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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한 친구여, 인천학생들의 6·25 참전 역사 찾기를 도와다오!”

“전사한 친구여, 인천학생들의 6·25 참전 역사 찾기를 도와다오!”

입력 2018-01-30 16:36
업데이트 2018-01-30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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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7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창립과 활동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 소위·24세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스승 추모 액자들을 전시해놓은 이 기록관은 큰아들인 이규원 치과 원장이 아버지 이경종 씨의 생일날인 2017년 4월 18일 개관했다.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스승 추모 액자들을 전시해놓은 이 기록관은 큰아들인 이규원 치과 원장이 아버지 이경종 씨의 생일날인 2017년 4월 18일 개관했다.
아래의 글은 6·25전사(戰死) 인천학생 양순혁의 인천상업중학교 동기 동창 이경종이, 전사한 고향 친구 고(故) 양순혁을 추모(追慕)하며 서해문화 1999년 1월호에 기고했던 글이다.

양순혁은 전사하였기 때문에 아래의 글로 양순혁 참전기(參戰記)를 대신한다.
인천 중구 신포동에 있는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역사 이경종 기록관’.
인천 중구 신포동에 있는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역사 이경종 기록관’.
인천상업중학교 같은 반 친구 양순혁과 나

양순혁은 인천 중구 경동에서 태어나서, 인천송림국민학교를 졸업하고, 6·25 사변(事變) 때 6년제 공립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6·25 참전 인천학생 이경종)하고는 인천상업중학교 동기동창생이었다.

1950년 6월 25일 6·25사변이 터지고, 악몽과도 같았던 인민군(人民軍) 치하에서 지옥보다도 더한 고통을 견디고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민군 치하에서 벗어났다.

6·25 사변(The Korean Civil War)

사변은 국가와 비국가 사이에 발생한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으로는 미국 남북전쟁(The Civil War)과 한국 6·25 사변(The Korean Civil War)이 있다.

6·25 사변은 대한민국과 북한 공산괴뢰 집단 간의 무력 충돌이기 때문에 사변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UN군의 개입과 중공군의 참전으로 너무 많은 국가가 참전하여 일반적으로 이제는 한국전쟁(韓國戰爭)이라 한다.

중공군의 참전과 인천학도의용대의 남하

1950년 11월이 되자 우리 국군과 UN군은 압록강까지 북진했으나, 만주 지역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하여 1950년 12월에는 우리 국군과 UN군은 후퇴하였다.

인천 지역의 학생들은 인천학도의용대를 결성하고 국가 위난의 혼란한 시국에 호국(護國)활동을 하였는데, 1950년 12월 중공군의 참전으로 단체로 남하(南下)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가 인천 병사구 사령부(현재의 병무청)에서 파견을 나온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소위를 따라서 경상남도 통영충렬국민학교에 있었던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를 최종 목적지로 남하할 때, 나와 양순혁도 같이 걸어서 남하하였다.

18일간 걸어서 내려가 도착한 마산

양순혁과 나는 함께 출발하여 첫날은 안양역에서 자고 그다음 날은 수원역에서 하룻밤을 자고, 대전에 도착했을 때는 1950년 12월 24일이었다.

양순혁과 나는 계속 걸어서 같이 내려 갔는데 대구를 지나서 경산, 청도, 밀양, 삼랑진을 지나서 마산에 도착한 것은 인천을 떠난 지 18일만인 1951년 1월 4일이었다.

양순혁과 나는 추운 겨울 함께 걸어서 내려갔는데, 행진하면서 굶거나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 시체를 많이 봤다.

국민방위군 사건

추운 겨울 땅이 얼어서 매장도 못 하고 논바닥에 버려진 많은 국빈방위군 시체는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국민방위군은 전시에 신속한 병력 동원을 위해 1950년 12월 제정한 국민방위군법에 의한 예비군이었으나 1951년 1·4 후퇴 때 소집된 50만명의 국민방위군 중에서 약 10만명이 굶거나 얼어서 죽은 사건이 발생하여 관련된 장성 5명이 총살당했고, 국민방위군은 1951년 5월에 해체되었다.

1951년 1월 4일 마산에서 해병 6기 지원

양순혁과 나는 국민방위군 사건을 보고 경상남도 통영의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초등학교)로 가지 않고 마산에서 해병 6기 모집 광고를 보고 둘이 같이 지원했는데 양순혁은 합격하였지만 나는 탈락하였다.

같은 중학교 같은 반으로 인천에서 마산까지 18일간 함께 의지하면서 같이 걸어서 내려온 양순혁과 나는 1951년 1월 4일 해병 6기에 합격한 양순혁이 입대하는 바람에 헤어지고, 나는 부산으로 배를 타고 가서 1951년 1월 10일 육군 제2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서 자원입대하였다.
1951년 6월 20일 양구 도솔산전투를 끝내고 기념 촬영한 ‘전사 인천학생’ 故 양순혁(해병 6기). 故 양순혁은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때 자원입대하여 16세에 전사하였다. 故 양순혁의 친형 양종혁 제공(1998년 6월 7일)
1951년 6월 20일 양구 도솔산전투를 끝내고 기념 촬영한 ‘전사 인천학생’ 故 양순혁(해병 6기). 故 양순혁은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때 자원입대하여 16세에 전사하였다.
故 양순혁의 친형 양종혁 제공(1998년 6월 7일)
47년만에야 알게 된 양순혁의 전사

1996년 7월 15일날부터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역사 발굴을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의 도움으로 시작했는데 1997년 9월 10일 동네 친구 민병태를 만나서 양순혁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동네 친구 민병태가 나에게 “내가 해병 장교로 1958년 10월에 해병 제1사단 근무대대 영현(英顯·죽은 사람의 영혼을 높여 이르는 말) 소대장을 하고 있을 때 경기도 장단·양곡·용주골 등 많은 전투지역의 여기저기 흩어져 가매장(假埋葬)되어 있었던 6·25 사변 당시 해병 전사자 무덤을 찾아 그 유골을 개인별로 홍제동 화장장에 모셔 화장한 후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일을 지휘·감독한 일이 있었다. 그때 시신을 화장하고 이장하는 과정에서 명단을 보니 양순혁이 그 명단에 있었으며 양순혁은 우리와 같은 6년제 공립인천상업중학교 동기 동창생으로 해병대에 입대했다 전사하여 그때 국립묘지로 이장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48년만에 비석으로 만난 전사한 고향 친구들

동네 친구 민병태로부터 이러한 내용을 들은 나는 1998년 1월 2일 아침에 동작동 국립묘지를 큰아들 이규원(치과 원장)과 함께 찾아갔다.

양순혁이 잠들어 있는 국립묘지 번호는 서(西)16-1091이었고, 바로 옆 서(西)16-1093에는 박명호의 묘(墓)가 있었다.

근처 서(西)16-1386에 있는 최춘국(해병6기)과 근처 서(西)16-0911에 있는 이중수(해병6기)의 무덤도 찾아보았다.

무덤이 없이 위패 봉안소에 봉안되어 있는 해병대 제6기 김윤수(육군 위패06-7-18)와 해병대 제6기 임익순(육군 위패49-5-47)의 위패(位牌)도 찾아보았다.
1996년 7월부터 20년간 노력해 2016년 6월 신축 건립한 ‘인천학생 6·25 참전관’에서 3부자(父子)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근표 참전관장(이경종 큰손자), 이경종 6·25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 원장(6·25 편찬위원장·이경종 큰아들).
1996년 7월부터 20년간 노력해 2016년 6월 신축 건립한 ‘인천학생 6·25 참전관’에서 3부자(父子)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근표 참전관장(이경종 큰손자), 이경종 6·25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 원장(6·25 편찬위원장·이경종 큰아들).
전사한 친구여! 참전역사 찾기를 도와다오!

나는 그들 무덤 앞에 앉아서 “48년 전 인천에서 같이 중학교에 다니다가,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함께 자원입대하여 참전하여 너희들은 전쟁터에서 죽고, 나는 참전하고 살아 돌아와 여기서 만나게 되었구나! 채 피지도 못하고 전쟁터에서 죽어간 너희들 기록을 남기려고 48년만에 이렇게 찾아왔다”라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또한 잠들어 있는 친구들에게 나는 “넋이 있다면 부디 편안한 잠들기 바라며, 나와 큰아들 이규원(치과 원장)이 하고 있는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 역사 찾기 사업을 도와다오!”라고 말했는데, 눈물이 앞을 가렸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다음 호에 8회 계속

참전기 7회를 마치며

한때 인천에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국가의 징병 모집에 대하여 한참이나 어려서 입대할 필요가 없었던 어린 중학생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 또한 중학교 3학년 16살이어서 인민군(人民軍)에나 끌려갈 나이지, 국군에 입대할 필요는 없는 어린 나이였습니다.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양순혁은 저의 아버지와는 동기 동창으로 같은 반이었습니다.

마산까지 저의 아버지와 같이 내려가서 16살 중학교 3학년 때 국가를 위하여 자원입대하면서 서로 헤어졌습니다.

48년만에 동작동 국립묘지에 누워있는 고향 친구 양순혁을 만나고서 아버지께서 비석을 어루만지시면서 구슬프게 우시는 모습을 저는 지켜봤습니다.

이제 고향 인천에서는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지만, 이 참전기에 그 이름 양순혁을 6·25참전 전사(戰死) 인천학생으로 기록합니다.

이규원 치과 원장(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2018-01-31 3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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