또 그에 맞추어 시행계획을 만들었다. 민간 기업 사장을 정부가 나서 교체하는 이 일은 부당한 일이었다.

​차관보고를 기다리던 도중 컴퓨터 화면으로 보았던 동향보고라는 제목의 그 문건은 내가 알고 있던 KT&G 사장교체 계획을 문서로 정리한 것이었다. 기업은행을 통하여 사장해임을 추진하고 외국인 주주가 동의하도록 설득하겠다는 계획.

​실망스러웠다.

​적폐를 청산한다는 정권에서 왜 같은 일이 반복될까.

​후술하겠지만 이번 정권 들어 부적절한 업무처리라 생각한 일이 이번 일이 처음도 아니었다. 작년에 비슷한 일을 몇 번 겪고 공무원이라는 업에 대한 회의감은 이미 팽배했었다.

​우리 기재부는 최순실의 K스포츠재단에 돈을 내라는 것도 막았다던데 왜 이번에는 BH에서 시키는 데로 그대로 다하고 있는 것일까. 더 민주적이라는 정권으로 바뀌었다는데.

​같은 일이 왜 반복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있을 것도 없을 것도 같았다. 문서를 닫았다. 지우지는 않았다. 차관님께 보고를 드린 후 다시 세종으로 내려갔다.

며칠 뒤 우연하게도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L 회계사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도대체 왜 기재부에서 KT&G 사장을 바꾸려 하냐는 것이었다. 이미 언론에서는 정부에서 KT&G 사장을 바꾸려 하는 것 같다고 추측성 기사를 몇 번 내보냈다. 나는 L에게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냥 모른다 말하기 민망하여 ‘민영화된 기존 공기업들의 사회적 역할이 여전히 상당함에도 불구, 관리 감독 기재는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사장선임 등에 어쩔 수 없이 관여하는 게 아니겠냐. 그게 공익 증진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에둘러 대답해 보았다. 친구는 그렇게 하려면 다시 공기업화를 해야지 민영화를 시켜놓고 사장 인사에 개입하려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되물었다. 맞다.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친구에게 BH에서 KT&G 사장을 바꾸는 것을 원하고 있는 것 같다고, 내정된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가 흐른다고 답할 수는 없었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나는 여전히 부끄러웠다.

제보

​3월 초 차관님 보고를 위해 서울에 다시 올라갔다. 나는 예전에 앉았던 공용컴퓨터에 앉았다.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KT&G 관련 문건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상태로 컴퓨터 속에 남아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 없었다.

​내 업무가 아니었기에 조직 내에서 KT&G의 사장 인사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주장할 수도 없었다. 공익신고 대상인지도 모호했다. 더욱이 공무원 조직의 생리상 만약 내부에서 권익위에 공익신고를 한다면 누가 신고했는지 드러날 것이 분명했다. 사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BH에서 지시한 사항인데 정부 내부에서의 이의제기가 가당하기나 하랴.

그렇다고 그냥 가만히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보지 않았으면 모를까.

​자료까지 이렇게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 넘어가는 것은 과거 다짐을 저버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하나둘 눈 닫고 귀를 막은 상태로 공무원 생활을 하다 보면 나 역시 앞으로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데로 소신을 변경하면서 하루하루 업무를 처리하게 될 것 같았다.

​공무원 한명 한명이 부당한 업무처리를 보고 어쩔 수 없다고 넘어가는 것에서 지난 정권의 최순실게이트가 일어나게 만든 원인이었던 것 아닌가.

​나는 문건을 평소 알고 지내던 M사 기자에게 전달했다.

​그 사이 KT&G 사장 교체 건은 계획대로 추진되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교체에 실패했다. 외국인 주주들이 동의하지 않았다 하였다. 한편으로 기재부 내에서 알음알음 들어보니 연임된 KT&G의 백사장은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설사 문제가 많은 CEO라 하더라도 정당한 절차를 따르지 않고 민간 기업의 인사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건 당연하였다.

​문건을 받은 L 기자가 나에게 정말 기사로 내도 되는지 물었다. 나는 그러라 했다.

사직

​L 기자에게 문건을 넘기고 기사가 준비되는 도중 온갖 생각이 들었다. 기사로 나온 뒤 문건을 유출한 것이 나라는 것을 동료 누군가가 알게 될까 하는 걱정, 어차피 기사화가 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데 괜한 일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 기사가 나오면 주변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으로 추정되는 피해 등등.

​난 심성이 강하지 못한 편이다. 비난받는 것을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그런 나에게 혹여나 기사가 나온 후에 내가 문건을 넘겼다는 것이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당시에는 조직이나 주변 사람에 대한 애착도 컸다. 공무원 조직의 특성상 기획재정부도 한 번 입직하면 주변 사람들과 퇴직할 때까지 함께 지내야 한다. 조직 내부의 결속도 강했다. 조직 내 사람은 단순한 직장동료나 상사 이상이었다. 내가 넘긴 문건이 방송에 나오게 된다면 주변 분들이 곤란을 겪을 것은 자명했다. 그 모든 것들은 나에게 큰 압박이었다.

​3월부터 5월까지 일하는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다. 그렇다고 기사화되기로 한 일을 되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그럴 수 없는 단계가 되기도 했었고.

​5월 중순. 기사가 나왔다. 실제로 사장을 교체하는 데에는 실패한 사건이라서 그런지 큰 논쟁거리 없이 넘어갔다. 우리 부는 해명자료를 내어 해당 문건은 실무자가 스스로 참고하기 위해 만든 자료라 하였다. 상부에 일체 보고 없이 실무자가 보고 바로 파기한 것이라 설명하였다.

보고자료의 질을 보면 당장 알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해명이었지만 내가 인터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사실 여부를 증명할 수는 없었다. 차마 인터뷰할 용기는 없었기에 해당 문건은 보고된 적 없던 괴문서였던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보도 내용은 조금 아쉬웠다. 자료를 주면서 기대했던 취재의 초점은 기재부가 아닌 BH였다. 바뀐 정권에서도 부당한 지시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내용이 알려져 조금이라도 정권에 경각심이 생기기 바랐다. 시민들의 촛불로, ‘이게 나라냐’를 외치면서 바뀐 정권인데 이전과 똑같다면 너무 안타까운 일이지 않은가.

​그러나 사건은 후속 보도 없이 마무리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후 문건유출 경로를 파악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내려와서 해당 과를 조사하고 갔다고 들었다. 국무총리실 공직기강실에서는 기재부에 대해서만 비공개자료 관리실태를 별도로 감찰하고 갔다. 나로 인하여 기재부 전체가 피해를 본 것 같았다.

​문건 내용의 사실 여부, 그리고 그게 바람직한 결정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애당초 청와대 지시사항이었으니 문건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고초를 겪은 분은 국장님이셨다. 서울청사에 국장님과 함께 차관님 보고를 기다리던 중 어딘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알음알음 들리는 말로 유추해 보건대, 자료가 어떻게 유출된 것인지 경위를 파악하라는 지시였던 것 같았다. 전화를 받은 국장님은 기업은행에 전화하여 기업은행에서 유출된 것 같으니 전수조사를 해보라고 다시 지시하였다. 기업은행에도 괜히 미안하였다. 모두 내 잘못인 것 같았다.

​다행히 내가 유출했다는 것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모르는 일이다. 혹 누군가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른 척 해 주셨는지도. L 기자를 통해서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무관이 자료를 넘긴 거란 말이 우리 부에 돌고 있다고 했다. 문건유출이 걸린 것이라면 그만두면 된다고 마음 편하게 생각했다.

​며칠 뒤 국장님과 승강기를 단둘이 같이 탔다. 국장님이 마음고생 심한 얼굴로 말했다.

믿을 사람 없는 것 같아. 신재민 사무관 같은 사람만 믿어야지.

세상에나. 내가 그 믿지 못할 사람인데. 나 같은 사람만 믿어야 한다니. 국장님께서는 근무하는 동안 나를 상당히 아껴주셨다. 사직할 때까지도 말이다. 너무도 죄송했다. 깜냥도 되지 않는 주제에 소신을 지키겠다고 나를 아껴주는 분의 발목을 잡은 것 같았다. 소신이 중요하다 했더라도 나를 믿어주고 아껴주는 사람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었다면 적어도 나 스스로는 그것보다 더 다칠 각오를 해야 했던 일 아닐까.

​며칠 뒤 서울 출장 도중 심의관님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문건유출 이야기가 또 나왔다. 누가 유출한 것이겠냐, 우리 부에서 유출된 것은 아닐 것이다, 과거 비슷한 일이 있었을 때도 한 번도 누가 유출한 것인지 밝혀진 적이 없다 등등. 듣고 있기가 죄송스럽고 힘이 들었다.

​죄책감을 가지면서 일해나가는 것은 너무 힘이 들었다.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내가 자료를 유출한 사람인데 웃으면서 맞장구를 친다는 것은 곤욕이었다.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르게 일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유출한 사람이라고 손들고 나서는 것도 웃겼다. 공무원을 그만두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나를 믿어주셨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소신을 주장하는 것, 그것도 뒤에서 몰래 행동한 것은 비겁한 일인 것 같았다.

​공무원을 그만둔다면 그래도 죄송한 마음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행정고시 합격으로 공직을 시작했고 그동안 조직에서 쌓은 평도 나쁘지 않았었기에 계속 있었다면 적어도 남이 하는 만큼은 승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직함으로 포기하는 것이 작지 않아 보였기에 죄책감은 무뎌졌다.

​그만두고 나서는 후회를 많이 했지만, 적어도 그만둘 당시 아쉬움은 없었다. 사실 그럴 생각으로 3월부터 주변에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흘려두기도 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사건 하나가 흐지부지 지나가는 것.

​정권이 바뀌어도 부당한 업무처리가 이어지는 것.

​정치 권력의 본질이나 공무원 조직의 행태는 지난 정권이나 이번 정권이나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다.

​정부의 업무처리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내 천성도 어디 가지는 않을 터이니, 계속 공무원을 했었다면 나중에 높이 승진한 이후에 양심고백이라면서 더 큰 사고를 쳤을 것이다. 일찍 공무원을 그만둔 것은 잘한 행동인 것 같았다. 이렇게 글을 쓰는 지금도 말이다.

​그만둔 이유가 오직 이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사건이 결정적 이유였던 것은 분명 맞지만 비슷한 사건들은 여럿 있었다.

​조직 안의 한두 사람의 의지로는 관료제의 행태를 바꿀 수가 없다.

​글을 읽는 당신이 바꿔 줬으면 좋겠다.

●3편

내가 기획재정부를 그만둔 두 번째 이유

​국채 조기상환(바이백) 취소

​2017년 11월 14일. 다음날(15일)로 예정된 국채조기상환이 입찰 하루 전 전격 취소되었다. 입찰계획을 하루 앞두고 취소하는 일은 국채시장이 개설 된 이후 처음이었다. 규모는 1조 원.

​전례 없었던 사건에 시장금리는 상승했고, 언론에서는 기사가 쏟아졌다. 스왑시장에서도 금리스와프(IRS)와 이종통화스와프(CRS) 금리가 올라갔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혼란을 겪어 국채를 매도하고 있다고 보도되기까지 했다.

민간 누구도 이유를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 정부가 밝히지 않았으니. 국고채 입찰을 대행하는 한국은행에도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었고, 한동안 채권시장의 혼란은 말할 수 없었다. 추측성 기사들이 나왔다. 감사하게도 11월 말로 예정된 금통위의 금리상승에 대비하여 금리조정 수단을 보유하려 행한 판단이라는 정부에 유리한 분석도 그중 있었지만, 대부분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들이었다.

​국채시장은 기관이나 중앙은행이 주로 투자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억 원 단위 이상의 돈이 오고 가는 것은 이상하지 않지만, 그 국채시장에서도 1조 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더군다나 상환계획은 이미 10월 말에 정부 보도자료로 공고된 건이었다.

​1조원의 채권 상환이라는 정부 발표를 믿고 국고채 PD(Primary Dealer)들은 일정에 맞추어 채권을 준비하였을 거다. 국고채 브로커들은 정부에게 매각할 채권을 구해 놓았을 것이다. 1조원 규모로 말이다. 그게 하루 전날 취소된 것이다. 국가의 정책을 믿은 누군가는 큰 손해를 보았던 날이다.

​조기상환 취소가 발표된 이 후 세종시에 있는 국채과 사무실로 기자들이 들어와 따졌다. 로이터통신의 L 기자 등이 들어와 지금 국채시장 뒤집힌 것 알고 있지 않냐면서, 왜 바이백을 취소했는지 당연히 설명해야 한다고 캐물었다고 한다. 사무실에서는 당연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담당 사무관 선배가 홀로 고초를 겪으셨다.

​바이백 취소 발표 다음날. 부총리님은 기자들로부터 기재부의 바이백 취소로 외국인 투자자 등의 혼란을 초래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자 “그럴 만한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외국인들과 기관이 투자하는 국고채 입찰 시장을 하루 전날 흔들고 별일이 아니라고????? 나라 운영이 우습나?

부총리의 발언을 보도한 기사의 리플이었다.

​혼란스러웠다. 일이 왜 이렇게 진행되는지 몰랐다.

​공무원으로 일한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바이백 취소가 결정되는 장소에 함께 있었다.

​보름여간 서울에 있으면서 차관보님과 국장님, 그리고 과장님과 함께 부총리님께 관련 보고를 드렸었다.

​이미 그때부터 나는 공무원을 그만두고 싶었다.

​내 직업의 의미

​2017년.

​나는 국고국 국고과에서 국고금 관리 총괄이라는 업무분장을 받았다.

​일반회계와 특별회계를 합쳐 약 330조원 규모의 국가자금 지출의 스케쥴을 관리하는 업무였다. 매월 들어올 수입을 예상하고 부처에서 요청한 지출 규모, 전년도 실제 지출 규모 등을 고려하여 자금이 남을 경우 시중 금융사를 통해 운용하고 모자라는 자금은 국고채나 재정증권, 한국은행 차입 등을 통해 조달하는 게 주된 일이었다. 민간에서 근무한 적은 없지만 CFO 아래에서 수행하는 업무가 유사하다고 들었다. 회계연도가 끝난 후 세계잉여금이 얼마일지를 예측하고 관리하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거창하고 중요해 보이는 일일 것 같지만 세수여건이 좋으면 딱히 큰 역할은 없는 자리였다. 세수여건이 좋아 자금이 많으면 개별부처에서 요청하는 지출요구를 그냥 수용하면 되었으니까.

​2017년은 예산상 세수보다 실제 들어온 세수가 훨씬 많은 해였다. 2013년 세입예산 보다 실제 수납된 세입규모가 적어 결손이 발생한 이후부터 세제실에서는 조세예산 규모를 최대한 보수적으로 전망하려 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 외에도 내가 알 수 없는 소위 정무적 이유로- 세입예산은 실제 연도말 전망보다 상당히 적은 편이었다. 2016년부터 국고금 관리업무는 예산보다 더 들어오는 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따라서 2017년 한 해 내 개인적 업무목표는 자금조달규모를 줄이는 것이었다.

​재정증권(단기 자금 수급 차 해소를 위해 발행하는 국채)을 63일동안 1조원만 발행하더라도 이자비용은 거의 30억원이다. 재정증권 발행을 한 번만 줄여도 내 평생 연봉이 절감되는 거였다.

​국채는 말할 것도 없었다.

​매년 세입예산 이상으로 세출예산을 편성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국채 순상환이란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채무를 줄이는 데 예산을 사용했다는 말은 당초 계획보다 국채발행을 줄였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다른 한편에서는 국채를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하고 있으니.

​언론 등에서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채무상환으로 사용했다는 돈은 실제 채무의 순상환이 아니다. 기존에 빚진 돈이 10억 원이고 올해 5억 원을 새로이 빚지는 가계가 있다 하자. 기존 빚을 1억 원 갚았다 하더라도 새로이 빚지는 5억 원이 있다면 연도 말 그 가계의 빚은 줄어 들지 않고 오히려 4억원 늘어날 것이다. 그저 새로 빚질 채무의 규모를 줄인 것에 불과하다. 현대국가 대부분은 적자재정을 편성하고 있고 순채무상환이라는 것은 허상이다.

​실질적으로 채무의 총규모는 감소하지 않는 점을 고려한다면 결국 적자 국채 발행이 한번 결정되면 그 이자는 국가가 존속하는 한 거의 영구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적자성 국채는 애초에 발행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았다. 1조 원을 추가 발행한다면 이자율을 2% 라고만 가정해도 연간 발생하는 비용은 200억원이다.

​2017년 업무를 처음 담당했을 때부터, 적자성 국채발행을 조금이나마 줄이는 것이 내 역할이라 생각했다.

​얼마나 명확한가.

​5조원 발행을 줄이면 연간 1,000억 원이었다.

​조금만 노력하면 평생 국가 세금을 받고 살아도 떳떳할 수 있을 업무였다. 채무를 줄이고 싶었다.

​부총리 보고

​2017년 정부가 국회로부터 승인받은 적자성 국채의 최대 발행 한도액은 28.7조 원 이었다. 그리고 상반기가 끝난 6월 말 내가 예상해 본 2017년 초과세수는 20조 원이 넘었다.

​3월달 업무를 인계받았던 당시에 이미 발행한 적자성 국채는 15조 원. 추경 및 세수 변수 등을 고려해서 5조원의 추가 발행이 결정되었다. 총 발행액 20조원. 남은 적자성 국채 미발행 분은 8.7조원이었다. 당연히 이 돈은 발행할 필요도 없고 발행하면 안 되는 자금이라 생각했다.

​추경에서 세입예산을 다소 상향 조정 했음에도 불구하고 6월말 전망한 초과 세입 규모는 15조원. 사실 8.7조 원 미발행도 초과 세입 규모를 고려했을 때 너무나도 적은 돈이었다. 10조원 정도는 미발행 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국채과에서는 적자성 국채 미발행 분을 활용하여 기존 국가채무를 차환하여 국채 만기를 평탄화하려 했다.

​기존 국가채무의 차환이란 국채는 발행하되 조달된 자금을 재정지출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2018, 2019년 만기 도래 국채를 조기에 상환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국채 만기가 연장되어 해당연도의 국채 관리 부담이 감소하게 된다. 가계로 따지면 5년 뒤에 갚으면 되는 대출을 신규로 받아 내년에 갚아야 할 빚을 미리 상환하는 방식이라 할까. 이때 기존 채무의 조기상환(바이백)이 이루어진다.

​만기 평탄화용 차환을 진행할 때도 국채 발행이 필요하기에 차환 규모를 늘리게 되면 적자성 국채 발행 가능 규모는 줄어든다.

​당시 국고국장님은 관련 내용을 7월경 하반기 국채발행계획으로 정리하여 부총리께 보고드렸다.

​부총리님은 당시에 뭘 이런 것까지 자신에게 보고하냐며, 국고국 선에서 결정해서 처리하라 했었다. 비서실에서 보고받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국장님이 꾸역꾸역 찾아가서 보고한 건이었다.

​그리고 10월. 세수가 잘 들어오는 것이 너무나도 명확하였을 당시, 우리국은 적자성 국채발행을 8.7조 원 줄이는 중이며 이 경우 연도말 세계잉여금 규모는 얼마가 되는지 부총리님께 보고드리려 준비하고 있었다.

​2차관님 보고까지는 큰 문제 없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그 후 부총리 보고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내가 작성한 보고서는 초과 세입을 추경 예산 대비 15조 원 규모로 전망했었는데, 막상 조세 규모 예측을 담당하는 세제실에서는 10조 원 규모로 부총리께 보고드렸던 상황이었다.

​당시 초과세수의 규모와 그 처리문제는 국감 때부터 국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쟁점이었기에 규모 차이는 생각보다 민감했다.

​세제실은 1차관에 속해 있었기에 2차관님이나 재정차관보님의 업무 범위가 아니었다. 주 업무가 조세 규모의 예측이기에 다양한 세수예측 모델과 미시적 기초를 토대로 규모를 전망하는 세제실 조세분석과와 달리 기껏해야 국고과는 세입총량을 기반으로 한 선형 회귀분석 결과 정도로 세입규모를 전망할 수 밖에 없었다. 국고과 보고에서는 15조 원이라는 초과 세수 규모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부총리님은 어려운 분이다.

​그리고 높은 분이시다 보니 사무관보다 과장이 과장보다 국장이 국장보다 차관보가 부총리를 더 어려워 했다.

​부총리 보고에서 세제실과 다른 초과 세입 규모를 제시하면서 근거를 댈 수 없다는 것은 윗분들께는 큰 부담으로 여겨졌던 것 같았다.

​세제실은 15조 원이라는 초과 세입 규모에 동의하면서도 아직 세제실장님 보고도 마치지 않았다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렇게 보고는 늦춰줬다.

​10월 보고가 11월로 넘어갔고 11월 13일까지도 보고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국채과에서는 국채발행 축소 규모를 빨리 확정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보고하는 것이 무서워 적시에 상급자에게 관련 내용을 보고하지 못하는 조직은 죽은 조직이다.

​부총리님이 무서워서 보고를 늦추었다는 것은 민간에서 보기 얼마나 우스울까.

​문제 될 것 같은 내용은 보고 하지 않는다. 설사 보고를 하더라도 지적될 것 같은 내용은 보고서에 쓰지 않는다. 보고서를 작성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쉽게 쓰는 것이었다. 상사가 이해하기 어려울 내용은 가급적 보고서에 포함시키지 않고 최대한 쉽게 쓰는 것. 누락되는 내용이 그 속에 많았다.

​뭐 이것은 민간 대기업들도 다 똑같다고는 하더라.

​그러나 분명 옳지 않은 방식이다. 그리고 늦어진 보고 속에서 결국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11월 13일. 바이백 취소발표 하루 전

​퇴근 무렵 차관보님께 전화가 왔다.

내일 아침에 부총리에게 보고해야 한다면서 적자성 국채 발행계획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라는 지시였다.

​차관보님이 지시한 보고서의 톤은 이전 차관님께 까지 보고된 내용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부총리로부터 이미 지시받은 내용이 있었는지 남은 국채 8.7조원을 발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추가 발행을 진행하는 것으로 보고서를 쓰라 하셨다.

​물량 일부는 조기상환용으로 사용되었거나 사용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최대 발행 가능 규모는 4조 원에서 수준이었다. 차관보님은 그중 2조 원 정도는 발행하는 것으로 보고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을 하셨다.

​연간 400억 원의 재정부담이 국가에 추가로 주어지는 셈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대통령 정례보고에 해당 내용도 보고할 것이라 하시면서 대통령 보고자료도 준비하라 하셨다.

​보고서를 마무리 한 후 차관보님이 물으셨다.

신 사무관은 어떻게 생각해? 이거 발행하는 게 맞는거야?

기회였다. 나는 당연히 발행하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다. 세수가 좋은 지금 발행할 실익이 없다고. 국회 등 외부에서도 지적이 들어올 것이라고. 연간 발생하는 재정부담도 말씀드렸다.

​당연한 이야기었다. 일반 가계를 생각해도 자명했다. 월 100만 원의 수입을 거두는 사람이 300만 원을 지출하기 위해 200만 원의 대출계획을 잡았다고 하자. 당연하게도 만약 보너스가 들어와서 수입이 200만원으로 늘었다면 대출을 줄일 것이다. 200만 원의 대출을 유지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이번 정권들어 처음 시도하는 정책도 아니었다. 정권과 관계없이 수십년간 반복되었던 국채발행 관리 방식이었다. 세수가 많으면 예정된 국채발행을 줄이는 것은 당연한 판단이었고 지난 정권 때도 지지난 정권 때도 그리고 그 이전 정권에도 그렇게 해왔었다.

​당연하게도 차관보님께서 다 아시는 내용이었다. 차관보님은 확신이 필요하신 것 같았다.

​차관보님이 지시하셨다.

보고서 결론 바꿔라. 적자성 국채 추가발행 안 하는 걸로 다시 써.

차관보님은 존경할만한 분이셨다.

​11월 14일. 바이백 취소 날

​차관보는 국회 옆에 위치한 수출입은행에서 부총리께 아침 일찍 보고한다 했다. 나는 보고자료를 준비하여 세종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첫차를 탔다.

​당시 국고과장은 고위공무원 교육이 진행 중이었기에 국채과장과 함께 차관보님께 갔고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차관보님은 부총리님 보고를 위해 들어갔다.

​국회에서 기재위가 예정되어 있었다. 국회로 이동하여 관련 내용을 국장님께 보고드렸다. 기다리는 동안 이상한 이야기가 흘렀다. 다른 1급들이 다 있는 앞에서 우리 재정차관보가 부총리로부터 말도 못할 정도로 심한 말을 들으면서 혼이 났다 했다.

​차관보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국채과장과 수출입은행으로 오라 하셨다.

​차관보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1년차 사무관이 과장님이나 국장님으로부터 페이퍼나 업무로 심하게 혼났을 때나 볼 수 있는 표정. 얼이 나가 있는 표정이셨다.

​죄송스러웠다. 괜히 어제 마지막에 차관보님께 국채 추가 발행을 중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드렸나 싶었다.

​차관보님께서는 그래도 침착하셨다. 공직 생활 중 제일 심하게 야단맞은 것 같다고 하시면서, 정무적 고려가 부족했던 것 같다고 하셨다.​

그놈의 정무적 고려.​

나는 정무적 고려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차관보는 발행하는 것으로 보고서를 고쳐야 하겠다고 지시하면서 최대 발행규모가 왜 8.7조원이 아니라 4조원인지에 대하여 부총리가 화를 내셨다고 말하셨다. 오후에 발행하는 것으로 다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보여드리자고 하셨다.​

점심시간 동안 국회에서 적자성 국채를 발행할 수 있는 최대 한도로 추가 발행하는 것을 내용으로 보고서를 만들었다. 보고서에는 결론만 있으면 안되었기에 추가 발행이 가지는 장점도 제시하여야 했다. 나는 추가 발행이 가지는 장점을 알지 못했다. 발행할 이유는 아무리 곱씹어봐도 없었다.​

부총리님을 제외하고는 차관님 이하 간부님들도 모두 추가 적자성 국채발행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어찌저찌 보고서는 공간이 채워졌다. 최대 발행이 가능한 국채규모는 기존 4조원에서 5조원으로 1조원 늘려 보고하기로 했다. 국채시장에 큰 무리가 가겠지만 어찌어찌 발행하면 될 것도 같았다. 지금 국채시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셨다.​

보고서와 내용을 바꾸고 차관보님 뿐 아니라 국장님과 국채과장님, 그리고 나까지 함께 들어갔다. 김동연 부총리께 대면보고를 하는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애초에 부총리 보고에는 사무관이 잘 들어가지 않으니까.​

부총리님은 아직 화가 완전히 누그러 들지 않아 보였다. 보고하러 들어가자마자 차관보님을 다시 질타하셨다.

그 자리까지 올라갔으면 정무적 판단을 해야 하는 것 아니야?

국장이나 과장 입장에서는 국채 발행 안한다고 할 수 있어. 당연한 판단일 수 있단 말야.

그런데 당신은 그러면 안되는 것 아니야? 1급까지 올라갔으면 역할을 해야지!

1급까지 올라가 놓고도 뭐가 중요한지 판단을 못해?

손에 잡히는게 있었다면 집어 던질 듯한 기세였다. 부총리의 질타는 계속 되었다.

그리고 왜 추가로 발행할 수 있는 적자성 국채가 8.7조원이 안되는 거야? 설명해봐.

그리고 발행가능 한도가 또 늘었네? 이건 왜 그런 거야? 늘어날 수 있구만!

발행할 수 있는 물량 최대로 확보해!

국채 만기평탄화를 위한 조기상환으로 일부 사용되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부총리는 보고를 들으면서 어찌되었건 최대로 발행할 수 있는 물량을 확보하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부총리님은 왜 적자성 국채 발행 중단을 멈추면 안되는지 설명하셨다.​

정무적 고려!​

드디어 그 말로만 듣던 정무적 고려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정무적 고려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정권말로 이어지면 재정의 역할이 갈수록 더 커질 것이기에 그 때를 위해 자금을 최대한 비축해 두어야 한다는 것. 국채 발행 후 세계잉여금으로 비축하여 다음 다음연도 예산편성에 사용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두 번째는 금년 국채 발행을 줄이게 된다면 GDP 대비 채무비율이 줄어든다는 것. 정권이 교체된 2017년도에 GDP대비 채무비율이 줄어둔다면 향후 정권이 지속되는 내내 부담이 가기에 국채발행을 줄일 수 없다는 이야기 였다.​

두 내용 모두 납득이 가지 않았다. 첫 번째 이야기는 국가재정법 상 불가능한 예산편성 방법이었고 두 번째 이야기는 국민을 기만하는 내용 같았다.​

GDP 대비 채무비율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에 국채 발행을 중단하면 안된다니. 부총리님께서는 앞으로 GDP대비 채무비율이 증가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계셨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경제여건은 그다지 좋지 못했고 정부의 정책 수단은 제한적이었다. 정부내도 그랬고 국회에서도 재정의 역할은 갈수록 강조되고 있었다.​

그렇게 될 때 비교 대상이 될 기준점이 박근혜 정권의 교체기인 2017년이 될 것이다. 미래를 고려해 본다면 2017년의 GDP대비 채무비율을 낮추어서는 안된다는 말이었다. 이시기의 GDP대비 채무비율을 낮추면 향후 정권의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부총리가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8.7조원의 국채를 발행하면 1년 이자 부담만 2,000억원 돈이다. 이자도 국민 세금으로 내는 것이다. 아무리 부총리는 정무직이라 하나 재정당국의 수장으로 오히려 청와대나 정치권에서 같은 이야기가 나올 때 부총리가 막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실망스러웠다.​

고위 공무원이 가져야 한다는 정무적 고려, 정무적 판단이라는 것은 이런 것인가? 정권이 유지되도록 기여 해야 한다는 것이 정무적 고려인 것인가? 공무원은 해당 정권의 정권 재창출을 사명으로 일을 해야 하는 것인가?​

내가 열심히 일해 승진하여 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1급 차관보가 되면 해야 하는 정무적 판단이란 것은 이런 것인가?​

승진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다지 들지 않았다.

​첫 번째 이야기도 말이 되지 않았다. 국가재정법 제90조에 따를 때 세계잉여금은 발생 다음연도에 법에 따라 처리된 후 잔액은 세입에 강제 이입처리 되도록 하고 있었다. 돈을 남겨둔다고 하여도 추가경정예산 편성에만 일부 활용할 수 있을 뿐, 다음 다음연도 예산편성에 사용할 수는 없다.

​부총리님께 세계잉여금은 다음 다음연도 예산에 사용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다. 부총리는 과거에 활용했던 기억이 있다고 예산실을 통해 확인해보라 하셨다. 연도초에 비공식적으로나마 법률자문도 받았던 건이었고 얼마 전까지도 자료로 확인해본 사안이었다. 적어도 최근 10년 내로는 없었던 것으로 확인했었고 부총리님께도 그렇다고 이야기 드렸다.

​국가의 회계연도는 단년도이다. 국회로부터 승인받은 국채 발행 역시 당해 연도 예산지출에 있어 예상되는 세입부족을 해소하기 위함이다. 다음 연도에 예산을 편성함에 있어 자금이 부족하다면 다음 연도 예산안을 통과시키면서 국채 발행을 포함시키고 국회의 승인을 받으면 된다.

​세계잉여금으로 예산을 편성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추가경정예산이 그것이다.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는데 있어 야당의 주된 공격이 ‘재원을 어디서 구할 것이냐’라고 할 때 세계잉여금이 있을 경우 ‘국민에게 추가적인 부담을 지우지 않고, 국가의 남은 돈으로 예산을 편성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건 편법에 불과하다. 국가 회계연도가 단 년도인 이상, 예산을 편성할 회계연도에 국채 발행이 필요하다면 그 회계연도에 승인을 받아야 할 것이다. 추경예산편성이 필요하고 그때 국채 발행이 필요하다면 그 당시 국회를 설득하면 될 것이다. 물론 국회를 통과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야당 의원을 설득하는 과정에 있어서 말도 되지 않는 반대급부를 줘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비용이 연간 2,000억 원이나 발생하는 것인가.

​더욱이 부총리님은 국채 발행 후 남은 자금을 추가경정예산으로 편성하려 하는 것도 아니라 2년 뒤 본 예산에 활용하겠다는 취지셨다.

​어찌되건 간에 부총리님께서는 GDP대비 채무비율 등을 고려했을 때 국채발행을 중단하여 이번 정권에 부담을 주는 것은 잘못되었다 하셨다. 현 시점에서 최대로 발행할 수 있는 규모를 확인하고 보고하라 지시가 내려졌다. 정무적 고려가 포함된 정책 판단이었다.

​보고는 끝났지만 숙제는 남았다. 적자성 국채의 발행 가능 규모를 늘려야 했다. 일단 가능한 재원을 다 끌어올 필요가 있었다. 다음날로 예정된 1조원의 국채 조기상환을 취소하기로 했다. 이미 공지된 일이었기에 국채시장에 무리가 갈 수 있었지만, 지금 국채시장을 고려할 때가 아니라 하였다.

​한국은행에 다음날로 예정된 국채 조기상환을 취소한다 통보하였다. 그렇게 2주전 이미 공지되었던 1조 원의 조기상환은 시행을 하루 앞두고 국채시장 마감 전 취소되었다.

​국채금리는 현물 선물 모두 올라갔다. 국가에 매각하기 위해 채권을 준비해두었던 브로커와 딜러들은 앉은 자리에서 손해를 보였다.

​그런 경우가 없었기를 바라지만 선물시장 등에서 금리 하락 포지션에 큰 돈을 투자했던 투자자는 손실규모가 컸을 것이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어쩌면 누군가는 포지션을 잘못 설정했다 직장을 옮겼었을 수도 있다.

​언론 보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국장님과 과장님은 언론사에 열심히 연락하여 기사 톤을 낮춰달라고 사정했다.

기자님 이거 제목 뭡니까. 국가가 사기쳤다? 사기는 아니죠. 어떻게 국가가 사기를 칩니까. 이렇게 기사 나가면 국민들이 정부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어디까지나 계획을 변경한 겁니다. 제목 워딩만 좀 부드럽게 해 주십시오.

시장을 안정화 시켜야 할 정부가 시장을 흔들었다.

​그것도 국채 이자율 시장을.

​사실 약속을 어긴 것이니 사기라 볼 수 있는 것도 아닌가?

​국채시장에서 근무하는 분들을 뵐 면목이 없었다.

​적자성 국채를 추가 발행하면 국채시장은 더 망가질 터였다. 당시 국채시장 누구도 국가가 적자성 국채를 추가 발행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이미 십 년이 넘게 반복된 일이었다. 정권과 관계 없이 재정여건이 좋을경우 적자성 국채 발행 규모는 예산상 한도 보다 줄여 왔었다.

​바이백 취소 이후

​부총리님의 지시가 있기는 했지만 적자성 국채 8.7조원을 전액 발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국채시장도 버티지 못할 것이었고 현실적으로 조기상환에 일부 재원을 사용했었기도 했다. 국채시장 여건 등을 고려했을 때 최대 발행 규모는 5~6조원이 한계로 보였다. 발행 규모를 확정하여 다시 보고를 드려야 했다. 1주일가량 서울에서 묵었다.

​국채 추가 발행 규모에 따른 GDP대비 채무비율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모수인 GDP변화에 따라 GDP 대비 채무비율은 요동쳤다. 경제정책국으로부터 GDP규모를 받아 계산하라 지시받았다. GDP대비 채무비율은 나중에 확정 GDP에 따라 또 그 수치가 크게 달라질 것이었다. 이 분석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며칠 뒤. 4조원 후반을 발행하기로 결론 내고 다시 부총리 보고에 들어갔다. 부총리 역시 기자들로부터 바이백 취소 이유를 설명하라는 요청을 많이 받는 등 홍역을 치른 후였다. 부총리가 말했다.

난 분명히 조기상환 취소하라고 한적 없다? 내가 시장 흔드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데.

시장에 공표한 거 알았으면 난 절대 못하게 했을 거다.

내가 그날 좀 세게 말해서 알아서들 조정했던 것 같은데 앞으로 그럴 필요 없어요.

그게 끝이었다. 국채시장과 금리를 흔들었던 국채 조기상환 취소건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도 잘못했다 하지 않은 상태로.

​갑자기 예전 행정법에 나오는 학설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국가 무오류설. 국가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우리는 분명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나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국채과에서 국채시장 국고채 우선 거래 딜러(PD) 등을 만나면서 사과하였다고 들었다. 그러나 국채시장에 어디 PD만 있으랴.

​부끄러웠다.

●4편

보고

부총리님께 보고가 이어졌다.

​부총리님께서 적자성 국채 4조원의 추가 발행 보고를 받으시고 예상되는 GDP대비 채무비율을 몇 번 계산해 보셨다. 이게 한계냐고 되물으시더니 아쉽긴 하고 부담되긴 하지만 이 정도 수준으로 발행하자고 하셨다. 추가 발행이 발표되면 국채시장은 또 한바탕 홍역을 치를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12월 발행량이 기존 계획에서 4조 원이 추가되는 것이니.

​국장님께서 나서셨다. 부총리님께 4조원을 발행하겠다는 보고를 드린 이후에 국채시장의 부담 등의 사유를 들면서 아무래도 국채 추가 발행은 부담이라 말씀하셨다. 부총리님이 말씀하셨다.

​나중에 누군가가 추가로 국채를 발행하기로 한 의사 결정의 책임 물을까 부담되는거야?

나중에 실무진들이 다칠까봐?

그러면 경제관계장관회의에 안건으로 올려. 거기서 장관들이 결정한 걸로 할게.

그러면 나중에라도 실무진 다칠 일은 없을 것 아니야.

중요한 건 누가 다치느냐 다치지 않느냐가 아니었다. 그건 훨씬 미래의 일이었다. 그보다 이자가 발생하는 것. 적자 국채를 발행하는 순간 불필요한 이자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에 손해를 끼치는 일이다. 이대로 가면 거꾸로 평생 무보수로 공무원 일을 해도 국가에 끼친 손해를 갚지 못하게 생겼다. 국채시장이 망가지고 금리가 오를 것도 뻔했다. 연도말에 그렇지 않아도 미국 금리인상이 가시화 된 상황에서 금리상승 충격을 가하면 좋을 일이 없었다. 그 피해는 고스라니 국가경제 전반으로 파급되는 것이다.

​하지만 부총리님께 보고하는 와중에 사실관계에 대한 대답 외에는 내가 말할 수 있는 발언권은 없었다.

​경제관계장관회의 안건을 만들기로 했다. 발행 이유를 써야 하는데 나는 도대체 왜 세수가 넘쳐 흐르는 지금 이 11월 말에 적자성 국채를 추가 발행하는 것인지 여전히 쓸 말이 없었다.

​결정된 내용을 2차관님께 보고드렸다. 마침 예결위 예산 심의 도중 국회 기재부 집무실에 혼자 계셨다. 나는 국회 기재부 사무실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고 과장님께서는 이런 일은 빠른 보고가 중요하다 하시면서 차관님께 보고하라 전화로 지시하셨다. 털레털레 자료를 들고 보고드렸다. 2차관님께 혼자 보고 드렸던 것은 처음이었다.

​2차관님께서는 가만히 듣고 계셨다. 2차관님께서 되물으셨다.

괜찮겠어?

나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뭐라고 답했는지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고 했던가.

​공무원을 그만두고 싶었다.

​정상대로

​부총리님께 편지를 준비했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적자성 국채가 추가 발행되는 것을 바라볼 수 없었다. 국채시장에 충격이 가해질 것이 눈에 보였다. 국채과에 있는 후배 사무관에게 내용을 보여주고 고쳐달라고 했었다. 같이 쓰자고 운을 띄었다. 부담스럽다면 나 혼자라도 좋았다. 뭐라도 하지 않는다면 분명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다.

​그렇게 편지를 준비하고 있을 때 즈음.

​당시 박성동 국장님이 나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정말 아니다.

발행하면 연간 이자비용만 천억 원이 넘어가는데 이거 누가 책임질 거냐고.

내가 지금까지 상부에서 시키면 어지간하면 시키는 데로 다 수용하고

하라면 하라는 데로 다 했는데 이건 아니야.

필요도 없는 국채를 12월에 발행해서 이자 물게 생겼다. 이게 말이 되는 거냐?

페이퍼를 다시 준비하라 하셨다.

​누군가가 부총리가 그렇게 강하게 주장한 건인데 결정을 다시 돌릴 수 있겠냐고 되물었다.

​국장님은 두 번 안되면 세 번 네 번이라도 보고해야겠다고 하시면서 광화문청사 부총리 집무실에 찾아갔다.

​신 사무관. 클립을 페이퍼 양쪽에 둘 다 끼워두라고.

지금 우리는 부총리 한테 반기를 드는 거니까

부총리가 보고서 보다가 집어 던질 수 있단 말야.

집어 던지면 낼름 다시 가서 가져다 드려야 되는데 그 때 페이퍼 빠져있으면 안 된다고.

튼튼하게 꽃아.

국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웃으셨다. 멋있으셨다. 국장님같은 역할을 하는 공무원이 있기에 그래도 국가 정책이 큰 오류 없이 돌아가는 것 같다고도 생각이 들었다.

​부총리 보고는 생각했던 것보다 부드럽게 끝났다. 의외였다.

​부총리님은 왜 추가 발행이 안되는지, 국채시장에 어떤 타격이 가해지는지 보고를 들으시더니 정말 발행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느냐 되물으셧다. 국장님께서 그렇다고 하니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그리고는 알겠다고,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국장님의 승리셨다.

​왜 심정이 바뀌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2차관님도 별도로 찾아 뵙고 설득했었기에 마음이 변하셨던 거라는 말도 있었고, 당시 과거 국채과장을 역임하셨던 K 정책실장님께서 직언했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바이백 취소로 국채시장이 뒤집혔었던 것도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어쨋건 결정적인 것은 국장님의 보고였다. 가만히 계셨다면 2017년 12월. 4조 원의 적자성 국채가 추가 발행되었을 것이니까.

​발행하지 않기로 결정되면서 모든 것은 잘 끝났다. 비록 바이백 취소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지만 말이다.

​국장님 이하 공무원들끼리 잘 끝났다고 애써 위로했다. 바이백 취소도 잘했던 것이라 재평가했다. 바이백 취소로 인한 언론 보도와 마찰이 없었다면 부총리가 절대 고집 꺽지 않았을 거라 하면서.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국채 시장을 한 번 망가뜨려 놓고 그 때 안 망가뜨렸다면 더 크게 망했을 것이라 위안하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난장판 : 청와대의 개입

​적자성 국채의 추가 발행은 없는 것으로 결정났다. 대통령 월례보고 자료도 그에 맞추어 다시 수정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추가 발행하지 않기로 결정된 것이기에 보고안건에서 빠질 수도 있다 하였다.

​그 때 즈음 청와대에서 국장님을 소환했다고 하였다. 왜 발행하기로 했던 적자성 국채 추가 발행이 취소된 것인지 소명하라는 요청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분위기를 보니 청와대 입장이 생각보다 강경한 것 같았다. 적자성 국채의 추가 발행을 강하게 요구해 왔다.

​어처구니없는 지시였다. 실상을 알고 보니 더 그랬다.

​대통령에게 보고하려 하는 경우 부처에서는 청와대에 보고안건을 먼저 제시해야 한다. 청와대는 안건을 보고 그 경중에 따라서 대통령 보고 일정을 잡는다.

​이번에도 부총리가 대통령 월례보고를 요청하자 청와대는 보고안건을 요구했다. 그리고 난 후 보고 안건에 따라 소관과에 개별 연락을 하여 안건 자료 내용을 취합 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수석보좌관회의를 열어서 안건 내용을 회의했고 부총리의 이번 보고건은 대통령님께 대면으로 보고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보고 안건들은 수석보좌관회의를 한번 더 거쳐 안건 마다 다시 결론을 내린 후 대통령에게 경제관련 보고라 하면서 이미 보고를 끝마쳤다고 들었다. 그 후 부총리에게는 이미 보고된 건이니 대통령 보고가 필요 없다고 말하였다 한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고 했다. 청와대에서는 부총리가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을 최소화하길 바란다고 들었다. 부총리가 직접 대통령께 보고하는 것은 최소화하고 청와대에서 안건을 자체적으로 검토하여 수석이나 정책실장 등이 대통령께 관련 내용을 보고한다 들었다.

​따라서 국장님의 직언으로 마지막에 결정이 바뀐 적자성 국채 추가발행계획은 이미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심도 깊은 논의를 거쳐 추가 발행을 하는 것으로 결정된 후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된 사안이었던 것이다.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는 무슨 자료로 논의를 하고 어떤 토의를 거친 것일까. 거기에도 내가 모를 또 다른 정무적 판단이 있는 것인가. 이럴거면 부처는 왜 있는 것일까. 나는 혼란스러웠다.

​청와대에서는 이미 결정되어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된 이 사안은 되돌릴 수 없으니 기존 계획대로 발행하라고 요구하였다. 나는 이 꼴이 우습고 어이가 없었다. 국민들은 이런 의사결정 방식을 알까 싶었다. 이런 일처리 방식도 공무원이 알게 된 직무상 비밀인 것인가. 외부로 알리면 안될 비밀은 비밀일 것 같았다. 외부로 알려지면 아무도 정부의 의사 결정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니. 4조 원 내외의 국채 추가 발행 여부는 청와대에서 이렇게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 역시 부총리님께 보고하여 컨펌을 받은 사안이었다.

​그리고 대통령께 보고했는지 여부를 떠나서 적자성 국채는 발행하지 않는 것이 맞았다. 돈이 많은데 빚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실무선에서는 청와대가 뭐라고 하건 신경쓰지 않았다. 국채과 사무관 선배는 부총리님께 보고한 내용에 따라 적자성 국채 추가 발행이 없는 것으로 12월 국고채 발행계획을 수립하였다. 기자들에게 보도 1시간 전 엠바고를 걸고 보도자료를 배포하였다. 보도자료만 나가면 이제 모든 것은 끝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보도자료를 배포한 이후 국회에 있는 간부님들 전화가 요동치며 울리기 시작했다. 청와대였다.

​당장 국채 추가 발행을 안 하기로 한 12월 발행계획 보도를 취소하라는 지시였다. 엠바고를 걸긴 했지만 이미 기자들에게 배포된 내용이다. 발행 계획 내용은 국채시장 구성원들 대부분이 거의 아는 상황이었다. 금융권은 어느 조직보다 소문이 빠른 곳이다. 청와대가 생각이 있는 것인가 싶었다. 만약 여기서 언론 보도를 취소한다는 것은 국채발행 정책에 대한 국가 신뢰를 정말 땅으로 처박는 것이었다. 금융시장은 이렇게 다루어서는 안 되는 곳이다.

​청와대의 기조는 매우 강경했다. 따르지 않으면 직접 나설 것 같은 분위기였다. 현장 분위기는 혼란스러웠다. 누군가는 국회 복도에서 언론사들에 연락을 돌리면서 보도를 취소할 수 없을지 사정했다.

​그 때 국채 과장님이 나섰다. 청와대가 뭐라 그래도 적자성 국채 추가 발행이 없는 것으로 보도한 12월 발행계획은 절대 취소할 수 없다고 하셨다. 위기 때 진면목이 드러나는 법이다. 부총리께 보고를 하고 발행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안이었기에 실무진 의지만 확고하면 아무리 청와대라고 하여도 결정을 뒤바꿀 수는 없었다.

​보도자료가 나오고 난 후에도 청와대의 요구는 멈추지 않았다. 국채 발행에 대한 재공고를 내서 발행을 추가하라 했다.

청와대 경제수석과 부총리가 전화로 싸웠다고 했다. 부총리가 ‘내가 대통령께 보고 하겠다고 할 때 시켜주지도 않더니 이제 와서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고 있다’고 화를 내었다고 하였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난 정권 때 당시 유일호 부총리에게 대통령 대면보고 한 적 있냐고 캐물었던 것이 지금 정권의 주축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제를 총괄한다고 말하는 경제부총리가 대통령 대면보고를 한다고 했을 때 청와대에서 스크린 한다는 것이 합리적인 일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정책의 합리성 여부를 떠나서 대통령에게 보고된 사안이라 하면서 이건 무조건 지켜져야 한다는 식의 청와대 조직은 정말 국민을 위한 정책을 펴고 있는 것인가? 더구나 나중에 들어보니 대통령 보고조차 서면보고였다 들었다.

​촛불시위에 나갔던 국민의 한 명으로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행태를 문제 삼아서 ‘이게 나라냐’라고 외치면서 정권을 바꾼 것이 아닌가? 바뀐 정권도 왜 정책 의사 결정 방식은 바뀐 것이 없을까? 국민을 위한 정부라고 했지 않은가.

공무원을 그만두고 이 현실을 알리고 싶었다. 이런 업무 처리방식은 잘못된 것이다. 바뀌어야 한다.

​이번 정권의 문제는 아니다. 매 정권 그랬다고 한다. 바꾼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바뀌는 것은 없는 것인가. 글을 읽는 당신이 바꾸어 줬으면 좋겠다.

​청와대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나,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나 청와대는 둘 다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때도 실제 경제 수장은 경제부총리가 아니라 청와대 경제수석인 안종범이었었고 그건 문재인 정부 때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기재부 공무원들은 중요 정책을 다룰 때 부총리 뿐만 아니라 청와대에도 보고한다. 청와대 보고는 부총리 보고와 같은 중요도로 여겨진다.

​청와대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특히 인사 결정에 그렇다. 주요 간부인사는 사실상 부총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청와대에서 진행하는 것이기에 간부로 가면 갈수록 부총리보다 청와대의 의중을 많이 신경 쓰는 것으로 보였다. 사실 청와대의 각 비서관은 차기 부처 차관으로 유력한 자리이기도 하다.

​왜 얼마전 KBS뉴스에서 보도된 적도 있지 아니한가. 기재부 국장들이 여러 경로를 통하여 안종범 당시 청와대 수석에게 인사와 관련한 부탁을 했던 것을. 이번 정권도 다르지 않다. 그건 청와대 조직과 일처리 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다.

​이럴 거면 부총리, 그리고 장관을 왜 두는지 모르겠다. 수석들이 대통령을 만나고, 부처 장관의 대통령 보고는 청와대에서 스크린해서 못오게 하고, 중요 결정들은 수석보좌관회의를 열어 처리한다면 말이다. 그렇게 내려진 결정이 꼭 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부총리, 장관은 무엇인가. 그저 국회 상임위를 상대하기 위한 방패인 것인가. 국민들은 부총리와 장관이 해당 분야의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라 믿고 있는데 말이다.

​대학시절에 대통령학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청와대 구조를 배우는 행정학과 전공과목이었다. 그때 교수님께서 미국의 경우 재무부장관은 언제건 원할 때 대통령에게 보고가 가능하다고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재무부 장관은 백악관 바로 옆에 위치한 재무부 건물로 와서 직원들에게 대통령의 지시를 설명하고 그 지시에 대해 논의하고 의사결정을 내린다.

​한국은 왜 이 당연한 것이 안 되는 것인가.

​청문회 때문일 수도 있다. 정말로 대통령이 함께 일하고 해당 분야의 정책 수립을 맡기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청문회를 통과하기는 쉽지 않으니까. 그러니 진짜 실권은 청문회 없이 대통령이 원하는 인물을 앉힐 수 있는 청와대 수석에게 주는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장관은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용으로 국회 통과가 쉬운 사람 위주로 물색해서 앉히는 것이다. 친구들로부터 몇몇 작은 부처의 경우 장관들조차도 실제 의사결정을 미루고 청와대만 바라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세종시 때문일 수도 있다.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과 행정부의 거리가 너무 멀기에 지근거리에 위치해 있는 청와대의 역할이 커지고 행정 각부의 장관보다는 청와대 수석들의 보고에 더 정책 영향력이 커지는 것일 수 있다.

​어쨋건 그로 인하여 세종에 있는 행정부는 지금 제대로 된 업무지시 및 보고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행정 집행은 청와대가 아닌 개별 부처에서 한다. 정보도 개별부처에 우선적으로 모이고 정책페이퍼도 이곳에서 작성된다.

​정책 페이퍼를 쓰고 나면 이걸 청와대에 보고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고민한다. 청와대에 보고를 하기로 결정 하더라도 청와대 지시와 부처 명령체계 내의 지시가 다르면 재차 고민한다. 누구말을 따라야 하는 것인가. 청와대도 수석들이 관장하는 업무범위가 중첩되어 있어서 복잡한 건은 여러 수석들마다 목소리가 다르기까지 한다.

​의사결정은 늦어진다. 무언가 정책 아이디어를 내고 추진해보고자 할 경우 부처 내부 뿐만 아니라 청와대에도 뛰어 다녀야 한다. 세종에서 청와대를 갔다 오면 하루가 걸린다. 업무협의에만도 하루가 지날 것이다. 그럴 바에는 그냥 새로운 일을 만들지 않고 청와대만 바라보는 것이 낫다.

​청와대는 청와대대로 공무원이 지시해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개별부처의 특정과에 특정업무를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은 공식적으로 청와대 조직에 없다. 그러니 지시를 받으면 비공식적으로 처리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다시 부처 내부의 보고 루트를 따라 처리해야 한다. 그 사이 수많은 반발점들이 다시금 발생한다. 정책은 어딘가로 표류하게 된다. 청와대의 지시가 비합리적인 사안이거나 현행 법령에 비추어 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 그걸 검토하고 다시 보고하는데 다시 한 세월이 걸린다.

​기형적인 구조가 아닌가. 행정부 내부에서 정책의사의 결정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미국 재무부와 비교해 보자. 사건 A가 터졌고 재무부 혹은 기획재정부에서 이를 인지했다면 미국은 재무부 장관이 그냥 바로 옆 건물인 백악관에 가서 대통령께 보고하고 지시 받고 다시 백악관 옆에 위치해 있는 재무부 건물로 가서 논의하고 업무처리를 하면 된다.

우리나라와 비교해 보자. 사건 A가 터졌다. 기획재정부에서 해당사건을 담당하는 과는 부총리께 까지 내부보고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러면서 청와대에도 보고 해야 할 사건인지부터 일차적으로 고민한다. 사실 내부보고부터가 어렵다. 기획재정부는 세종에 있지만 기획재정부 장관인 부총리는 항상 광화문 서울청사 집무실에서 근무하고 있기에 내부 보고를 위해서도 세종에서 서울까지 올라와야 한다. 사실 부총리님 이전에 국장님이나 차관님만 하더라도 세종에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서울에 분산되어 있는 집무실을 돌면서 보고를 해야 한다. 여기서 최소 하루. 꾸역꾸역 보고를 마치고 결정을 받았다면 이제는 부총리가 대통령 보고를 위해 청와대에 미리 안건을 통보해서 보고 일정을 받아야 한다. 통상 청와대는 부처 장관의 대통령 보고가 있기 전에 부처 국장이나 과장을 들어오게 하여 관련 내용을 설명하게 한다. 여기서 최소 이틀.

내가 경험한 것처럼 이 과정에서 청와대가 이미 내부 결정을 끝내고 보고한 건이라고 보고를 물려버릴 수도 있다. 아니면 그 과정에서 부총리 결정과는 다른 내용을 업무를 담당하는 과에다가 지시할 수도 있다. 그러면 정책 결정은 다시 산으로 간다. 여기에 정치권까지 개입하기 시작하면 그 사건이 어떻게 해결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되어 버린다. 합리성은 그때부터 없어진다.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합리적인 의사 결정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이상한 것 아닌가.

​당시 사건으로 돌아가면 어찌 되었건 간에 부총리는 대통령 보고를 꼭 하고자 하셨다. 며칠 뒤 혁신성장 전략회의가 있어 대통령과 부총리가 함께 행사에 참석하는 일정이 있었다. 대외적인 행사를 할 때는 부처 장관이 얼굴을 내밀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 기회를 활용해 대통령께 관련 내용을 보고하기로 했다 들었다. 쉬는 시간을 활용해서 대통령께 보고하기로. 청와대는 모르게 해야 하니 정보가 청와대로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각별하게 주의하라고 당부가 있기도 했었다. 코미디였다.

그리고 사건은 완전히 끝났다.

​나는 의문이었다. 국가는 과연 지난 정권보다 나아진 것인가. 공무원으로 계속 일해 나갈 때 나는 행복할까.

​이런 사건들이 반복되는 걸 계속 보면서 일을 하다 보면 나도 과장이 되고 국장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국가 일이란 원래 이런 거라며 합리화시킬 것 같았다. 그러려고 공부를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니 그런 것보다 이런 업무처리 구조는 옳지 않다. 극단적인 말로 세월호 사태도 업무처리 시스템이 부재한 데서 생긴 일 아닌가? 만약 유사한 일이 다시 발생한다고 하면 이번 정부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 이번 정부는 일선 공무원이 다르게 업무처리를 할 수 있도록 국가 행정시스템을 바꾸었는가?

​이국종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석해균 선장을 한국으로 이송하기 위한 에어 엠뷰런스 조달이 다시 필요해진다고 했을 때 이번에는 이국종 교수님이름이 아니라 국가 이름으로 적절한 시간에 에어 엠뷰런스 조달이 가능할까?

​나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있다. 여전히 똑같다. 바뀌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바꾸어야 한다. 정권이 아니라 시스템을 말이다.

-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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