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경주 지진의 역사/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경주 지진의 역사/서동철 논설위원

서동철 기자
서동철 기자
입력 2016-09-13 16:14
수정 2016-09-1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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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경주 남산의 열암곡 석불좌상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마애여래입상이 하나 발견됐다. 마애여래입상이란 커다란 바위 표면에 서 있는 모습의 부처를 돋을새김한 조각을 말한다. 무게 70t, 높이 6.2m의 바윗덩어리에 뛰어난 솜씨로 조각된 마애불은 얼굴을 땅 쪽으로 향한 채 넘어진 상태였다. 미술사학계는 이 마애불이 8세기 후반 양식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부경대 환경지질학과 팀은 열암곡 마애불이 지금의 위치에서 12m 남짓한 경사면 위쪽의 자연 암반에서 떨어져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마애불과 자연 암반에 나 있는 미세한 균열의 양상을 확인해 공통점을 확인한 결과이다. 애초 대형 암반에 새긴 마애불이 매우 강한 외부적 원인으로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다.

미술사학계와 지질학계는 ‘삼국사기’의 신라 혜공왕 15년(779) 기록으로 눈길을 돌렸다. ‘봄 3월 경주에 지진이 나서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고 죽은 사람이 100명이 넘었다’는 내용이다. 마애불은 풍우에 의한 훼손이 크지 않아 얼마 전 조각한 것처럼 매끈하다. 조성 불사(佛事) 직후 엄습한 강력한 지진으로 마애불이 새겨진 자연 암반의 일부가 모암(母岩)에서 탈락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기상청이 2011년 펴낸 ‘삼국사기·삼국유사로 본 기상·천문·지진 기록’에 따르면 ‘삼국사기’에 나타난 신라의 지진 기록은 모두 91차례에 이른다. 지증왕 11년(510)에는 ‘여름 5월에 지진이 나서 백성의 집이 무너지고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문무왕 4년(664)에도 ‘8월 14일 지진이 나서 백성들의 집이 무너졌다. 남쪽 지방은 더욱 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지진은 고려시대에도 이어졌다. 불국사 석가탑은 현종 15년(1024)과 정종 4년(1038) 잇따라 해체 수리했다. 지동(地動), 곧 지진 때문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최근 석가탑을 해체 수리하면서 발견한 중수기(重修記)와 중수형지기(重修形止記)를 판독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고려사’도 현종 4년(1013)과 정종 2년(1036) 강도 높은 지진의 내습을 기록했다. 잇따른 석가탑 중수의 이유였을 것이다. 당시 불국사의 청운교나 백운교 가운데 하나가 무너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내용도 들어 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경주의 지진은 모두 20차례에 가깝다. 특히 인조 21년(1643년) 6월 기록이 눈길을 끈다.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경상도의 대구·안동·김해·영덕에도 지진이 있어 연대(烟臺)와 성첩(城堞)이 많이 무너졌다. 울산에서는 땅이 갈라지고 물이 솟구쳐 나왔다’는 내용이다. 경주는 진앙에서 멀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엊그제 지진의 진앙인 경주시 내남면도 울산광역시 울주군과의 경계 지역에 해당한다. 진도(震度)는 인조시대 것이 강한 듯하지만, 두 지진의 양상은 서로 많이 닮았다는 느낌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2016-09-14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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