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 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워라

‘강간 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워라

조희선 기자
조희선 기자
입력 2018-03-09 20:54
수정 2018-03-09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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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독려한 고전 43년 만에 완역…강간, 여성 옭아맨 남성 권력 도구

용두사미로 끝날까봐 우려 크지만 성폭행 드러낸 건 여성 혁명 시발점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수전 브라운밀러 지음/박소영 옮김/
오월의봄/696쪽/3만 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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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로 모인 여성들의 목소리가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피해 고백을 계기로 법조계에서 터진 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 운동이 문단, 문화예술계로 옮겨붙는가 싶더니 종교계, 교육계, 의료계, 정치권 등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피해자들의 피해 사실만을 폭로하고 근본적인 변화 없이 용두사미로 끝나는 거 아니냐고 우려하지만 미투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여성 혁명의 시작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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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미투는 미국의 사회운동가 타라나 버크가 2006년 성폭력 희생자들을 위한 비영리 기관을 만들면서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불길은 할리우드로 번져 지난해 10월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각종 성희롱과 성추행을 까발린 뒤 전 세계로 확산 중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오래전에 미투 운동을 독려한 책이 있었다. 여성주의 활동가 수전 브라운밀러가 지은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다.

1975년 출간된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이번에 처음으로 완역돼 나왔다. 1990년대 이 책의 일부를 발췌해 번역한 책이 있었지만 절판됐다가 최근 미투 바람을 타고 제대로 모양을 갖춰 나왔다. 국내 출간이 늦었던 것은 7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 문장이 번역하기 쉬운 편이 아닌 탓도 있었다. 일찍이 이 책의 가치를 높이 산 출판사 오월의봄은 번역과 편집에 각각 1년씩 공을 들인 뒤 세상에 책을 내놓았다. 43년 만에 국내에 소개됐지만 이 책에서 지적하는 남녀 간 불평등한 구조와 여기서 비롯되는 성폭력 문제가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1935년생인 저자는 미국 브루클린의 유대인 중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2차 대전 당시의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 역사를 배운 것이 후일 사회적 약자를 향한 집단적 폭력에 맞서는 운동가가 된 계기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뉴스위크와 NBC 등에서 저널리스트와 저술가로 활동한 그녀는 1968년부터는 여성 단체 ‘뉴욕 급진 페미니스트’의 일원으로도 활약했다. 1971년 이 단체가 주최한 ‘강간 말하기 대회’와 ‘강간에 관한 주말 학술 대회’는 그녀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됐다. 여성들의 성폭력 증언을 접한 뒤 상상치 못한 남자들의 폭력성과 성폭력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 것이다. 저자는 4년간 도서관에 파묻혀 강간에 대한 역사 기록을 섭렵해 여성의 관점에서 강간에 대한 정의를 새로 썼다.

저자는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에 묶어 두려고 의식적으로 협박하는 과정”을 강간이라고 일컫는다. 강간을 가능하게 한 근본적인 원인은 생물학적인 측면이 아니라 자신보다 신체적으로 약하고 자기방어 수단을 지니지 않은 여성들을 목표로 삼아 저지르는 권력 범죄라는 것. 강간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남성들의 강간 문화는 책과 영화, 노래, 언론 보도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지금까지도 사회의 전 영역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 범죄를 완전히 근절하기까지 긴 시일이 걸릴 것이라고 인정한다. 문화 생산물에 속속 스며들어 있는 여성에 대한 성적 적대 행위와 만연한 폭력 미화, 법 집행자 대다수가 남성인 현실에서 여성의 현실을 반영한 법을 다시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197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급진 페미니즘 운동에 의미를 부여하며 여성 운동에서 미래를 찾는다.

강간을 수치스러워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있는 범죄로 만든 것 자체를 이미 혁명의 시작으로 본다. 실제로 미국에서 1970년대 일어난 강간 반대 운동은 24시간 직통전화가 가능한 강간 위기대응 센터, 강간 범죄 법제화 연구 모임, 병원 응급실과 연계하는 강간 대응 프로젝트로 이어지는 성과를 거뒀다.

이에 싸울 줄 아는 여성이 되라고 촉구한다. “반격하라.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불균형을 바로잡고, 우리 자신과 남성들을 강간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게 하고자 한다면, 우리 모두가 여러 층위에서 함께해야만 하는 일은 바로 맞서 싸우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완벽한 성폭력 근절을 위해서는 여성만큼이나 남성의 이해와 선한 의지도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그녀의 말대로 “강간의 미래를 단호히 부인할 차례”인 우리가 지금 읽어 봐야 할 책이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2018-03-1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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