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들어 별들을 보세요. 제발 당신 발만 쳐다보지 말고…”
“비록 움직일 순 없어도 마음 속에서 나는 자유롭습니다.”
13일(현지시간) 76세로 세상을 떠난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주옥같은 어록을 남여 인류에게 커다란 영감을 줬다. 장애를 극복해낸 그는 어떤 면에서 죽음도 극복했다는 평을 받는다.
‘루게릭병’이라는 역경을 이겨내고 상상 이상의 족적을 남긴 고인의 말은 꼭 과학 계통뿐 아니라 모든 인생의 구석구석을 아우를만한 황금 나침반 같은 것이었다.
역대급 천재로 기억되는 고인은 먼저, 지능을 다른 각도에서 정리했다. 그에게 지능은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는 “내 아이큐가 몇인지 모르겠다. 자기 아이큐를 뽐내는 이들은 모두 루저들”이라고도 일갈했다.
과학과 신학의 영역을 넘나드는 통찰적 언명과 지식인의 겸양을 현시하는 언급도 많았다. “신은 존재할지 모른다. 그러나 과학은 창조자(창조주)의 도움 없이 우주를 설명할 수 있다”라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 “신은 가끔은 주사위를 안 보이는 곳으로 던진다”고 했고, “내가 우주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뭔가를 보탰다면, 나는 그것으로도 행복하다”고 했다.
인류의 진화에 관한 간명한 주장도 많이 회자한다. “우리는 매우 평균적인 별의 한 소행성에서 원숭이들이 진화한 종족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우리를 매우 특별한 무엇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의 어록 중 가장 큰 영감을 주는 것은 인생에 관한 말들이다.
20대부터 희소병을 앓는 그는 “비록 내가 움직일 수도 없고, 컴퓨터를 통해야만 말할 수 있다고 해도 나의 마음속에서 나는 자유롭다”고 했다.
낙천적 기질과 유머도 있었던 고인은 “인생은 웃기지 않으면 비극일 것”이라고 했다.
장애인들에게도 그의 촌철살인은 이어졌다. “당신이 장애가 있더라도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라. 장애 탓에 못 하는 것들이 있어도 너무 유감스럽게 생각 마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철두철미 지식인이었던 그의 앎에 대한 태도는 후학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지식(앎)의 가장 큰 적(敵)은 무지(또는 무식)가 아니라, 기존 지식이 주는 환상이다.”
다음은 호킹 박사의 출생부터 타계까지의 연보다
▲ 1942년 1월 8일 = 영국 옥스퍼드에서 생물학자인 아버지 프랭크 호킹과 어머니 이소벨 호킹 사이의 네 자녀 중 첫째로 출생
▲ 1952년 = 사립학교 ‘세인트 올번스 스쿨’ 입학
▲ 1959년 = 옥스퍼드대 장학생 입학
▲ 1962년 = 케임브리지대에서 우주론 연구 시작
▲ 1963년 = 21살 나이로 루게릭병과 함께 시한부 2년 진단
▲ 1965년 =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만난 현대언어 전공자 제인 와일드와 결혼
▲ 1967년 = 큰아들 로버트 출생
▲ 1970년 = 딸 루시 출생
▲ 1974년 = 세계 최고(最古) 자연과학학회인 ‘로열 소사이어티’ 회원 선출. 32살로 최연소 중 한 명
▲ 1979년 = 케임브리지대학 수학과의 루카시언 석좌교수 임명(~2009년). 아이작 뉴턴도 이 자리 역임. 셋째 아이 티머시 출생
▲ 1985년 = 스위스 제네바 병원에 폐렴 입원. 수술 후 생존했지만, 목소리 상실. 이듬해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전자 음성합성장치를 통해 대화 시작
▲ 1988년 = 우주 빅뱅이론 관련 기념비적 대중 과학서 ‘시간의 역사’(A Brief History of Time) 출간
▲ 1990년 = 첫 한국 방문. ‘우주의 기원’과 ‘블랙홀과 아기우주’ 주제 강연
▲ 1995년 = 자신의 간호사인 일레인 메이슨과 재혼
▲ 2000년 = 두 번째 방한. 제주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 `코스모 2000‘ 참석
▲ 2007년 = 일레인 메이슨과 이혼
▲ 2009년 = 급성 호흡기 감염 증세로 입원했다가 회복
▲ 2018년 = 76세 일기로 타계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비록 움직일 순 없어도 마음 속에서 나는 자유롭습니다.”
3월 14일 별세한 스티븐 호킹
지난 2000년 9월 4일-8일, 제주도에서 개최되는 COSMO-2000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연합뉴스
연합뉴스
‘루게릭병’이라는 역경을 이겨내고 상상 이상의 족적을 남긴 고인의 말은 꼭 과학 계통뿐 아니라 모든 인생의 구석구석을 아우를만한 황금 나침반 같은 것이었다.
역대급 천재로 기억되는 고인은 먼저, 지능을 다른 각도에서 정리했다. 그에게 지능은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는 “내 아이큐가 몇인지 모르겠다. 자기 아이큐를 뽐내는 이들은 모두 루저들”이라고도 일갈했다.
과학과 신학의 영역을 넘나드는 통찰적 언명과 지식인의 겸양을 현시하는 언급도 많았다. “신은 존재할지 모른다. 그러나 과학은 창조자(창조주)의 도움 없이 우주를 설명할 수 있다”라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 “신은 가끔은 주사위를 안 보이는 곳으로 던진다”고 했고, “내가 우주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뭔가를 보탰다면, 나는 그것으로도 행복하다”고 했다.
3월 14일 별세한 스티븐 호킹
2012년 8월 29일 촬영된 사진.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교수가 2012 페럴림픽 개막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호킹 교수 가족의 대변인은 몸이 병으로 마비됐음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에 걸쳐 넓고 빛나는 인지능력을 가졌던 호킹 교수가 별세했다고 2018년 3월 14일 밝혔다.
AP통신
AP통신
그러나 그의 어록 중 가장 큰 영감을 주는 것은 인생에 관한 말들이다.
20대부터 희소병을 앓는 그는 “비록 내가 움직일 수도 없고, 컴퓨터를 통해야만 말할 수 있다고 해도 나의 마음속에서 나는 자유롭다”고 했다.
낙천적 기질과 유머도 있었던 고인은 “인생은 웃기지 않으면 비극일 것”이라고 했다.
장애인들에게도 그의 촌철살인은 이어졌다. “당신이 장애가 있더라도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라. 장애 탓에 못 하는 것들이 있어도 너무 유감스럽게 생각 마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철두철미 지식인이었던 그의 앎에 대한 태도는 후학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지식(앎)의 가장 큰 적(敵)은 무지(또는 무식)가 아니라, 기존 지식이 주는 환상이다.”
다음은 호킹 박사의 출생부터 타계까지의 연보다
▲ 1942년 1월 8일 = 영국 옥스퍼드에서 생물학자인 아버지 프랭크 호킹과 어머니 이소벨 호킹 사이의 네 자녀 중 첫째로 출생
▲ 1952년 = 사립학교 ‘세인트 올번스 스쿨’ 입학
▲ 1959년 = 옥스퍼드대 장학생 입학
▲ 1962년 = 케임브리지대에서 우주론 연구 시작
▲ 1963년 = 21살 나이로 루게릭병과 함께 시한부 2년 진단
▲ 1965년 =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만난 현대언어 전공자 제인 와일드와 결혼
▲ 1967년 = 큰아들 로버트 출생
▲ 1970년 = 딸 루시 출생
▲ 1974년 = 세계 최고(最古) 자연과학학회인 ‘로열 소사이어티’ 회원 선출. 32살로 최연소 중 한 명
▲ 1979년 = 케임브리지대학 수학과의 루카시언 석좌교수 임명(~2009년). 아이작 뉴턴도 이 자리 역임. 셋째 아이 티머시 출생
▲ 1985년 = 스위스 제네바 병원에 폐렴 입원. 수술 후 생존했지만, 목소리 상실. 이듬해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전자 음성합성장치를 통해 대화 시작
▲ 1988년 = 우주 빅뱅이론 관련 기념비적 대중 과학서 ‘시간의 역사’(A Brief History of Time) 출간
▲ 1990년 = 첫 한국 방문. ‘우주의 기원’과 ‘블랙홀과 아기우주’ 주제 강연
▲ 1995년 = 자신의 간호사인 일레인 메이슨과 재혼
▲ 2000년 = 두 번째 방한. 제주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 `코스모 2000‘ 참석
▲ 2007년 = 일레인 메이슨과 이혼
▲ 2009년 = 급성 호흡기 감염 증세로 입원했다가 회복
▲ 2018년 = 76세 일기로 타계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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