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쿨 교수로 있는 친구를 만났는데, “수험 적합성이 떨어진다”는 강의평가를 받았다고 푸념한다. ‘수험 적합성’이라는 단어가 쉽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친구의 강의는 변호사 시험 준비에 거의 도움이 안 된다는 얘기다.
로스쿨과 변호사 시험의 문제만은 아니다. 한국의 교육은 수험 적합성이 지배한다. 한국 사회가 수험에 적합한 사람에게 유리하고 반대로 시험에 실패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가혹하기 때문이다.
‘고시 3관왕’ 같은 분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수험 적합형 인간이다. 시험 잘 치는 재주로 좋은 법대에 들어갔다. 사법시험을 준비할 자원이 넘치는 학교였고,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니 큰 어려움 없이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에서도 괜찮은 성적을 받았고, 대형 로펌에 들어갔다. 로펌은 연수원 성적만으로 사람을 뽑지는 않지만, 성적이 별로였다면 그 로펌에 채용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좋은 로펌에 취직하니, 변호사로서 실력을 쌓을 기회와 시간이 주어졌다. 상당수 신규 변호사들이 기초를 닦을 여유조차 없이 현장에 내던져져 소모품처럼 사용되는 것과는 달랐다. 변호사로서의 근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일이 넘쳤고, 성실하게 따라가면 지식과 경험을 전수받을 수 있는 훌륭한 선배들이 있었다. 지금 내가 조그맣게나마 로펌을 창업해서 운영하는 것도 그 덕분이다.
내가 변호사로 자리잡은 과정은 수험 적합형 인간이 어느 시험에서의 성공으로 확보한 유리한 입지와 자원을 다음 단계의 시험으로, 심지어 사회생활로 이어 나갈 수 있었던 사례다. 전형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현실성이 없는 경우는 아니다. 오로지 개인의 능력으로 시험이라는 경쟁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는 점은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안다. 하지만 수험 적합성을 권하는 사회에서 수험 적합형 인간은 똑같이 노력해도 더 큰 결과를 거둘 수 있었다. 있는 사람이 더 받아 더욱 풍족하게 되는 이른바 ‘마태복음’ 효과일 것이다.
입시와 채용에서 부정이 잇따르고 ‘현대판 음서제’ 얘기까지 나오다 보니, 시험이 공정성을 확보하는 대안으로 보인다. 학력고사, 사법시험, 기수별 공채는 최소한 공정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시험제도가 늘 공정하지는 않다. 시험은 시험 잘 보는 사람에게 유리하다.
모두가 알다시피, 시험으로 사람의 됨됨이는 고사하고 능력조차 온전히 평가할 수 없다. 공부 잘하는 것과 시험 잘 보는 것부터 다른 문제다. 하지만 시험제도는 모든 결과를 개인의 성취로 착각하게 만든다. 열심히 노력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나는 누릴 자격이 있다고. 그렇지 않다. 특정한 능력이 있는 사람은 유리한 위치에서 계속 많은 것을 가질 수 있고, 그런 능력이 어쩌다 부족한 사람에게 실패의 낙인까지 얹는 사회는 옳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다. 시험을 없앨 수는 없지만, 시험 그 너머에 있는 사람의 잠재력을 볼 수 있는 사회, 수험 적합성에 지배되지 않는 사회로 움직이기 위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
유정훈 변호사
‘고시 3관왕’ 같은 분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수험 적합형 인간이다. 시험 잘 치는 재주로 좋은 법대에 들어갔다. 사법시험을 준비할 자원이 넘치는 학교였고,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니 큰 어려움 없이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에서도 괜찮은 성적을 받았고, 대형 로펌에 들어갔다. 로펌은 연수원 성적만으로 사람을 뽑지는 않지만, 성적이 별로였다면 그 로펌에 채용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좋은 로펌에 취직하니, 변호사로서 실력을 쌓을 기회와 시간이 주어졌다. 상당수 신규 변호사들이 기초를 닦을 여유조차 없이 현장에 내던져져 소모품처럼 사용되는 것과는 달랐다. 변호사로서의 근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일이 넘쳤고, 성실하게 따라가면 지식과 경험을 전수받을 수 있는 훌륭한 선배들이 있었다. 지금 내가 조그맣게나마 로펌을 창업해서 운영하는 것도 그 덕분이다.
내가 변호사로 자리잡은 과정은 수험 적합형 인간이 어느 시험에서의 성공으로 확보한 유리한 입지와 자원을 다음 단계의 시험으로, 심지어 사회생활로 이어 나갈 수 있었던 사례다. 전형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현실성이 없는 경우는 아니다. 오로지 개인의 능력으로 시험이라는 경쟁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는 점은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안다. 하지만 수험 적합성을 권하는 사회에서 수험 적합형 인간은 똑같이 노력해도 더 큰 결과를 거둘 수 있었다. 있는 사람이 더 받아 더욱 풍족하게 되는 이른바 ‘마태복음’ 효과일 것이다.
입시와 채용에서 부정이 잇따르고 ‘현대판 음서제’ 얘기까지 나오다 보니, 시험이 공정성을 확보하는 대안으로 보인다. 학력고사, 사법시험, 기수별 공채는 최소한 공정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시험제도가 늘 공정하지는 않다. 시험은 시험 잘 보는 사람에게 유리하다.
모두가 알다시피, 시험으로 사람의 됨됨이는 고사하고 능력조차 온전히 평가할 수 없다. 공부 잘하는 것과 시험 잘 보는 것부터 다른 문제다. 하지만 시험제도는 모든 결과를 개인의 성취로 착각하게 만든다. 열심히 노력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나는 누릴 자격이 있다고. 그렇지 않다. 특정한 능력이 있는 사람은 유리한 위치에서 계속 많은 것을 가질 수 있고, 그런 능력이 어쩌다 부족한 사람에게 실패의 낙인까지 얹는 사회는 옳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다. 시험을 없앨 수는 없지만, 시험 그 너머에 있는 사람의 잠재력을 볼 수 있는 사회, 수험 적합성에 지배되지 않는 사회로 움직이기 위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
2018-08-29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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